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꾼 꿈 얘기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좋아하면서 그 꿈 때문에 다시 보게 된 영화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어머니 모습이 지금보다 50년은 젊어 보였다. 어머니이기도, 아니기도 한 여인이었다. 어머니라는 걸 어떻게 인지하게 됐는지는 세상에 늘 존재하나 부러 되새기려 하지 않는 새삼스런 신비와도 같다. 그 여인이 왠지 모르게 수줍어하며 내게 책을 한권 추천해달라 그랬다. 아주 끔찍한 범죄 장면이 나오는 소설이면 좋겠다고 하더라. 왜 이럴까, 잠깐 생각하다가 박완서의 소설을 추천했다. 내가 아는 한, 박완서 소설 중 끔찍한 범죄 장면이 나오는 작품은 없다. 가족이나 인간관계의 섬뜩함은 자주 묘파했다. 끔찍한 소설을 요구하면서 수줍게 말 거는 여인의 표정은 숫기없음과 대범함이 뒤엉킨 기묘한 형상이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자서전에서 “호감과 혐오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얼굴”이 좋은 배우의 얼굴이라 쓴 적 있다. 이런 얼굴이 바로 그런 얼굴인가 싶었다.
세상은 새삼스런 신비의 보고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여인은 역시 수줍어하며 오랜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자신에게 숨겨둔 친구, 나이가 서른 살 정도 어린 친구가 있는데, 책을 엄청 많이 읽는다고 했다. 그래서 대화가 잘 안 통해 답답했다고 그러더라.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기도 하다더라. 어떤 친구냐고 물었다. 그냥 착하고 예쁜 여성이라며 남편(내 아버지?)에겐 비밀이라고 했다. 불현듯 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상하게 아버지 얼굴은 불분명했다. 어머니 얼굴은 확실하되, 나도 태어나기 전의 모습이라 내가 그 얼굴을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 무슨 근거로 그 여인이 내 어머니라 확신하는가. 꿈은 늘 서너 겹이다. 시간도 공간도 일상의 처마 언저리에 멋대로 세놓은 까치집처럼 분명하되 혼몽하다.
박완서 소설집을 옆구리에 끼고 어머니이기도 아니기도 한 여인이 한 여성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는 어디인지 모를 창가에서 몰래 훔쳐봤다. 사각 틀이고, 현격한 거리감과 동시에 손대면 바로 풍경의 질감이 만져질 듯한 일체감이 드는 어느 공간이다. 내 의식의 거푸집일 수도, 임의로 각을 떠 심리적 이격을 부각해낸 엉터리 경계일 수도 있다. 박완서 소설엔 끔찍한 범죄 장면이 안 나온다는 걸 들킬까 봐 살짝 조마조마한 상태였던 것 같다. 두 여성이 어느 숲길을 오래 걷다가 낡은 목조주택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창가에서 그들을 좇았는데, 움직이는 건 그녀들이 아니라 창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움직이는 창가라니. 어쩌면 나는 의심과 호기심, 열망과 좌절을 동시에 함축한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카메라는 무엇인가. 풍경과 사물과 사람의 모습을 기계적으로 재생시키는, 사람 눈의 기계적 후예 아닌가. 그리고 눈은 무엇인가. 사물의 현존과 명암을 뇌로 전달해 판단하고 말하고 감정까지 도발하는 우주적 원자의 아주 미진한 파동과 빛의 장난, 그 반사체 아니던가.
