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호>, <외계+인>, <고요의 바다> <스위트 홈> 등 SF의 불모지였던 한국이 여러 작품의 인기로 SF 강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발걸음을 응원하며, 8명의 영화감독이 만든 한국 SF 앤솔러지 시리즈 <SF8>을 소개한다. 영국의 디스토피아 SF 시리즈 <블랙미러>에서 영감을 받아, 완전한 사회를 꿈꾸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안락사와 존엄사, 인공지능 운세 서비스, 미세먼지로 뒤덮인 세상, 형사와 인공지능의 교감, 지구 종말과 초능력자, 가상세계에 갇힌 BJ, 가상 연애 앱, 인공지능으로 부활한 아들까지. 신비하고 무한한 상상력을 뽐낸다. 이 세계는 재난을 겪었고, 현재도 그렇다. 재난 후 우리의 다음 세기를 위해, 8편의 작품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해 보자.
간호중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간병 로봇 이야기를 그린 <간호중>. <내 아내의 모든 것>, <허스토리> 등을 연출하며 장르의 한계를 넘나드는 민규동 감독의 작품으로 포문을 연다. 자신의 돌봄 대상 중 한 명을 살리고, 한 명을 포기해야 하는 간병 로봇은 고뇌에 빠진다. 생명 없는 존재가 생명으로 인해 갈등하는 모습을 그려내며, 인간에게 인간다움에 대해 묻고 있다. 인간이 로봇의 도움을 받는 세상이라면,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로봇에게도 욕망이 존재할까. 종교와 로봇은 어떻게 충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식물인간, 기술 발달과 고령화, 원초적 죄의식 등 인간 본질에 깊은 물음을 던진다.
만신
높은 적중률을 자랑하는 인공지능 운세 서비스를 신격화하고 맹신하는 세상을 그린 <만신>. 남녀 사이의 현실적인 로맨스를 그려냈던 <연애의 온도>의 노덕 감독이 SF 작품을 선보인다. ‘과학이 지배한 세상 속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주제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종종 읽히는 서사이지만, 인공지능 운세 서비스라는 샤머니즘 소재는 보다 한국적이고 독특하다. 무력한 인간이 ‘신’이라 불리는 무결점의 존재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망설임 없이 잡을 수 있을까. 혹여 맹목적인 믿음이 깨질 때, 그다음에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내일의 불안함에 사로잡혀 지푸라기라도 잡게 되는 인간들의 욕망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우주인 조안
미세먼지로 가득해진 세상에서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우주인 조안〉. <나를 잊지 말아요>를 연출한 이윤정 감독이 아름다운 감성 SF를 선사한다. 고가의 항체주사를 맞은 C들은 100세의 수명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N들은 30세에 죽게 된다. 본작은 N들의 세계를 조명한다. 불꽃같은 삶을 살며, 오직 청춘의 시기만 누리고 떠나는 N들의 세계는 간지럽고 따뜻하다. 뿌연 미세먼지를 뚫고 전해지는 몽환적인 영상미와 선율은 잠시나마 시청자의 마음까지 환기시킨다. 일찍이 죽음이 예정돼 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N들은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찬미한다. 가끔 시한부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작품이 아닐까. 가엾고도 아름다운 그들의 삶을 동화처럼 표현한 수작.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
지구 종말을 막기 위한 두 남녀의 로맨스를 그린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 대한민국 5포 세대의 냉혹한 현실을 그려냈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안국진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지구 종말까지 일주일이 남은 세상, 그래서 뭐? 모태솔로 주인공은 이 순간에도 외롭기만 하다. 세상의 절망보다 나의 외로움이 더 지독하고, 더 중대하다. 그래서 히어로가 되어 세상을 구할지, 인간이 되어 나를 구할지 혼란스러운 선택지에 놓인다. <이터널 선샤인>, <이퀄스> 등 SF와 로맨스를 결합한 작품들은 쓸쓸함과 애틋함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낭만을 선사해왔다. 본작은 SF 로맨스에 청춘 코미디를 한 스푼 녹이며, 사랑스럽고 발랄한 지구 종말을 탄생시켰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남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확인해 보자.
하얀 까마귀
가상세계에 갇힌 BJ가 과거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하얀 까마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연출하며, 파격적이고 날카로운 작품 세계를 펼쳐온 장철수 감독이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선보인다. 과거 조작 논란에 휩싸인 BJ를 내세우며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깊은 죄의식과 상처, 무의식을 이야기하며 감독 특유의 불안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선과 악, 이중성, 인간의 윤리, 무의식과 같은 문제들을 가상현실 게임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통해 풀어내며 시각적인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스스로의 악몽과 싸우는 BJ의 사투는 과연 무엇을 위함일지 지켜보자.
인간증명
안드로이드로 소생한 아들을 의심하는 엄마와 자신이 인간이길 증명해야 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인간증명>. 독립영화 <죄 많은 소녀>로 다수의 국내외 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은 김의석 감독이 한층 더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주인공은 결백의 증명을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증명해야 한다. 인간이기를 갈망하며 방황하는 인공지능 소년을 보고 있자면, 자아를 증명하려 분투하는 실제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과연 인간과 인공지능이 하나의 육체 안에 공생한다면, 우리는 그 정체를 무엇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저 벌어진 현상에 대해 판단하는 일은 얼마나 무의미할까. 존재론적 질문과 더불어, 어느 세계가 되어도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의 고통까지 섬세하게 그려내며 시리즈는 유종의 미를 거둔다.
이외에도 <아워바디>를 연출한 한가람 감독의 <블링크>, <패션왕>을 연출한 오기환 감독의 <증강 콩깍지>가 시리즈에 속한다. 이렇게 드라마는 광활한 우주 항해 대신 섬세하고 정서적인 휴먼 SF를 택하며, 한국적인 SF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만신>을 제외하면 모든 작품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몇 해 전부터 SF 영화와 함께, 공상과학 소설이 부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줄 작품들이 여러 방면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희소식이다. 이처럼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매력적이고, 그 기다림은 늘 즐겁다. 한국 SF 장르가 더욱 희망적이길 바라며, 다음 시즌을 기대해 본다. <SF8>은 현재 웨이브에서 서비스 중이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