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호우로 수도권을 비롯한 중부지방이 마비되다시피 한 화요일 오후, 원고 마감을 하고 있던 내 컴퓨터는 인터넷 연결을 잃었다. 와이파이 신호는 잡는데 IP 주소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한 통신사만 그런 게 아니어서, 다른 통신사의 와이파이에 접속해봐도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다 써 놓은 원고를 송고를 할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노트북과 원고를 바리바리 싸 들고 집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해보았지만 그것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자동차 없이 전기자전거로 바깥 출입을 하는데, 백팩의 방수 성능을 감안하더라도 전기자전거로 이 빗속을 뚫고 가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특히나 내가 사는 곳이 산 중턱임을 감안하면, 비로 미끄러워진 급경사 내리막길을 자전거로 내려가는 건 애당초 고려하면 안 되는 옵션이었다. 그렇다고 택시는 잡혔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빗줄기를 뚫고 내가 살고 있는 산 중턱까지 올라와 줄 택시가 없었다.
연재처에 전화로 사정을 해서 마감을 하루 늦추긴 했지만,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TV 프로그램이라도 모니터링할까 했으나, TV 또한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인터넷이 끊긴 지금으로선 무용지물이라는 사실만 다시 확인했다. 이렇게 된 김에 집안 청소나 해볼까. 아, 로봇 청소기도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모델이었다. 상황이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5G나 LTE 또한 평소처럼 원활하게 속도가 나지 않았다. 단위 지역 내에 사용량이 급증해서 그런 거겠지. 먹구름과 쏟아지는 빗줄기가 창밖을 어두컴컴하게 막고, 기후의 악화가 교통편을 막고, 인터넷의 부재가 외부 세계와의 연락을 막았다. 고립 아닌 고립을 경험하며 답답한 마음에 창밖을 보다가, 나는 급기야 지구 종말 덕후, 재난 스페셜리스트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투모로우〉(2004)를 떠올리고 말았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작품 중 드물게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투모로우〉의 설정은 이렇다. 지구 온난화의 가속으로 인해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고, 해류의 흐름이 교란된다. 북대서양 조류의 흐름이 막혀 열이 이동하지 않는 가운데 지구 북반구 각지에서 토네이도와 태풍, 우박 등의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례 없는 속도로 몰아치는 한기에 북쪽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대피할 틈도 없이 얼어 죽거나 집안에 갇혀 고립되고,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제3국가’라고 부르며 무시했던 남반구로 피난길에 오른다. 그리고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경고해왔던 기상학자 잭 홀 박사(데니스 퀘이드)는, 쓰나미와 혹한으로 동토가 되어버린 뉴욕에 고립된 아들 샘(제이크 질렌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신 빙하기를 맞은 미국 북동부를 건넌다. 몇 십년, 짧아도 몇 년에 걸쳐 일어날 거라 예측했던 일들이 불과 몇 주 안에 일어나는 대재앙을 보며 잭은 탄식하고, 뉴욕 도서관에 고립된 채 아버지를 기다리는 샘은 생존을 위해 도서관에 쌓인 책들을 한 권씩 꺼내 벽난로에 태운다.
〈투모로우〉의 한 장면, 테리 랩슨 박사(이안 홈즈)와 동료들은 스코틀랜드 고지대 기상관측소에 고립된 채 최후를 기다리고 있다. 기온은 빠른 속도로 얼어붙고 있는데 연료가 다 된 발전기는 서서히 작동을 멈춘다. 동료 사이먼(에이드리언 래스터)이 숨겨둔 스카치 위스키를 꺼내며 “이거라도 넣고 돌려볼까요?”라고 묻자, 랩슨 박사는 정색을 한다. “자네 제정신인가? 12년 숙성 스카치라고!” 설마 하니 랩슨 박사 같은 과학자가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어서 생존과 음주 중 어느 쪽이 더 우선인지 까먹었을 리는 없다. 이미 그래 봐야 늦었음을, 찔끔 남은 스카치 몇 잔을 넣고 발전기를 돌려봐야 그리 오래 견딜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 각자 “영국을 위해”, “인류를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위해” 웃으며 건배한 랩슨 박사와 동료들의 얼굴에서 이윽고 웃음이 사라진다.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다음 세대가 잘 살아남을 수 있기를 기원한 직후, 발전기에서 나는 힘없는 기계음과 함께 관측소의 불이 모두 꺼진다.
나의 고립이 〈투모로우〉 속 랩슨 박사 일행의 고립만큼 비장했노라 말하려는 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차라리 〈투모로우〉 속의 재난은 현실보다 오히려 더 이상적인 게 아니었을까? 〈투모로우〉 속 재난은 빠른 속도로 닥쳐오는 게 눈에 보이고, 저개발국가인 남반구는 피해가며, 세계의 권력이 집중된 북반구 국가를 타격한 터라 전 세계 뉴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다. 전 세계 사람 모두가 소매를 걷어올리고 뭐라도 해보려고 협력한다. 하지만 현실의 기후재난은 어떤가. 해수면 상승으로 섬이 사라지고,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화재로 인해 아마존 열대우림이 급속도로 파괴되어도, 오랜 가뭄으로 케냐 국립공원에서 보호하고 있던 야생동물들이 멸종해 나가도 이는 좀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사지 못한다. 세계의 권력은 ‘제3국가’ 남반구가 경험하는 재난에는 큰 관심이 없으니까.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투모로우〉 수준으로 걷잡을 수 없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재난이 아닌 이상, 사람들은 기후재난에 무심하다. 캘리포니아에 산불이 몇 개월씩 이어져도, 유럽에서 이상 고온으로 사람들이 쓰러져도, 독일에 전에 없던 홍수가 일어나도, 사람들은 잠시 놀랄 뿐 이윽고 그 뉴스에 익숙해진다. 당장 내가 죽는 거 아니니까. 안된 일이지만 일단 지금은 경제 성장을 해야 하니까 공장을 짓고, 일단 지금은 내가 더우니까 에어컨을 켜고, 일단 지금은 내가 귀찮으니까 그냥 비닐봉지를 사용하고… 한꺼번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천천히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우리는 코 앞에 닥친 위기를 그냥 무심히 넘긴다. 매년 “올해 여름은 또 왜 이렇게 더운 거야?”라고 투덜거리면서. 왜긴 왜겠어. 지구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지구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그렇지.
남들이 그렇다고 훈계하려는 게 아니라, 나도 저러고 산다는 고백과 반성이다. 텀블러를 사 놓고도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텀블러를 쓰지만, 텀블러를 반복해서 씻는 과정 자체가 물을 오염시키는 건 아닐까?”라고 미심쩍어 하고, 에코백이 있으면서도 “에코백을 여러 개 사는 것보다 차라리 한번 받은 비닐봉지를 몇 차례 더 쓰는 편이 환경에 나은 게 아닐까?”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심지어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아직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음에도 마치 모든 게 다 끝난 것처럼 굴면서 랩슨 박사 일행처럼 군다. 꿍쳐 둔 위스키 한 모금을 마지막으로 들이키는 사람들처럼,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소비를 하면서. 글쎄, 우리 정말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 당장 나부터도 폭우로 인해 집안에 고립된 이후에야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전망이 그다지 이상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우리가 평상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