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고3 시절을 보낸 정희(김주아)와 민영(윤아정)은 졸업 후에 얼마간 소원한 채로 각자 스무 살의 시간을 보낸다. 정희는 방학을 맞아 서울 집에서 지내는 민영의 초대를 받아 놀러가지만, 하필 그 날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아보게 된 민영은 정희와의 시간을 뒷전에 둔 채 성적을 정정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재은 감독과 임지선 감독이 공동연출한 첫 장편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 즈음의 친구들 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구현해, 작년 개봉한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종착역>에 이어 한국영화계에 공동연출로 뭉친 남다른 재능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흥분을 일게 하는 작품이다. 임지선 감독과 (코로나19 확진으로 줌을 통해 함께한) 이재은 감독을 만나 <성적표의 김민영>을 만든 과정에 대해 물었다.

**** 인터뷰에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한겨레 영화학교에서 만나 이재은 감독님이 단편 분량의 시나리오로 임지선 감독님에게 공동연출을 제안하면서 <성적표의 김민영>이 시작됐다고 들었습니다. 이재은 감독님은 임지선 감독님의 어떤 면을 보고 함께 작업하고 싶으셨어요?

이재은 그때 저는 영화를 많이 본 상태도 아니었고, 영화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선 감독님은 영화를 잘 알고 잘 만드니 의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선 감독님은 당시엔 이렇게 영화가 길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받으셨을 거예요.

임지선 한겨레 영화학교가 대부분 영화를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저도 물론 영화를 잘 몰랐고, 그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컸어요. 둘 다 영화를 모르기 때문에 힘을 합쳐야겠다 생각했어요.

이재은 감독, 임지선 감독

단편이 장편으로 발전된 과정은.

이재은 단편으로 준비했을 때도 짧은 분량은 아니었어요. 정희가 민영이 집에 가서 서운한 일들을 겪고 성적표를 쓰고 돌아온다 까지 3~40분 정도 생각했던 길이였는데, 하다 보니까 이 작품의 깊이의 한계 같은 걸 느꼈어요. 그 단편이 이전에 이 친구들이 어떤 사이였고 졸업 후에 헤어지고 각자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전사들이 나와야 이 하루동안의 일들이 의미 있게 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임지선 저희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단편 제작 지원을 받았고 당시 면접 본 것도 중편 정도 분량이었는데 한 심사위원 분이 장편 같은 느낌이 드는데 혹시 넣고 싶었지만 안 넣은 것들이 있냐고 물어보셨고, 이야기가 단편 같지 않아서 점수를 낮게 줬다고 말씀하시는 거 듣고 오히려 저희는 장편의 가능성을 보게 돼서 더 신나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연출하면서 각자의 역할은 어떻게 나누어졌나요?

이재은 역할 분담이랄 게 따로 없이 말 그대로 공동연출 했어요. 모든 걸 다 같이 상의하고, 연출할 때도 모니터 보면서 서로 OK인지 확인하고, 배우에게 전달할 게 있으면 내가 이렇게 말할 건데 동의해? 추가적으로 물어볼 거 있어? 하고 미리 의견을 취합했어요.

임지선 시나리오는 아무래도 재은 감독이 시작한 거라 의견이 좀 더 많이 반영됐던 것 같고, 나머지는 소통의 오류가 없도록 하려고 세세한 것 전부 상의하는 방식을 취했어요. 일일이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설득시켜야 하다 보니까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와서 후반작업까지 그 방식을 이어갔어요.

서로 의견이 대립한 경우도 있었을 텐데요.

임지선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향은 같아서, 오히려 소품이나 음악 같은 사소한 것에서나 가끔 의견이 갈리는 정도였어요.

이재은 어쩌면 사람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을 건데... 삼행시클럽 화상채팅에서 정희랑 수산나가 민영이를 기다리다가 수산나가 화내고 나가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정희만 화면에 남겨둘 것이냐 민영이의 자리에 검정화면을 둘 것이나, 이런 사소한 거 갖고 의견 차이가 있었어요.

임지선 이렇게 다른 경우엔 스탭 투표 같은 걸 해서 제3자의 의견을 구했어요.

시나리오나 콘티 외에 현장에서 촬영하면서 새롭게 더해진 설정이 있다면.

이재은 저희는 콘티를 그리지 않고 로케이션 가서 사진을 찍어 콘티로 썼어요. 현장에서는 콘티대로만 해서 딱히 새로운 게 나오진 않았고, 콘티 준비하며 실제 장소에서 이런저런 동작을 해보면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나왔어요. 정희가 민영이의 화장대를 조립해주는 신에서 민영이가 조립된 화장대를 보고 머리를 만지는 그런 사소한 디테일 같은 게 콘티 작업하면서 많이 추가된 거예요.

정희가 민영이 서울 집에 혼자 짐 들고 들어오다가 현관문이 확 닫혀버려서 밀려나갔다가 다시 낑낑대면서 들어오는 것도 왠지 현장의 문이 하필 상태가 안 좋아서 더해진 디테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임지선 민영이 집은 원래 제가 살았다가 계약이 끝난 집이에요. 오래돼서 실제로 문이 그렇게 닫혔어요. 문 닫히기 전에 정희가 들어오는 것도 있고 먼저 닫히기도 하고 여러 테이크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먼저 닫히는 게 그때 상황이 더 잘 드러나는 거 같아서 그 테이크를 썼어요.

