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간 일하며 점수를 잘 채우면 정규직 전환을 시켜주겠다는 회사의 약속을 믿고 일하던 ‘더마트’ 노동자들은, 어느 날 벼락 같이 해고 통지를 받고 당황한다. 회사는 직접고용 대신 용역업체를 끼고 하청고용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 참에 노동자 전원이 근로계약 해지 통보서를 받게 된 것이다. 청소 노동자 순례(김영옥)와 계산 노동자 혜미(문정희)의 소집으로 모인 자리에서, 더마트 해고 노동자들은 즉석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대표자를 뽑는다. 순례와 혜미, 그리고 마트 우수사원으로 뽑혀서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있던 선희(염정아)까지 셋. “그라모, 우리 셋이 해도 되겠지예? 마 인자 담판 지으러 가입시다!” 순례의 기세 좋은 외침에 노동자들은 박수와 환호로 답한다. 따뜻한 조명,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환호, 화면을 가득 채운 동지들의 모습. 그리고 영화는 점프컷으로 첫 협상 자리로 이어진다.

불 꺼진 회의실, 카메라는 방을 가득 채운 마호가니 테이블 끄트머리에 나란히 앉은 혜미와 선희, 순례를 잡는다. 화면 구석에 몰려 앉은 세 사람 맞은편에, 텅 비어 있는 사측 의자 세 개가 보인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세 사람은 절망한다. 점장(박수영)의 태도는 단호하다. “본사에서 노조 인정 안 한다잖아. 거기 나가서 뭐 해? 직원도 마음대로 못 자르면 그게 회사야? 절차상 하자가 좀 있다고 결과 바뀌는 거 아니잖아! 좀 있으면 지쳐 떨어지겠지. 아줌마들이 해봤자지.” 모멸감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회의실에 불이 켜지고 문이 열리자, 노조 지도부는 마침내 협상이 시작되려나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무직 직원은, 노조 지도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회의실 한 켠에 놓인 무전기 두 개를 챙기고는 휑 하니 다시 회의실을 나선다. 불이 꺼지고, 그 자리에 존재를 부정당한 노조 지도부만 남는다.

회사의 투명인간 취급에 지친 노조는, 상대를 협상장으로 끌고 나오기 위해 단체 티를 맞춰 입고 계산대를 점거한다. 회사는 교섭에 나서는 대신 대체인력을 계산대에 투입하고, 결국 노조는 대체인력과 중간관리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몸싸움을 해야 했다. 그러고도 회사는 정신을 못 차린다. 그제서야 협상장에 등장한 회사 간부들은 “반찬 값이나 벌자고 나온 여사님들을, 누가 꼬셔 가지고 참…” 같은 소리를 한다. 하룻밤만 점거하면 되겠거니 하고 시작했던 점거 투쟁은, 제대로 존중받고 제대로 협상할 때까지 매장 점거를 하는 기약 없는 투쟁이 된다. 이 모든 일들은 사측이 불법 해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사측이 노조의 면담 요청에 응했더라면, 사측이 노조를 ‘배후 세력에게 꼬임을 당한 순진한 아줌마들’ 쯤으로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까르푸-홈에버 투쟁을 다룬 영화 <카트>(2014)는 “왜 노조가 파업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가”를 거의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파업의 결과를 장밋빛으로 예측하며 파업에 돌입하는 노조 지도부는 없다. 이 쪽에서 실력행사를 하면, 분명 회사는 불법 대체 고용으로 대응하거나, 구사대를 보내거나, 불법 파업으로 손해를 봤다며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언론플레이를 구사하겠지. 어쩌면 ‘불법 점거’를 막겠다고 경찰이 개입할지도 모른다. 누군들 짐짝처럼 실려 나가는 것이 즐거워서 파업에 나서겠는가. 가능만 하다면, 세상 모든 노조는 회사와 말로 잘 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뭐라도 실력행사를 하지 않으면, 놀랍도록 많은 회사가 노조를 부정하고 외면한다. <카트> 속 ‘더마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들은 불법강성파업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고 합리적으로 대화할 것이라며 결성된 모 자동차회사 MZ 세대 노조는 끝내 경영진과의 면담을 거절당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소속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200여명은 파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언론에 임금 인상 30%를 요구하며 파업을 한다는 건조한 팩트는 나가지만, 그게 사실 지난 5년 간 깎인 임금 30%를 원상복구 해달라는 주장이라는 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30% 인상요구’라는 키워드만 듣고 노동자들이 회사를 쥐어짠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내 쥐어 짜인 건 노동자들이었는데도. 조선업계가 불황을 겪을 때마다 가장 먼저 해고당하고, 가장 먼저 임금을 깎이고,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다쳐온 하청노동자들이, 제 값 받고 일하고 싶다고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원청인 대우조선해양과 대주주인 산업은행은 귀를 닫고 있고, 기다리다 지친 유최안 부지회장은 화물창 바닥에 가로세로 높이 1m의 철제 구조물을 용접해 스스로 가둔 채 농성을 이어가는 중이다. 30도를 넘나드는 거제의 여름, 그 좁은 구조물 안에 자신을 가두는 심정이란 무엇이었을까.

SPC 그룹의 노동자들도 단식투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고용노동부는 회사에게 불법파견노동과 전산조작을 통한 임금 체불을 시정하라고 명령했지만, 회사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탈퇴를 강요하고 진급이나 복직을 빌미로 협박을 일삼는 것으로 응수했다. 부당노동행위로 민주노총 조합을 소수 노조로 만든 뒤, 회사는 다수 노조와 졸속으로 합의를 하고는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고 말했다.

임종린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파리바게뜨지회 지회장이 목숨을 걸고 53일간의 단식투쟁을 마친 뒤에도, 회사는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시민들의 불매운동이 이어지자 배달 어플리케이션 업체에 할인 쿠폰을 살포하고, 제빵기사들의 호소 때문에 점주들이 피해를 본다며 프레임을 ‘회사 vs. 노조’에서 ‘점주 vs. 노조’로 바꾸려고 기를 쓴다. 임종린 지회장이 단식으로 망가진 몸을 보살피는 동안, 노동자들은 릴레이 단식으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빵을 사랑하니까 빵을 만들었을 제빵기사들이 곡기를 끊는다는 건, 그거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노조가 회사의 발목을 잡는다고, 강성노조의 투쟁이 구시대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카트>를 생각한다. 처음엔 분명히 좋게 좋게 말로 협상을 하려고 노조를 조직하고는 공손하게 회사 회의실을 찾아갔던 더마트 노조 지도부를 생각한다. 그들이 투명인간처럼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며 불 꺼진 회의실에 덩그러니 방치되던 장면을 생각한다. 누군들 말로 협상하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회사와 같이 잘 되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일터로 돌아가서 신나게 일하고 싶지 않겠는가.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