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과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본 영화는 <카사블랑카> (마이클 커티즈, 1942) 였다. 물론 세기의 명작이지만 그보다, 이 작품이 영화 학자들과 관련 텍스트에서 언급하는 클래시컬 할리우드 시네마의 결정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1942년에 개봉한 <카사블랑카>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전에 제작된 작품으로 영화 역시 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점령지를 늘려가자 수 많은 유럽인이 리스본을 거쳐 카사블랑카를 통해 미국으로 향하는 루트를 택했다. 물론 전쟁의 한 복판을 지나는 상황에서 비자를 얻어 성공적으로 미국으로 가게 되는 부류는 엄청난 돈을 가진 극소수에 불과했다. 비자를 얻지 못한 나머지는 카사블랑카에 머물며 기약 없는 종전을 기다려야 했다.
불안과 체념의 도시, 카사블랑카에서 ‘릭의 카페, 아메리카’라는 술집을 운영하는 미국인, ‘릭’ (험프리 보가트) 은 술집에 드나드는 다양한 국가의 고위층 장교들과 그런대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그와 높은 층과의 관계 때문에 릭에게 ‘민원’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끊이지 않는다. 주로 이들은 미국으로 가기 위한 비자가 필요한 이들이고, 릭은 언제나 그렇듯, 이를 모두 거절한다.
영화 속에서 릭은 시종일관 시니컬하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잊은 지 오래 된 중년의 남자다. 그의 감정이 요동하는 순간은 어느 날 릭의 술집에서 오래 전 연인, ‘엘사’ (잉그리드 버그만) 와 같이 듣던 “As Time Goes By” 가 흘러나오면서 부터다. 그녀를 잊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릭에게 금지곡이었던 이 곡을 신청한 사람은, 바로 엘사 그녀 자신이다. 엘사는 체코의 독립을 돕는 반 나치 레지스탕스인 남편, ‘빅터’ 와 함께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릭을 찾아 온 것이다.
릭은 자신도 모르게 어쩌면 기다려 왔는지도 모를, 또 한번의 기회와 마주한다. 그러나 그는 망설인다. 빅터를 고발하고 엘사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녀와 남편을 무사히 미국까지 들어갈 수 있게 도와 줄 것인지.
<카사블랑카>는 머레이 버넷과 조안 알리슨의 희곡, “모두가 릭스로 찾아온다 (Everyone Comes to Rick’s”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황금기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의 영화들이 그렇듯, <카사블랑카>의 메인 배경은 모로코, 카사블랑카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 헐리우드 역사상 가장 비싼 값 (20만 달러)에 팔린 원작 희곡에서부터 세트 촬영까지 거대한 제작비가 소요 된 <카사블랑카>는 개봉 후 13년 뒤인 1955년까지 박스오피스에서 승승장구 했다. 영화는 워너가 전쟁 중 제작한 작품들 중 3번째로 큰 흥행을 기록했다.
기록할 만한 흥행 성공을 거둔 <카사블랑카>지만 영화는 그 주제곡처럼 (As Time Goes By, 세월이 흐르면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 큰 영예를 누렸다. 원작자 중 한명인 버넷은 영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인기와 존경을 쌓아가는 현상을 일컬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참된 영화 ("true yesterday, true today, true tomorrow, 필자 번역")”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또한 하버드 대학에서는 기말평가 주에 <카사블랑카>를 상영했는데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반응이 좋아서 매년 상영하기 시작했고 이는 하버드 대학 신문에 따르면 현재까지 지속되는 하버드 대학만의 전통이 되었다 1977년까지 <카사블랑카>는 미국의 텔레비전 채널에서 가장 많이 방영된 영화로 기록되며 수십년을 걸쳐 가장 사랑받는 영화임을 증명했다.
여러 시각이 있을 수 있으나 수많은 황금기 할리우드 영화들 중에서도 <카사블랑카>가 유독 세대를 걸쳐 사랑받는 이유는 이 영화가 아주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표 ‘규격 상품’이기 때문이다. 영화학자 앤드류 새리스가 “작가론적 분석에서 가장 예외적인 작품”으로 <카사블랑카>를 언급했듯 영화는 고전 명작 중에서도 유독 감독의 경향이나 연출 스타일로 분석되지 않는 작품이다. 히치콕의 경향으로 <싸이코>를, 존 포드의 장르적 성향으로 <수색자들> (1956) 을 분석하는 것과는 반대의 경우다. 다시 말해 <카사블랑카>는 스튜디오가 픽업해서 정치적으로 누구나 공감할 만한 (혹은 다수가 공감할 만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붙이고 당시 할리우드가 쌓아 올린 최고/최적 레벨의 시네마토그래피를 통해 만들어진 로맨스 영화다. 원작의 내용조차도 파악하지 않았었다는 감독 마이클 커티즈의 성취라면 최고의 캐스팅과 세트, 그리고 A-list 의 작가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수려한 영상으로 콜라쥬 해 낸 것일 것이다.
무소불위의 할리우드의 정점에서 잉태된 영화, <카사블랑카>는 역설적으로 할리우드의 하강을 예고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가 개봉하고 6년 후, 수직계열화를 금지하는 ‘파라마운트 판결’과 급증하는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할리우드는 급격히 축소하기 시작했다. 산업의 하락으로 <카사블랑카>와 같은 대작은 제작이 불가능해지고 중소 독립영화제작사들이 할리우드의 새로운 주류로 떠올랐다. 이러한 격변은 <졸업> (마이크 니콜스, 1967) 이나 <보니 앤 클라이드> (아서 펜, 1967) 같은 작품들이 속한 ‘뉴 할리우드 시네마 (New Hollywood Cinema)’라는 또 다른 전통을 만들어 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카사블랑카>의 회고 상영과 재개봉은 어쩌면 황금기 할리우드를 기억하고 싶은 관객들의 집단 노스탤지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명작이 지니는 필연적 ‘퀄리티’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시간, 혹은 공간. 릭은 오랜 고민과 흔들림 끝에 가둬 두었던 시간과 함께 엘사를 보내주고 만다. 영화의 개봉 횟수만큼이나 많이 언급되고 패러디 되었던 <카사블랑카>의 이 마지막 엔딩, 공항 씬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운명과 닮았다.
할리우드의 공식과 전통을 시퀜스 마다 품고 있는 <카사블랑카>를 80년만에 마주하는 일,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4k로 복원한 대형 이미지로 보게 될 험프리 보가트의 처연한 눈빛, 그리고 샘이 불러주는 “As Time Goes By”는 할리우드가 선물한 최고의 영화적 경험을 상기하게 해 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