두 분 고향은 어디세요? 지역을 하필 청주로 정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임지선 재은 감독은 서울이고, 저는 충청남도 서산이에요. 정희 캐릭터를 만들면서 지인들을 참고했는데, 실제로 청주여고를 나온 지인이 있었어요. 대도시보다는 충청도의 평온한 도시에서 기숙사 생활하면 친구들간의 추억거리가 더 재미있게 담기지 않을까 해서 청주로 설정했어요. 그런데 기숙사는 저희 형부가 교사로 일하는 충남 예산의 학교에서 찍었어요. 정작 실제 청주에서 찍은 건 민영이가 대학 동기들과 같이 여행 간 곳들이 전부예요. 테니스 연습장이나 햄버거 가게 앞 모두 서울에서 찍었어요.

영화관 신에서 <엑시트> <봉오동전투> 등의 전단지가 놓인 것 보니 2019년 여름에 촬영한 것 같습니다.

임지선 대부분 그해 여름에 다 찍고, 수능 장면만 겨울에 하루 동안 찍었어요. 그 학교는 재은 감독의 모교인 창덕여고예요.

김주아 배우의 선배네요! 창덕여고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보면 공간이 독특하던데, <성적표의 김민영>에선 단순하고 아담한 학교 같아 보였어요.

이재은 맞아요, 주아 배우가 지금 창덕여고 다니고 있죠. 거기가 그린벨트라 실제론 도시에 있는 학교 같아 보이지 않아요. 여기저기 비닐하우스도 있고. 그래서 정희랑 민영이가 수능시험 보는 청주 학교로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김주아 배우, 윤아정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 하게 됐나요?

임지선 김주아 배우는 어렸을 때부터 활동을 해서 익히 알고 있었고, <변성기> 같은 단편들 보면서 연기도 안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정희 캐릭터가 엉뚱하면서도 진지한 면이 있고, 인상은 순하고 평온한데 단단한 느낌도 있어야 해서, 프로필 받아 보고 미팅을 요청 드리면서도 그런 면모를 기대했어요. 직접 만나 리딩 했을 때 주아 배우가 그런 모습이 많이 보여줬고, 특히 나레이션을 되게 담담하게 잘해줘서, 캐릭터 나이보다 어림에도 불구하고 (촬영 당시 김주아 배우는 16살이었다) 같이 하자고 했어요. 윤아정 배우는 배우를 찾던 중에 어떤 웹드라마를 보다가 대사를 툭툭 시니컬 하게 던지는 게 꼭 민영이 같아서 바로 연락해 함께 하게 됐고요.

정희는 ‘안’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이상한 이야기를 할 때도 민영이는 안에서 봐준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성적표에 높은 점수를 주기도 하죠. 정희의 ‘안’에선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었을까요?

이재은 정희는 순간순간에 더 집중하는 거 같아요. 오히려 평소에 별 생각 안 하고 살 수 있겠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 단순하게 살아가는 인물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정희의 첫 직장은 왜 테니스 연습장인가요?

이재은 정희가 처음으로 일하는 곳이 평범할 것 같진 않았어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테니스를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라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게 테니스장이었어요. 시끄럽지 않게 평온하면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는 가득한 곳이라 정희에게 어울리겠다 싶었죠.

테니스장 이력서를 자세히 보니까 내용이 되게 구구절절 하더라고요. 맨 끝에 핸드폰 번호 다시 한번 큼직하게 적기도 하고.

이재은 아르바이트 할 때 정희랑 비슷한 성격을 가진 분이 있었어요. 매니저님이 아르바이트 이력서를 그렇게 빼곡히 쓴 사람은 처음 봤다고 그랬어요. 그 분 떠올리면서, 아르바이트 이력서일 뿐더러 막 학교 졸업해서 딱히 경력이랄 것도 없는데 자기소개에 별별 내용을 다 써서 이력서를 가득 채웠어요.

삼행시클럽 해체 이후 행동강령은 브이로그처럼 장식했고, 대구대학교 상식청전기 신은 교양 예능 프로그램 포맷을 따왔어요. 초반에 그런 키치적인 터치가 가미돼 영화 리듬에 변화를 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임지선 원래는 친구들이 배드민턴 치고 수업도 듣고 하는 모습을 정석적으로 붙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앞부분이 길고 지루해지는 감이 있어서 행동강령은 하나로 묶었어요. 리포터 신은 전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지 않는 달라진 민영을 마주했을 때 관객들이 같이 당혹감을 느끼게 하고자 일부러 더 방송 화면처럼 구성했어요.

