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할까? 죄를 지으면 사회적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받을까?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을 목도하며 살아간다. 법은 사람과 그들이 사는 사회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그리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게 서글픈 현실. 민주주의의 본고장 유럽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다큐 <내 딸의 살인자>(감독 앙투안 타생)도 이 비극을 비껴갈 수 없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분연히 법에 맞서 일어나기 이전에는 말이다.
카사블랑카에서 한눈에 반한 여인과 프랑스에서 가정을 꾸린 회계사 앙드레 밤베르스키는 결혼 1년 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칼링카를 얻는다. 항상 웃는 얼굴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던 딸과의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부인이 세 집 건너 이웃이던 독일인 의사 디터 크롬바흐에게 진료를 받으며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이혼 후 딸을 데리고 크롬바흐의 고향인 독일 린다우로 떠나버린 것.
멀리서나마 딸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던 그는 어느 날 딸이 일사병으로 사망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열네 살 건강하기만 했던 딸이 프랑스와 기온 차도 얼마 나지 않는 독일 린다우에서 어떻게 일사병에 걸렸을까? 애도는 잠시 미뤄둔 채 밤베르스키는 칼링카의 부검진단서를 요청한다.
결국 칼링카의 팔에서 약물을 주입한 주사 자국을 발견하고, 생식기 주변에 상처가 있었음을 발견한 밤베르스키. 하지만 부검의가 떼어낸 피부 조직은 행방이 묘연하고, 크롬바흐 박사가 부검에 참여했단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 딸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살인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딸이 죽은 1982년부터 아버지 밤베르스키가 딸의 살인범(이라고 확신하는) 크롬바흐 박사를 법정에 세우기까지의 걸렸던 30여 년의 지난한 과정을 묵묵히 보여준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훌쩍 넘어 한 세대가 바뀐다는 30년마저 넘어서는 기나긴 시간 동안 아버지를 버티게 한 힘은 ‘내 딸의 죽음에 대해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강했던 아버지의 의지보다 법의 힘은 더 셌다. 아니, 법은 사람의 직업에 따라 적용이 달랐다.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독일의 소도시 린다우에서 덕망 있는 의사인 크롬바흐는 지역 사회의 존경받는 일원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 일사병으로 고통받는 딸을 살리기 위해 응급처방으로 주사까지 놨지만 안타깝게 사망한 것으로 그를 의심하는 마을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당시 독일 사회는 의사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수용하던 분위기.
밤베르스키는 꼼꼼하게 하나씩 증거를 수집한다. 첫 번째는 독일 경찰의 수사 촉구. 하지만 독일 경찰은 자연사한 칼링카의 죽음에 대해 크롬바흐를 조사할 이유가 없다며 계속해서 거절한다. 독일 검찰 역시 크롬바흐를 기소하지 않는다. 밤베르스키는 전단지 수천장을 인쇄해 독일 옥토버페스트 현장에서 뿌린다. 크롬바흐에게 철분 주사를 맞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추행을 당했다는 증언이 확보되면서, 크롬바흐는 잠시 독일 언론의 주목을 받지만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여성의 인권은 낮고 의사의 권위는 강했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
실현되지 않는 정의. 사람의 지위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법.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밤베르스키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프랑스 법정에 재판을 요구한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프랑스 법정은 크롬바흐의 프랑스 소환을 강하게 요청하지 않고, 크롬바흐 역시 ‘프랑스 땅만 밟지 않는다면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며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밤베르스키를 조롱한다.
자,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딸의 살인범이자 의료기술을 이용해 수많은 소녀를 추행한 파렴치한 성범죄자를 이대로 독일에 둘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든 프랑스로 데리고 와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인가.
억울하게 딸을 잃은 한 아버지의 사연이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이 사건의 열쇠가 될 귀인이 등장한다. 바로 안톤이다. 그는 딸을 가진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같은 일을 할 것이라며 러시아갱을 고용해 크롬바흐를 납치한다. 독일 경찰에 발각되지 않고 프랑스로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다. 납치에 대한 죄로 그는 1년 징역을 살고, 밤베르스키 역시 납치교사죄로 법정에 서지만 두 사람은 뜨겁게 서로를 포옹한다.
언론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고 법망을 빠져나간 독일인 의사가 심판을 받을 것!’ 류의 헤드라인이 프랑스 전역을 들끓게 하고 여론재판 분위기가 형성된다. 크롬바흐는 징역 15년을 선고받는다.
드디어 정의는 실현됐다. 엄연히 금지된 행위인 납치를 통해 살인범을 법정에 세운 한 아버지를 통해.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고 투덜대지 않고, 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30년 넘게 실천했던 한 아버지의 시간을 통해. 누가 이 남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았던 법을 어긴 이를 처벌하는 것은 정당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뜻인가? 딸을 가진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위한 영화 <내 딸의 살인자>. 부디 칼링카가 천국에서는 행복하기를.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