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인 공룡 두개골을 도둑맞은 중국 정부가 실력 미달로 첩보원이 되지 못한 전직 후보생 007(주성치)을 홍콩으로 파견 보낸다는 내용의 <007 북경특급>(1994)은, 영화 초입부터 “007 시리즈와는 무관하며 유사성이 있다면 우연의 일치”라는 자막을 내보낸다. 그리고는 자막이 무색하게, 007 메인 테마를 교묘하게 변주한 배경음악이 은은하게 깔리기 시작한다. 이 뻔뻔스러운 작품은 주성치의 전성기 영화들 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지독한 루저가 세간의 무시를 당하면서도 자기 길을 걷다가 끝내 자신의 일에서 성공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도 이루어진다는 스토리라인은 여타 주성치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결론까지 가는 동안 영화가 구사하는 농담은 동시대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달리 난잡하다.
007이 임무 수행 중에도 여성의 엉덩이나 가슴에 눈이 팔리는 건 그러려니 한다. 이향금(원영의)의 손을 빌려 몸에 박힌 총알을 빼내야 하는 상황, 이렇다 할 마취제가 없자 007은 가방에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꺼내어 이향금에게 건넨다. “이걸 틀어주시오.” 재생 버튼을 누르자 모니터에서는 포르노가 흘러나온다. “잘못 튼 건가요?” “아니에요. 이건 시선과 마음을 분산시키는 겁니다.” “포르노잖아요. 지금 누구 놀려요?” “이건 고대의 신의 화타도 사용했던 분산 비법이오. 관우는 바둑을 두며 화살독을 치료했고, 나 007은 포르노를 보면서 총알을 꺼내는 겁니다.” 너무 주성치스러워서 사랑스러운 동시에, 공공연하게 이 장면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해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서는 이 문제적 농담.
덕분에 <007 북경특급>은 주성치 팬들 사이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주성치 영화’로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대체로 고상하게 <식신>(1996)이라거나 <희극지왕>(1999)을, 전통주의자라면 <서유기-월광보합>(1995)과 <서유기-선리기연>(1995)을, 뉴비라면 <소림축구>(2001)나 <쿵푸 허슬>(2004)을,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추억하는 이라면 <가유희사>(1992)를 꼽겠지. 다들, 사실은 <007 북경특급> 보고 웃었을 거면서 말이다. 하긴, 나도 어디 가서 그 장면 보고 한참을 웃었다고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 수십 년을 망설였던 이야기를 지면에다가 공개적으로 하고 있으니, 나도 참 나다.
주성치 팬들조차 ‘이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 이 영화가 갑자기 홍콩 영화의 귀중한 문화유산 취급을 공공연하게 받게 된 건 지난 2021년이었다. 홍콩 정부가 강화된 홍콩 국가보안법에 따라 ‘전영 검사 조례’를 발표했는데, ‘국가 안보에 반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영화 검열 작업에 대한 법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 목표’인 이 개정안에 따르면 이제 <007 북경특급>을 보는 게 불가능해진다. (이상 ‘홍콩의 비극이 우리의 비극인 이유’. 2021년 08월 27일. <오마이뉴스>. 최하나 감독 기고글에서 인용) 영화 곳곳에 중국 정부의 부패상에 대한 풍자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공룡 두개골을 빼돌려 외국에 팔아넘기려는 메인 빌런은 007을 홍콩으로 파견한 중국 정보부 사령관이고, 배신을 당해 중국 군인들에게 총살 당할 위기에 처한 007은 뒷돈과 담배를 뇌물로 나눠주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포르노를 보면서 총알을 빼내는 농담이 진지한 의료 기술이 아니듯, 이 뻔한 농담이 중국 정부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 정부 빼고는 말이다. 혹시라도 홍콩이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까 하는 중국 정부의 편집증적인 강박이, 90년대 주성치 코미디의 들쑥날쑥한 농담까지도 ‘국가 안보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영화를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던 시절만 해도 <007 북경특급>은 <홍콩 레옹>(1995>이나 <홍콩 마스크>(1995)처럼 주성치가 찍은 수많은 범작 중 한 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개입해 영화를 보지 못하게 만들면서 이야기는 사뭇 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로 발사되었다가 다시 앞으로 발사되는 교활한 권총’ 같은 허무맹랑한 개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런 영화를 상대로 진지하게 국가 안보를 언급하며 검열을 해? 중국 정부는 그렇게 할 일도 없고 자신감도 없어?
이 차마 웃지 못할 비극은, 불행하게도 중국과 홍콩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48초간 인사를 나눈 직후 내뱉은 비속어를 둘러싸고,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이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비속어는 아니었다는 어정쩡한 해명과 함께 ‘왜곡 보도로 국익을 훼손한 가짜 뉴스에 대해 진상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책임을 전가했다. 여당은 문제의 영상을 최초 보도한 MBC를 콕 집어 검찰에 고발했지만, 수차례 이루어진 여론조사에서 60%가 넘는 국민들은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냥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실언을 했다. 죄송하다.”라고 말하면 간단하게 끝났을 일을, 언론사를 탄압해가면서 아니라고 우기다가 지지율만 하락한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일이지만, 정권이 언론사와 불화를 빚는 일이 아주 드문 건 아니니 그건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제 이 정권은 고등학생을 상대로 진심으로 싸운다.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출품되어 카툰 부문 고등부 금상(경기도지사상)을 받은 작품 ‘윤석열차’가 세간의 관심을 끌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정치적인 주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작품을 선정하여 전시한 것은 학생의 만화 창작 욕구를 고취하려는 행사 취지에 지극히 어긋난다”며 시상을 취소하려 든 것이다. 반대편에서 카툰의 정의 자체에 정치 풍자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자, 여당 정치인들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영국 카투니스트 스티브 브라이트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문제”라는 식으로 말을 돌렸다. 글쎄, 폭주하는 정권을 열차에 비유하는 뻔한 코드가 ‘표절’이라면, 세상에 표절이 아닌 작품은 하나도 안 남을 것이다. 당장 스티브 브라이트 작가 또한 “이 작품은 표절이 아니며, 학생의 작품을 권력이 검열하려고 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입장을 밝혔으니, 여당도 할 말이 애매해졌다. 애초에 웃어넘겼으면 그냥 “좀 뻔한 코드의 작품이 입상했네” 정도로 끝났을 일을, 정부 부처와 여당이 나서서 탄압하려다가 일이 더 커진 셈이다.
‘태극기 휘바이든’ 사태와 ‘윤석열차’ 논란을 보면서 나는 <007 북경특급>을 다시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천하의 호색한 제임스 본드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한 주성치의 막 나가는 개그를 기억하지, 거기에 정부 비판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작품을 표현의 자유의 선봉에 세운 건 중국 정부였다. 수많은 이들이 홍콩 영화가 남긴 눈부신 유산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할 때 제일 먼저 <007 북경특급>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국가의 검열은 역설적으로 국가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권위주의의 득세는 역설적으로 정당한 권위가 부재함을 고발한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