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어떻게 세상에 퍼져나갈까, 그리고 그 악은 어떻게 멈춰 세워질까. 물론 세상이 선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로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확연하게 구분된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다룬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이야기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N번방? 아동 성착취물 사건 아니야? 박사인가, 갓갓인가 그 주모자도 잡혔다는 뉴스 본 거 같은데? 다 끝난 이야기를 왜 또 영화로 만든 거지?” 하지만 우리는 아직 N번방 사건을 잘 모른다. 세상을 스멀스멀 좀먹는 악을 누가 발견했고, 어떤 과정으로 추적했으며, 종국에는 어떻게 멈춰 세웠는지.
“당신의 사진이 도용됐으니 링크로 들어가 확인해보세요”
“네? 장난치지 마세요ㅋㅋ 누구세요?”
“진짠데.. 걱정돼서 알려드리는 거예요...”
“이거... 누가 올렸는지 아세요?”
“다은여자중학교 3학년 2반 박소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소라야, 지금부터 내 말 안 들으면 니 사진 학교에 뿌린다”
“네?”
“일단 텔레그램 깔고 들어와”
영화는 흔히 우리가 접하는 모바일 채팅앱 화면으로 시작한다. 의도했든 아니든 모바일로 영화를 소비하는 OTT 전성시대에 적절한 선택이다. 일상을 편하게 만든 문명의 이기가 흉기로 바뀌는 건 찰나. 편안하게 보였던 화면은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한 10대 여학생이 ‘노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순식간에 불편함, 불안함으로 전환한다.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N번방 사건의 전말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2019년 11월, 제보 메일 한 통으로 [청소년 ‘텔레그램 비밀방’에 불법 성착취 영상 활개] 기사를 썼던 김완 한겨레 기자는, 이후 텔레그램 유저들에 의해 개인 신상은 물론 가족 정보까지 노출된다. 당황하는 사이 제보 메일이 이어진다. ‘헛다리 짚고 있다’, ‘진짜 나쁜 XX는 박사입니다’ 등의 내용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한겨레는 특별취재팀을 꾸린다. 방을 나가면 자동 삭제되는 텔레그램의 특성 때문에 취재가 지지부진할 무렵, 조력자 JOKER가 나타났고, 이들은 성폭력 영상물을 공유하는 텔레그램 단체 채팅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박사방을 먼저 취재했던 이들을 만나는데, 바로 추적단 불꽃이다. 언론인을 꿈꾸던 두 명의 청년의 선행 취재는 이미 지방경찰청과 연계해 파생방 중 하나의 주모자인 래빗을 검거할 정도로 진행돼 있었다. 한겨레 1면 톱기사로 N번방을 보도했지만, 반향은 적었다. 후속 보도가 이어지지도 않았고, 타 언론사들의 반응도 미적지근했다. 박사는 여전히 활동하며 기자들을 조롱했다.
무력감에 젖은 그들을 찾은 건 탐사보도 매체인 ‘궁금한 이야기 Y’(SBS)와 ‘스포트라이트’(JTBC)였다. ‘반드시 잡는다’는 일념으로 지상파와 종편이 매달리며 상황은 급변한다. 그 과정에서 박사는 한겨레 피해자, JTBC 피해자를 만들어내며 반격하지만,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의 끈질긴 수사 공조로 결국 검거된다. 오리무중이었던 마지막 갓갓을 잡는 데는 화이트해커의 도움이 컸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지만 극영화처럼 몰입감이 높다. 기획 단계부터 범죄 추적극 장르 극영화를 표방했던 최진성 감독의 연출 덕분이다. 최진성 감독은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 <그들만의 월드컵> 등 다큐멘터리로 주목받았지만, <히치하이킹>으로 대한민국영화대상 단편영화상을 수상하며 극영화에도 소질이 있음을 입증해낸 바 있다. 이후 <이상, 한가역반응>, <저수지 게임> 등에서 다양한 사회 현상을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연출로 그려내고 있다.
박사(조주빈)는 여중생을 피싱으로 유도해 개인 정보를 습득한 후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며, 텔레그램으로 유도한 후 라이브 채팅방에서 본격적으로 성착취, 학대를 일삼는다. ‘대가’(암호화폐)를 지불하고 ‘정당하게’ 참여한 수백, 수천 명의 관중은 그 상황을 즐긴다.
여기서 악이 세상에 퍼져가는 방식이 확인된다. 소비자가 없었다면 공급자도 없었다는 사실. 디지털 성폭력이란 자체가 한 사람, 두 사람의 행위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돈, 욕망, 권력이라는 견고한 삼각형으로 이뤄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집단적 행위라는 무서운 사실 말이다.
한 피해자는 제보하게 된 계기에 대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으면 좋겠다. 박사가 잡혔으면 좋겠다. 텔레그램이 없어지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박사 검거 이후 수많은 언론 기사보다 ‘이렇게 용감한 딸들을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라는 댓글이 가장 힘이 됐다”라고 말했다. 사람을 지옥에 빠뜨리는 것도, 사람을 위로하는 것도 모두 익명의 사이버 세계에서 일어난 것.
2021년 6월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가 낸 한국 디지털 성범죄 보고서는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과 기술적 발전에 비해 성평등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하지 못했다. 정부와 기업이 인권 중심적인 보호장치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술적 혁신이 어떻게 젠더 폭력을 조장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집단적 협업 형태의 디지털 성범죄를 멈춰 세운 것 역시 집단적 협업이다. 추적단 불꽃, 김완‧오연서 한겨레 기자, 정재원 SBS 궁금한 이야기 Y 프로듀서, 탐사프로그램 JTBC 스포트라이트의 최광일 프로듀서와 장은조 작가,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찰청 사이버수사대 형사들…. 영화에 등장하는 24명의 인물 외에도 보이지 않는 N번방과의 싸움에는 수많은 이들이 ‘참전’했다.
N번방 사건 이후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는 성폭력처벌법 개정(불법촬영물 촬영‧제작 법정형 상향, 불법촬영물 소지‧구입‧저장‧시청시 처벌), 형법 개정(미성년자 의제강간 기준연령 16살로 상향), 아동청소년보호법 개정(‘음란물’로 쓴 법적 용어를 ‘성착취물’로 개정) 등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간 여성가족부 산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사후 조치’에 주력했다면, N번방방지법으로 ‘사전 조치’가 가능해졌다.
2021년 10월 박사 조주빈은 대법원에서 42년형이 확정됐다. 2021년 11월 갓갓 문형욱은 대법원에서 34년 형이 확정됐다. N번방 범죄로 총 3757명이 검거됐고, 245명이 구속됐다.(2020년 12월 기준) 하지만 영화는 말미에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N번방 모방 범죄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고. 현재 N번방 영상은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 플랫폼과 다크웹을 통해 전 세계에 여전히 거래되고 있다고. 악을 멈춰 세운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만, 박사와 갓갓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집단적 협업이 작동할 수 있을까?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