정희가 수능시험장에서 손목시계를 빌려주면서 연을 맺게 되는 정일이는 삼행시클럽 멤버도 아닌데 꾸준히 영화에 등장해요. 테니스장이 저녁엔 공간에 상상력이 부족해서 우울해진다는 말을 듣고는 정희가 곧바로 크리스마스처럼 꾸며주고, 제주도 여행 상상 시퀀스에서도 굳이 정일이가 함께하는 것 보고, 정일이도 정희에게 삼행시클럽 멤버들만큼이나 특별한 존재라고 느껴졌어요. 정희가 민영에게 훈계 받고 혼자 고무동력기를 갖고 놀 때 청주의 정일이가 트리를 켜놓는 모습과 교차편집 되기도 하죠.

임지선 정희는 졸업 후에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또래가 주변에 없어요. 일하는 테니스장에서도 아저씨아줌마뿐이니, 유일한 또래인 정일이가 얼마간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어서 친해지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가 테니스장 사무실이 재미없다고 하니까 바로 집으로 달려 가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주기도 해요. 정희가 민영이한테 그림에 대해 지적을 받은 후에 정일이가 정희의 그림으로 만든 전단지를 보는 걸 이어붙여서 그 공간을 꾸몄던 정희의 온기를 그리워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가족의 존재가 정희와 민영의 차이를 가르는 것 같아요. 정희는 처음 취직했다고 케이크에 글씨 써서 줄 정도로 다정한 가정에서 자란 반면, 민영이 가족은 액자 속 사진으로만 보일 뿐 실물은 보이지 않고 심지어 사진엔 여자가 한 명도 없어요.

이재은 각자의 삶을 보여줄 때 가족 이야기를 뺄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적게나마 인물마다 가족을 비춰 보려고 했어요. 사실 저희끼리는 취업 축하해주는 신이 불안할 수도 있는 선택을 한 정희한텐 그 취업이 불안할 수도 있는 선택인데 오히려 그렇게 덮어놓고 축하해주는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넣은 거였어요. 물론 따뜻하게 느끼시면 그것대로 좋지만요. 민영이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 오히려 억눌려 있던 마음들이 왈가닥 캐릭터로 드러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김주아 배우의 어머니가 정희 어머니를 연기하셨다고요.

임지선 작은 역할을 맡은 분들은 경력이 많거나 정제된 연기가 아니라 경험 없는 분들이 더 순수하게 보여서 저희 영화와 더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주아 배우가 출연한 라디오 방송에서 어머니께서 배우가 꿈이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이미지도 좋으셔서 조심스럽게 부탁 드려 봤는데, 흔쾌히 해주시겠다고 하셔서 출연하게 됐어요. <성적표의 김민영> 이후로 연기 활동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정희는 감정을 입밖에 내는 법이 없어요. 해고 당하고 나서도 멍하니 누워서 거북이를 바라볼 뿐이죠. 민영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정희가 감정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다른 연기 디렉션이 있었을 것 같아요. 감정을 쏟아내기 전에 눈썹을 살짝 긁고는 말없이 카드를 정리하는 디테일은 특히 놀라웠어요.

이재은 원래 주아 배우한테는 발랄함이 전혀 없는 정제된 말투에 감정 표현도 거의 없도록 요구했어요. 기본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였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요청했는데, 민영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장면에서는 여태까지 쌓아왔던 감정을 드러내 달라는 정도로만 얘기했어요. 테이크마다 감정을 터트리는 정도가 조금씩 달랐는데, 가장 크게 터트린 것에서 한 단계 이전의 것을 썼어요.

임지선 눈썹 긁는 건 리허설 때 주아 배우가 슬쩍 그렇게 하길래 그걸 계속 해달라고 부탁했고, 카드 정리는 민영이가 계속 쏴붙이니까 진짜 짐을 정리하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주아 배우가 정말 잘해줬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반전이 있다면 둘의 사이가 스무 살이 돼서 각자 떨어져 지내서뿐만 아니라, 장마 때 자전거 타다가 다리 다친 걸 제대로 사과하지 않아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된 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이재은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어요. 친구랑 같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러 가서 저는 더 멀리 가자고 했고 친구는 그만가자고 해서 제가 가위바위보에 이겨서 더 갔다가 친구가 다리를 다쳤어요. 분명 미안하긴 한데, 그게 내 잘못인가? 그런 어색해지는 상황을 겪어 봐서 단순히 즐거웠던 기억보다 그런 미묘한 감정들이 훨씬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두 분은 정희와 민영이의 관계가 다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재은 예전엔 둘 다 고집 있는 캐릭터라 이어지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정희가 수능시험장에서 시계를 빌려주는 것처럼 따뜻함을 베푸는 캐릭터인데, 그 따뜻함이 언젠가 정희에게 돌아올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겨서 다시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임지선 저희도 답을 내지 못해서 열어 놓은 채로 끝냈어요. 정희가 하룻밤 동안 민영에 대해서 되게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가졌듯이 민영이도 그런 시간을 갖는다면 가능할까 싶기도 한데, 진짜 잘 모르겠어요. 쉽다면 쉽게 풀릴 수도 있고, 어렵다면 평생 연락 안 할 수도 있겠고.

'이재은 임재선 공동연출'은 계속될까요?

임지선 좋은 기회가 있다면 얼마든지 같이 하고 싶은데,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와서 얼마 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트레일러를 같이 만들었어요. 앞으로도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