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수진(서현진)은 딸 지나(주예림)와 나란히 눕는다. 지나가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다. “저기 카시오페아. 제일 밝은 별. 저걸 찾으면 북극성도 찾아. 북극성을 찾으면 방향을 알 수 있어.” 아이는 누구에게 별 보는 법을 배웠을까. 수진은 기특하다는 듯 웃는다. 지나 말대로 북두칠성이 지평선 가까이 내려갈 무렵이면, 하늘 높은 곳에서 ‘W’ 모양의 카시오페아 별자리가 형형히 빛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카시오페아 왕비의 일생은 파란만장하다. 남 부러울 것 없이 살던 그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딸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바쳐야 할 위기에 처한다. 저주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동안, 카시오페아는 괴물과 영웅을 차례로 만난다. 가슴 졸이는 싸움을 거듭한 끝에, 신화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공주를 구출한 왕비는 편안히 눈을 감고, 모녀를 포함한 온 가족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 영화와 신화는 다르게 흘러가지만, <카시오페아>가 수많은 별자리 중 카시오페아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길을 잃은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주는 별자리, 카시오페아는 곧 가족을 뜻한다.
영화 초반, 수진에게 가족이란 동행보다는 과제에 가깝다. 새벽 다섯 시에 알람이 울리면, 수진의 하루가 시작된다. 수진은 밀린 업무를 확인하고, 지나를 깨운 후 서둘러 도시락을 싼다. 아무리 잘게 쪼개어 써도 시간은 늘 부족하다. 실력을 인정 받는 변호사이자, 혼자 힘으로 아이를 훌륭히 키워낸 엄마. 둘 중 무엇도 포기할 마음이 없기에, 수진은 매 순간 바짝 긴장하며 산다. 지나는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어린 딸의 출국을 앞두고 정신없는 탓인지, 최근에 수진은 깜빡하는 일이 잦다. 지나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자, 수진은 결국 아빠 인우(안성기)에게 도움을 청한다. 지나는 할아버지를 무척 따르지만, 수진은 아빠가 미덥지 않다. 인우는 30년 넘게 해외에서 일했고, 나이 든 후에는 아픈 아내를 간호하느라 바빴다. 그동안 수진은 인생의 중요한 고비를 홀로 넘어야 했다. 입시와 고시, 결혼과 이혼, 임신과 출산 등 연거푸 시험을 치르는 듯했으나, 의지할 부모는 곁에 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적은 탓에, 이렇다 할 추억도 없는 부녀. 상대를 향한 원망과 죄책감을 묻어둔 채, 둘은 서먹한 관계를 유지한다.
데면데면한 사이에 변화가 생긴 것은, 수진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부터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수진은 분노한다. 병을 형벌이라 여기며,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울부짖는다. 영화는 수진과 인우를 오가며,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닥뜨린 두 인물이 공동의 삶을 이뤄나가는 과정을 담는다. 인우는 딸을 끌어안고 함께 우는 대신, 딸에게 닥칠 위험을 예방하려 애쓴다. 수진의 옆을 지키며 관찰일지를 쓰고, 치매 환자와 보호자의 자조모임에 참석한다. 수진은 일상에 필요한 능력을 빠른 속도로 상실하면서 괴로운 시간을 겪는다. “기억도 없이 살아 있는 게 사람이야?” 악에 받친 외침은 수진의 가장 큰 공포를 드러낸다. 수진은 지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딸을 두렵게 할까 봐 겁에 질린다. 약해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타인 앞에서는 좀처럼 눈물을 내비치지 않던 수진. 이제 그는 별다른 의사소통 수단이 없는 어린아이처럼 아빠를 찾으며 운다.
병을 앓기 전 수진은 완벽과 고립을 동일시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혼자라는 사실은 분명 상처를 남겼지만, 성공했다는 자부심은 수진을 지탱하는 버팀목이기도 했다. 수진은 스스로 깨우친 것을 딸에게 일러준다. 세상은 약자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곳이라고, 그러니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통제할 수 없는 질병은 수진에게 약자가 되는 공포를 안긴다. 더는 완벽하지 않고, 모든 일을 혼자 해낼 만큼 강하지도 않다. 수진은 차라리 죽기를 바라며 절망하지만, 인우는 수진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영화가 그리는 사랑은 문서로 작성한 계약이나 인륜이라 일컫는 도리와 무관하다. “그래도 수진이가 있어서 아빠한테는 딸이 있다.” 누군가가 존재함으로써 성립되는 관계, 인우는 연결에 관해 말한다. 수진은 인우와 이어져 있다. 인우가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에 영향을 주며, 인우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지나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 닮았으면 약할 리가 없”다며 수진을 안심시켰던 딸은, 꼭 그만큼 의연한 태도로 엄마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계속 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양육은 한 인간의 자립을 돕는 과정이고, 몸과 마음에 쌓인 가르침은 시간을 거쳐 계승된다. 인우와 수진, 지나 사이에서 돌봄은 상호적이다. 어둔 밤 길을 잃고 헤맬 때, 수진은 귓가에 맴도는 딸의 목소리를 따라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향해 걸어간다. 인우는 오래전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서로 빚을 지고 또 갚아주며 산다는 그 너그러운 가르침대로, 세 인물은 경계 없이 곁을 내어주며 가족이라는 별자리를 완성한다. <러시안 소설>(2012) <조류인간>(2014) 등을 연출하고, <동주>(이준익, 2016) 각본과 제작에 참여했던 신연식 감독의 신작. <카시오페아>는 <로마서 8:37>(2017)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연출작이자, <페어 러브>(2009)에 출연했던 안성기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전작에서 친구의 딸과 사랑에 빠진 인물로 등장해 관계의 ‘공정함’을 질문했던 안성기는 <카시오페아>에서 또 다른 형태의 사랑과 관계를 탐구한다. 서현진은 제 분야를 성실하게 일궈나가는 캐릭터를 소화하는 동시에, 공포와 절망으로 급격히 무너져내리는 내면을 절절히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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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