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의 추억> (2003)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가 개봉한지 20년이나 됐는데 스포일러의 경고를 쓰려니 좀스러운 것 같기도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어느덧 국가대표 연출자가 된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기도 하는 <살인의 추억>을 다시 보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에 기록을 남긴다.

용의자들

순삿밥을 먹으며 무당눈깔을 자처하는 형사 박두만 (송강호 분) 이 용의자를, 아니 자기만의 범인을 색출하는 비법은 간단하다. '딱 보면 아는' 것이다. 그의 파트너는 조용구 (김뢰하 분) 형사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오직 발을 이용하여 인상이 더럽다는 이유로, 혹은 명확해 보이는 증거앞에서 발뺌한다는 이유로 용의자에게 군홧발을 선사한다. 선임반장 (변희봉 분)을 포함한 이 형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범죄의 소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을 봐왔지만 실제론 무당에게 잡것들의 얼굴이나 들이밀기 바쁜 두만의 용의자 리스트는 신통치 않은 근거들로 이뤄져있다.

여기서 실제로 호기심이 들었다. 사회의 안녕과 치안을 위해서라면 그릇된 용의자를 잡아서 구속한 다음에 검찰로 송치해서 스타 형사가 되면 만사가 형통해질까? 진범을 잡아 넣는 것보다 순간의 건승을 노리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위에 지은 누각 밖에 되지 않을 텐데. 가짜 범인을 잡은 뒤에도 유사한 수법의 연쇄살인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그건 누가 책임지지? 안심하고 우중에 빨간 코트를 입고 길을 나선 부녀자가 또 희생되면 두 배로 원통 할텐데. 그러면 그 때가서 또 다른 용의자를 선정하여 제물로 만들어 순간만 조용히 만들 것인가?

제물들

용의자로 지목된 첫번째 인물인 백광호 (박노식 분)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끌려온다. 아버지의 평판을 물려받으며 이미 억울한 그에게, 형사들은 폭력도 모자라 죽음의 간접적 계기까지 준다. 조병순 (류태호 분) 또한 억울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는 주민들에게 세평 좋고 아내의 병간호를 극진히하며 신실한 믿음이 있고 성실하다. 그러나 그는 거꾸로 매달려 진술서에 지장이 찍힐 뻔 하다가 거짓자백을 한다. 박현규 (박해일 분) 또한 위 두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망난 노인의 증언과 변태라는 점 때문에 고생한 인물들 처럼, 그 또한 합리적 논리보다는 증명이 힘든 통계로 인해 내몰린다. 세 인물 모두 죄가 없지만, 짐작과 추정에 의한 혐의만으로 폭력을 입고 유린당한다.

또 다른 제물들

실은 어떤 거대한 에너지 아래에서 제물이 되는 것은 형사들도 피해갈 수 없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믿을 것은 경험뿐이다. 부적을 사오거나 거짓을 실토할 때까지 폭행하는 것만 아는 것이다. 게다가 비오는 날 그들을 도와줄 전경 중대는 시위진압에 동원됐고, 낙후된 환경에 유전자 감식도 힘들다. 형사 일선들 또한 대통령 각하를 환영하거나 그에 반대하는 무리의 제압으로 은유되는 당시의 권력구조와, 과학수사와는 담 쌓은 체제에 대한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람할짓 아닌 것을 링겔로 겨우 버티다가 실직(이직)하는 두만처럼 되거나, 혹은 태윤(김상경 분)처럼 신념을 잃고 미쳐가기도하고, 아니면 용구처럼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기도 한다. 그들은 국가 폭력의 매개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저질적인 군사정권의 수직적 권세와 미개한 수사 체계의 제물이 되기도 한다.

인간 사회는 자신의 생존과 융성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 중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 제물은 소수인 동시에 혐의는 없으나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럴때 가해자들에게 제물은 실은 죄가 없는 희생양 임을 안다면 그를 희생양으로 몰아 갈 수 없다. 그러니 가해자는 피해자가 실은 죄 없는 사람임을 몰라야 한다. 이윽고 사회의 불화는 이 제물에 의해 야기된다고 일방적으로 해석된다. 다수는 제물을 희생시킴으로써 사회의 혼미한 상태를 물리치고 나아가 발전을 강구한다. 이것은 다음 위기가 올 때까지는 유효하다. 하지만 또 다른 위험이 생기면 사회는 다음 제물을 선택해 위기에 눈가리고 아웅을 한다. 이것은 엄청난 폭력의 구조다.

형사들의 측면 포쇼트는 박현규의 정면 클로즈 업 원쇼트를 이기지 못한다.

국가

<살인의 추억>내 살인범은 어둠을 틈 타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그 어둠은 국가가 만들어 냈다. 범인은 네번째 희생자에 의해 도주중에 잠시 빛을 받을 뿐, 더 이상 어떤 영향도 없었기에 더욱 활개친다.

무지의 소산인 형사는 단지 폭력을 행사할 뿐이다. 함부로 발만 놀리던 용구의 자리엔 또 다른 파이터 기질의 형사가 대체될 것이다. 그렇게 비슷한 성향을 지닌 부품들은 국가의 부름이라는 미명 아래 바톤을 받아 또 다시 폭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 번엔 절족보다 더 한 희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는 우리를 보호하는가? 나아가 우리를 보호한다고 생각한 존재를, 공권력은 보호하는가?

기시감

왜 개봉한지 20년이나 된 영화를 다시 보았을까? 서두의 기시감이란 무엇일까.

얼마전 할로윈 데이에 서울의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나서 많은 인명이 숨을 거두었다. 추모가 우선되었고 당연히 그래야하지만, 그보다 우선한 타이밍에 구조가 있어야 했고, 그 우선에 대비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서울시의 재난 문자는 90분이나 늦게 전파됐고, 최초 신고 3분 전에도 압사신고가 들어왔지만 행안부는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1조 5천억의 예산을 들인 소방-경찰청의 무전 시스템은 보급이 완료가 됐지만 인명을 살리는데 활용되지 못했다.

국가의 수장은 모든 책임을 전가받을 제물을 찾고 있다. 시급의 규모를 책임지는 경찰청장이나, 직접적인 지역구 책임자지만 역할을 다 했다고 주장하는 구청장, 무신경한 농담으로 목숨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 국무총리, 파업 현장에서 경찰특공대의 투입을 지시했다가 월권으로 망신당했지만 이제와선 자신과 경찰은 한몸이 아니라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경질이나 제대로 된 사과는 나오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뛰던 경찰관과 소방계열의 공무원 일선에게 책임이 넘어가며 제물화 되고 있다. 가해자 - 누구인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 의 요건은 무의식적 무지라고 했으나, 이번 경향은 의식적으로 보인다고 하면 과장일까? 만약의 만약의 만약으로 공무원 일선의 책임이라고 하자, 이제는 사고 이후의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하지만 그럴 기미보다는 정쟁의 서슬만 보인다.

이 모든 측면에 대해서, 우리는 그 옛날 80년대에 서 있었던 박두만이라는 인물이 엔딩에서 카메라를 정면 응시하며 던지는 거대한 질문을 받지않을 수 없게 된다. 지금은 2003년이 아니라 2022년이므로 마치 드라마 <시그널>의 재한(조진웅 분)이 던지는 물음과 비슷한 궤라고 하겠다.

좌절과 패배에 절여졌던 80년대는 이다지도 야만적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그 현재는 안녕하신지요?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