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건설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조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는 일평생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 없는 남자다. 선친이 그랬던 것처럼 냉혹한 자본가 미스터 포터(라이오넬 베리모어)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조합원들에게 내 집 마련을 해주기 위해 헌신해 온 조지 베일리의 삶은 따뜻하지만, 그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세계를 여행하고 싶었던 그의 꿈은 아버지의 때이른 죽음으로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 멋진 신혼여행을 떠나려던 그의 계획은 뱅크런으로부터 조합을 지키기 위해 여비를 다 소진한 탓에 무산되었다. 찰나의 행복과 은은한 불행이 서로 등을 맞대고 찾아오는 조지 베일리의 삶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는데,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날 빌리 삼촌(토마스 미첼)이 회사 돈 8000달러를 잃어버리는 일이 터지면서 조지의 삶은 전에 없던 위기에 처한다. 오늘 안으로 8000달러를 채워넣지 않으면 조지는 공금횡령죄로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미스터 포터의 탐욕스러운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다. 조지는 자살로 사망보험금을 타낼 생각에 빠진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1순위로 <멋진 인생>(1946)이 꼽힐 것이다. 프랭크 카프라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함께 빚어낸 이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1843)이 그렇듯,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주인공이 제 삶을 되돌아보고 지금의 삶에 감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제 생을 마감하려던 조지는 수호천사 클라렌스(헨리 트래버스)의 방문을 받게 되고, 클라렌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생겼을 일들을 확인한다. 조지가 없었다면 남동생 해리(토드 칸스)는 일찌감치 물에 빠져 죽었을 테고, 해리가 2차 세계대전에서 구해낸 수많은 병사들도 죽었을 것이다. 조지가 없었다면 선친의 주택건설 협동조합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을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독점자본가 미스터 포터가 지은 질 나쁜 주택에서 마지못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조지가 없었다면, 조지가 없었다면… 자신의 삶이 사실 실패가 아니라 매우 성공적인 삶이었음을 깨달은 조지는 제 집으로 뛰어 돌아가고, 때마침 조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십시일반으로 필요한 돈을 메꿔준다.

인간과 세상을 향한 낙관으로 가득 차 있는 <멋진 인생>은 얼핏 지나치게 순진해 보인다. 뱅크런의 위기 앞에서 패닉한 채 제 조합원 계좌를 해지하려고 사무실로 찾아온 마을 사람들은, 이 조합을 지키지 못하면 독점자본가 미스터 포터의 손아귀에 마을이 넘어갈 것이라는 조지의 설득을 듣고는 당장 필요한 돈만 조지에게 빌려가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한다. 조지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조지의 안녕을 기도하고, 주머니를 털어 빌려줄 수 있는 돈을 모은다. 나처럼 삐딱한 인간이라면, 이 그림 앞에서 한번쯤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순진한 곳이 아닌데. 모두가 저렇게 따뜻하지는 않은데. 분명 누군가는 조지의 선의를 악용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인간을 향한 믿음을 잃는 날도 있었을 것인데. 감독이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거 아니야? 실제로 당대 관객들도 이 작품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했다. 318만 달러를 들여 만든 <멋진 인생>의 극장 수익은 330만 달러에 그쳤고, 영화 흥행에 실패한 카프라는 자신의 제작사 ‘리버티 필름스’의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멋진 인생>의 낙관은 카프라가 순진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의 이민자 1.5세대였던 카프라는 어린 시절 내내 이탈리아계 이민자를 향한 지독한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그 인종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카프라는 커리어 내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 미국의 주류 세력)에 가깝게 유지해야 했다. 실제로 프랭크 카프라의 작품에서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난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진심으로 믿었고, 미국은 선이며 미국적인 삶이야말로 최고라고 믿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 사회는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에게 “적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다그칠 정도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가했는데, 카프라는 자진해서 전시 프로파간다를 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고 미 육군에 입대했다. 그에게 조국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그러니까 그 낙관은, 순진해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에 동화되기 위한 몸부림으로 구축된 삶의 태도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멋진 인생>의 낙관도 그 연장 선상이었을까? 글쎄, 그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카프라는 미 육군 소령의 자격으로 전쟁 한복판에 들어갔다 나온 뒤 <멋진 인생>을 만들었다. 전장에서 그가 만든 전시 다큐멘터리는 온통 ‘미국 만세’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럼에도 연일 생과 사가 허망하게 갈리는 전쟁터에서 낙관과 애국주의만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멋진 인생>에는 전작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던 죽음과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조지는 차라리 자신이 죽어버렸으면, 아니,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뇌까리고, 독점자본가 미스터 포터는 호시탐탐 마을 전체를 집어삼킬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카프라는 평범하고 목가적인 삶을 회의하고, 미국을 지탱하는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의 한계 앞에서 절망한다. 그 지독한 회의와 자문 끝에 찾아낸 카프라의 답이 바로 <멋진 인생>이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사람의 삶은 찬란하게 빛난다고,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우리는 서로를 믿고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멋진 인생>의 낙관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강인한 다짐이다.

극장 개봉 당시 흥행에 참패했던 <멋진 인생>은, 텔레비전 방영을 통해 수많은 미국인들과 만난 이후 홀리데이 클래식의 반열에 올랐다. 그 수많은 미국인들이 그저 순진하고 순박하기 때문에 뒤늦게 <멋진 인생>에 빠져든 걸까? 미국 주류 이데올로기에 동화되고자 몸부림쳤던 한 이민자 남성의 노력이 뒤늦게 빛을 발한 걸까? 난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카프라는 인종차별과 전쟁의 참화라는 지독한 절망을 거치면서도 끝끝내 당대의 인간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멋진 인생> 속 마을 사람들은 이탈리아계 이민자 마티니(빌 에드먼즈)가 운영하는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하루의 피로를 푼다. 인종차별을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가 가능할 것이라는 카프라의 믿음이 거기에 있다.) <멋진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낙관의 순진함이 아니라 낙관의 강인함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루를 살아보자고 말하는 힘,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시대착오적이지만, 그렇기에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초월한 불변의 이상향.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