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교도소 밖으로 나온다. 꼬박 13년 만이다. 새 출발을 축복하듯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교도원은 어린애를 달래는 투로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고 당부한다. 남자의 이름은 미카미 마사오(야쿠쇼 코지), 뒷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에는 ‘싸움꾼 마짱’이라 불렸다.

애초 순탄하게 흘러갈 삶은 아니었다. 게이샤로 일했던 엄마는 네 살배기 아들을 보육원에 맡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카미는 제 발로 시설을 뛰쳐나왔다. 10대부터 범죄에 가담했으며, 소년원에 처음 수감됐던 14살 이후 여러 차례 감옥에 드나들었다. 전과 10범, 수감 6번. 가장 최근에는 살인죄로 복역했다. 인생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나니, 어느덧 환갑에 가까운 나이가 됐다. 조직 생활은 진작 청산했으나, 몸 곳곳에는 과거를 되새기는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거대한 문신과 칼에 베인 흉터는 무용담을 뒷받침하는 그럴듯한 훈장이지만, 고혈압은 골치 아픈 지병이다. 버스에 올라탄 미카미는 혈압강하제를 힘겹게 집어삼킨다. “난 이제 야쿠자가 아니야. 이번엔 진짜 건실하게 살아야지.” 소리 내어 다짐하는 동안, 숨 가쁘게 뛰던 심장이 차츰 안정을 찾는다.

평화로운 설원을 배경으로, 축제에나 쓰일법한 흥겨운 연주곡이 울려 퍼진다. 일직선 도로를 내달리는 버스에서 미카미는 무얼 생각할까. 굽은 어깨와 푹 꺼진 뺨은 쇠약함을 드러내지만, 여전히 짙고 풍성한 눈썹에서는 강단이 엿보인다. 그는 지난날을 반성하지는 않아도 후회하며, 다르게 살겠다는 결심만큼은 어느 때보다 확고하다. 그렇다면 ‘멋진 세계’는 미카미의 눈부신 인생 2막을 가리키는가.

간신히 이어지던 호흡이 평온함에 접어드는 순간을 비추는 오프닝은, 그에게 펼쳐질 안락한 미래에 관한 예고편인가. 영화는 한동안 미카미의 갱생에 초점을 맞춘다. 엄격한 수감 규율을 몸에 익힌 ‘베테랑’은 교도소를 벗어나자, 이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가 되어버린다. 다행히 미카미에게는 인복이 따르는 편이다. 그는 신원보증인으로 나선 변호사의 도움으로 생활보호를 신청하고, 집도 마련한다. 어딜 가든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붙기에 부침을 거듭하지만, 미카미를 흥미롭게 바라보거나 응원하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절도를 의심했던 마트 주인은 살가운 이웃이 되고, 반사회적 세력이 아니냐고 질타하던 사회복지사는 구직 활동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미카미에게 힘을 실어준다.

미카미가 제 삶을 정상궤도에 올려 놓으려 동분서주하는 동안, 다큐멘터리 감독 츠노다(나카노 타이가)는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듀서 요시자와(나가사와 마사미)로부터 미카미의 수감기록을 전달받는다. 두 사람이 볼 때, 미카미는 시청자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인물이다. 츠노다가 죄의식에 시달린 적은 없느냐고 묻자, 미카미는 전혀 아니라며 무덤덤하게 답한다. “자네도 누군가 칭찬해주는 곳에 있고 싶잖아.”

조직은 그를 차별 없이 대하고, 능력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곳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딱히 부정할 이유도 없다. 살인자와 관계 맺기를 꺼리는 츠노다와 남 좋은 일에 굳이 동참할 마음은 없는 미카미.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두 남자에게 요시자와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전과자가 정착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방송을 통해 미카미는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발견과 감동”을 선사할 거라고. 이 말은 츠노다에게는 명분을, 미카미에게는 희망을 심어준다. 생활고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인 데다, 어쩌면 엄마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요시자와의 설득에 미카미는 눈을 빛낸다.

미카미는 선악 혹은 유능과 무능처럼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환대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는 타인의 연민에 기대야만 하는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때는 외제차를 몰던 사내였으나, 지금은 운전면허 시험에서 연거푸 낙방한다. 이제 세상은 한물간 야쿠자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미카미는 동네 건달에게조차 조롱받는 신세이고, 욱하는 기질은 무기가 아닌 치명적 흠으로 작동한다. 츠노다는 미카미를 카메라에 담기엔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불의를 못 참는 강직한 성격 탓에 싸움을 벌어지만, 상대를 물어뜯고 쓰러뜨리면서 자랑스러워한다. 한편, 미카미는 식비를 쪼개 교습소에 등록하고, 재봉틀을 돌려 손수 가방과 커튼을 만든다. 시급 990엔짜리 일자리를 구한 날에는 널뛰듯 기뻐하는가 하면, 오랜만에 방문한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공을 차다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영화는 미카미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놓는다. 갱생과 자립을 뒤쫓던 카메라는 미카미와 세상 사이에 자리한 간극을 포착하는 동시에, 미카미가 얼마나 부실한 토대에서 삶을 일궈야 하는지 지켜본다.

사회에는 미카미가 체화하기란 영영 어려울 듯한 규칙이 가득하다. 폭력 외에는 갈등을 타개하는 법을 모르는 그에게 츠노다는 도망치라고 알려준다. 변호사 부부는 성질을 죽이며 적당히 살라고 조언한다. 미카미는 그들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으려 애쓴다. 사회가 올바르다고 규정하는 인간상에 들어맞으려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를 버리고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츠노다가 말한 대로 이는 “평범”해지는 길이다.

미카미는 평범한 사람처럼 수치를 배운다. 부정을 외면하고 모욕을 감내하면서, 난생처음 죄의식을 느낀다. 이때 영화는 전과자의 갱생 내지 사회적 약자의 구원 서사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질문을 꺼내 든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정말 멋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적당히 눈 감는 기술을 습득해야 할 정도라면, 어딘가 심각하게 망가진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가 질식할 것만 같은 괴로움에 휩싸이는 한 ‘멋진 세계’는 요원해 보인다. 미카미의 눈부신 인생 2막은 끝내 펼쳐지지 않고, 그는 엔딩에서 오프닝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한번 길게 숨을 내쉰다.

<멋진 세계>는 <유레루>(2006) <아주 긴 변명>(2016) 등을 연출한 감독이자 소설가인 니시카와 미와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집필한 사키 류조의 소설 「신분장」을 각색했으며, 일본에서 ‘국민 배우’라 찬사받는 야쿠쇼 코지와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최근 4K 리마스터링으로 국내 개봉한 <큐어>(구로사와 기요시, 1997)를 비롯하여 <쉘 위 댄스>(수오 마사유키, 1996) <우나기>(이마무라 쇼헤이, 1997) <세 번째 살인>(고레에다 히로카즈, 2007)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던 그는, 미카미 마사오라는 모순투성이 인물을 대담하면서도 온정 어린 캐릭터로 완성해낸다.

대체로 무감한 얼굴을 유지하는 미카미가 난데없이 만면에 미소를 띠거나 감정에 북받쳐 울음을 토해낼 때, 영화에는 기묘한 생기가 깃든다. 한편, 니시카와 미와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제자이자 동료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브로커>와의 공통과 차이를 발견하는 재미도 크다. 엄마에게 버림받았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심 캐릭터가 겹치지만, 이와 같은 요건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과 비중은 사뭇 다르다. 주인공이 보육원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포함해 몇몇 풍경과 활기찬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 역시 흡사한데, <멋진 세계>는 <브로커>와는 또 다른 위치에서 공동체의 가능성을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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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