목조주택 안은 어두웠으나 이내 커다란 창가가 나타나며 햇빛이 넓게 번졌다. 두 여성은 나무 테이블에 앉아 지긋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젊은 여성을 자세히 봤다. 사진에서만 본 20대 때 어머니 얼굴이었다. 마주보고 있는 여인(어머니)은 갑자기 다시 50년을 더 늙어 현재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햇빛이 건물 안으로 강하게 투과돼 무슨 나무 옹이 같은 걸 흑점 삼아 집을 불 지르기 시작했다. 두 여성은 그래도 지긋이 마주 보며 웃고만 있었다. 꿈속임에도 영화 한 편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거울’(1974)
영화는 거울 속의 거울과도 같다
20여 년 전 처음 본 이후에도 삶이 혼몽스럽고 일상의 어떤 근원 지점이 부실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여겨질 때 여러 번 되새겨 본 영화이다. 제목마따나 ‘거울’을 들여다보듯 꼼꼼히 훑어보게 되는데, 딱히 영화가 난해하고 시공이 오묘하게 뒤섞여 있는 까닭만은 아니다. ‘거울’을 보다 보면 나 자신 한 사람의 관람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이고 소리 내고 아파하는 인물 중 하나로 변신한 듯한 기분이 든다. 이를테면 거울 속으로 들어가 거울 밖의 나를 지긋이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인물들은 뜨겁게 자신 안의 뭔가를 당장이라도 불사를 듯 보이나 이편으로 전해오는 물리적 진동은 매우 고요하다. 너무 고요해서 더 뜨겁고 더 열렬하게 마음속의 뭔가를 비틀고 되묻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장면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활성 강력한 미지의 그림처럼 또렷이 남는다. 그건 어느 날 밤 꾼 꿈이 이후 무시로 뇌리에 떠올라 생시와 꿈의 경계를 뿌옇게 지워버리는 상태와 닮았다.
영화를 보는 행위가 꿈꾸는 것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이처럼 표일하게 드러내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꿈인 만큼 그것은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욕망과 슬픔을 빛과 소리를 잉걸 삼아 만인 공통의 심리적 근원으로 불 밝혀낸다.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런 의미다. 거울은 고요한 평면이나 그 안엔 온갖 시간과 사물과 사람의 잔영들로 요란스럽다. ‘사랑’을 비추면 ‘증오’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슬픔’을 던지면 ‘욕망’이 반사되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을 들쑤시다가 다시 바라보면 여전히 고요하다. 혼돈과 착오와 착종 뒤에 맞이하는 고요는 그러므로 마냥 고요하지 만은 않은 것이다.
여러 장면이 무시로 뇌리에서 재편집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느 씬을 붙들어도 소리의 묵직한 뿌리와 빛의 따가운 살이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는 느낌을 준다. 그 중에서도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어머니)의 집 헛간이 불타는 장면이 유독 오래 떠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나무와 풀들이 치솟는 불길만큼이나 맹렬히 살아있는 화면. 소위, 4원소(불, 물, 공기, 흙)가 원액 그래도 한 프레임 안에서 뒤섞이는 셈인데, 나무와 풀과 사람은 그때 가장 분명한 생명이되, 당장이라도 불길 속에 휘말려 전 존재를 말살당할지도 모를 긴장 속에 고요히 서 있다.
이 장면을 몇 번씩 되새기고 곱씹으며 스케치까지 하게 만든 심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 수 없다. 어머니와 독서를 좋아하는 그녀의 어린 친구(이자 어머니 자신)가 등장한 꿈속에서 나는 제3자이자 방관자였다. 그럼에도 마음 속 깊은 서까래가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그로 인한 가슴 저림은 왜였을까. 어머니를 한 명의 여성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책 같은 게 제발 저리듯 느껴졌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랬다면 그건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나 자신의 아픔 같은 걸 전가하기 위한 마음의 허영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 불투명한 아픔 자체에 몰두해 더 아파보기로 했을 뿐, 10여 년 전 이 장면에서 포획한 이미지를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 한동안 부르고 다녔던 것도 그런 심사였을 거다.
삶의 섭리라는 단순성, 그 아름다운 잔혹
꿈의 마지막은 이랬다. 두 여성이 불길 속으로 잠긴다. 불의 정확히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검게 탄 천장에서 재가 된 나무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처음 꾸는 꿈이지만, 그 꿈이 이미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착종을 더 내밀한 착종으로 쪼개서 다시 꿰면 미래도 현재도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현재의 미래로 순환하게 되지는 아닐까. 어머니는 어쩌면 시간의 엄청난 하중을 뚫고 이미 20살 이전의 소녀로 돌아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어머니 스스로 그걸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하더라도 우주는 그렇게 다시 한 사람을 여러 사람으로 쪼개 만방에 존재하게 한다. 어머니가 읽은 어머니만의 박완서 소설엔 끔찍한 범죄 장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끔찍함은 흔히 알고 있는 세계의 잔인함을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존재 자체의 찬연한 슬픔과 아픔이 삶의 기본 섭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그 지나친 단순성의 잔혹. 세상 모든 아름다움은 그걸 먹고 자란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