<패러렐 마더스>

<페인 앤 글로리>(2019)에서 유년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 인간의 내밀한 이야기를 펼쳐놓았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고통과 영광을 양손에 쥐고 내면의 여행을 했던 그가 다음 행선지로 정한 곳은 ‘엄마들’의 집이다. 이번 여정은 개인을 넘어서는 사회와 역사의 탐구이자, 거친 세상에 얼굴을 맞대고 자식을 키워낸 여자들에 관한 소고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답게 이야기는 멜로드라마의 줄기 위에 꾸려진다. 주인공은 마드리드의 잘나가는 사진작가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다. 야니스는 업무 차 만난 인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에게 고향 마을에 암매장된 증조부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을 문의하는 한편, 그와 사랑에 빠져 임신까지 하게 된다. 아르투로에겐 이미 가정이 있지만, 야니스는 후회하지 않는다며 아이를 혼자 키우리라 다짐한다. 출산 장면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영화는 곧 야니스가 병원에서 만나는 어린 산모 아나(밀레나 스밋)의 불안한 얼굴과 마주한다. 두 여자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딸을 낳는다.

새 생명에 대한 경탄과 육아의 고단함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지나면, 드라마는 본격적으로 어지러운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발단은 아르투로. 혼자서 아이를 키우겠다며 이별을 고하는 야니스의 당당한 선언에 순순히 물러난 그였지만, 태어난 아기가 왠지 멀게 느껴진다며 친자 확인 검사를 요구해 온다. 그렇게 밝혀진 건 놀랍게도 야니스가 아이의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무렵 아나는 답답한 집을 탈출해 자유를 찾아 헤맨다. 우연히 다시 만난 야니스와 아나는 서로를 가깝게 느끼고, 과거를 공유하며 아픔을 위로하다가 어느새 한집에 사는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이 얄궂다.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두 사람은 ‘뒤바뀐 아이’ 이야기의 주인공, 즉 바뀐 아이의 엄마들이다. 자신들도 모른 채 병원에서 서로의 아기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여느 ‘막장드라마’의 전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내용이지만, 영화는 진실 공방이나 다툼에 천착하는 대신 이들의 삶이 놓인 사회, 역사적 맥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패러렐 마더스>는 야니스와 아나가 누구의 어머니인지보다, 그들이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더 주목하려는 작품이다. 이들의 사연은 영화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리를 찾는다. “우리 집안 전통에 따라 나도 싱글맘이 될 거야. 엄마, 할머니처럼.” 야니스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없다. 야니스에게 그건 결핍이라기보다 삶의 자연스러운 한 형태로 감각돼왔다.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는 과정을 통해 야니스는 자신이 보고 자란 여성들의 모습을 닮아간다. 한편, 아나의 어머니 테레사(아이타나 산체스 지욘)와 야니스의 조우는 두 세대의 ‘일하는 어머니’가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배우 일의 위기를 맞았으나, 곧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이혼해 가정을 떠났다는 테레사. 아나는 그런 엄마를 줄곧 멀게 느껴왔지만, ‘자유’는 야니스와 아나, 그리고 테레사를 한꺼번에 엮는 가장 적절한 단어다. 출산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아나가 후반부에 이를수록 굳건한 어머니들의 모습에 제일 근접한 인물이 되는 점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영화의 대단원은 야니스의 고향 마을에서 진행되는 유해 발굴 현장이다. 눈부신 초록 벌판에 묻힌 건 야니스의 증조부만이 아니다. 1936년부터 3년간 지속된 스페인 내전 당시, 십만 명 넘는 시민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죽었고 아무 데나 버려져 묻혔다. 종종 출산이라는 사건을 통해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남긴 역사적 상흔을 다뤄왔던 알모도바르는 <패러렐 마더스>에 이르러 더 직접적으로 자국의 역사에 대해 발언한다. 그는 야니스의 입을 빌려, “그들을 파내 제대로 묻어드리는 것이 할머니, 엄마들과의 약속”이라고 말한다. 종장에 이르러 영화에 담기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모습은 거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갓난아기 때 끌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이야기한다. 영화는 흙에서 조심스레 뼛조각을 골라내는 손, 마을 여자들의 조용한 행진, 찰나의 환상적 장면을 통해 비극의 역사를 위로한다. 차분한 얼굴로 극을 노련하게 이끄는 페넬로페 크루즈는 <패러렐 마더스>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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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