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포스터. 사진 제공=블루필름웍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예예예 ♪

이태석 신부가 선종한 지 벌써 12년. 그를 세상에 알린 <울지마, 톤즈>(감독 구수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관객 44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2020년에는 선종 10주기를 기억하며 <울지마, 톤즈2: 슈크란 바바>(감독 강성옥)와 <부활>(감독 구수환)이 개봉하기도 했다. 내년 1월. 그의 선종 13주기를 앞두고 또 한 편의 영화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부산 시사회를 시작으로 관객들을 만나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영화 <이태석>이 그 주인공. 이미 후속작들이 있는데 이번 영화는 전작들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이우석 감독을 만나 그가 만난 이태석 신부, 톤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태석 신부님이 선종한지 벌써 12년이 흘렀더라고요. 시간이 참 빨라요.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하신 계기가 있나요?

원래 저는 방송 다큐멘터리를 20년 정도 했어요. 방송을 오랫동안 하면서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생기더라고요. 그러다 2019년 가을에 제작사로부터 감독 제안을 받았어요. 이미 2020년에 <울지마 톤즈2: 슈크란 바바>와 <부활>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또?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평소 존경하던 분이었고, 이전 다큐멘터리에서 4K 작업을 해봤던 경험도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수락했어요. 사실 또 제가 수단이랑도 인연이 있거든요.

톤즈와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나요?

2012년에 EBS 모금방송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톤즈를 다녀온 적이 있어요. NGO인 월드비전과 함께 한 프로젝트였죠. 아프리카 여러 나라 중 남수단이 첫 번째 나라였습니다. 그 당시도 톤즈는 정말 오지였어요. NGO가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크게 세 개로 구분할 수 있어요. 긴급구호, 인권옹호, 지역개발이죠. 한비야 선생님 같은 경우가 긴급구호로 유명하죠. 지진이나 재난이 발생할 경우 바로 출동하는 팀이에요. 수단은 2011년이 되어서야 독립을 했어요. 이태석 신부님이 계실 때는 정식 국가가 아니라 남쪽 수단, 남수단 이렇게 불렸고요. 위험한 곳이었죠. 한비야 선생님이 당시 한국 월드비전은 그만뒀지만, 국제 월드비전 소속으로 남수단에 계셨어요. 톤즈에 갔더니 “아프리카에 온 적 있어요?”하고 물으시더라고요. 처음이라 했더니 “어쩌다가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여긴 월드비전 직원 중에도 극소수만 오는 곳이에요”라고 말하시더라고요. 엄청 긴장했던 기억이 있어요.

시사회 현장에서 관객과 함께 한 이우석 감독(사진 하단 우측). 사진 제공=블루필름웍스

말씀하신 대로 <울지마, 톤즈> 이후 고 이태석 신부를 다룬 영화들이 나왔죠. 10주기를 기념해서는 <울지마, 톤즈2: 슈크란 바바)(감독 강성옥, 2020) <부활>(2020)이 개봉했고요. <이태석>은 이전 영화들과 어떤 차별점을 두고 찍으려고 접근하셨나요?

우선 <울지마, 톤즈> 이후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했어요. 병원은 어떻게 됐는지, 브라스밴드 아이들은 어떻게 컸는지 같은 것들을요. 말씀하신 두 영화들은 여기에 대한 대답을 못했거든요. 그래서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10년에 변한 모습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여주자는 것이 첫 번째 차별점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신부님에 대해서 신부님과 함께 생활했던 분들의 육성으로 이야기해보자는 거였어요.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가족은 처음부터 배제했습니다. 살레시오수도회도 마찬가지 이유로 뺐고요. 신경숙 교수, 박진홍 신부 같은 분들이 출연해주셨어요. 자신이 기억하는 이태석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라고 생각하고요. 그들의 육성으로 이태석을 기리게 됐다는 점이 두 번째 차별점입니다.

그렇게 주제적으로는 인간 이태석의 고뇌, 의사 이태석의 봉사, 사제 이태석으로의 말씀 이런 부분을 입체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다큐멘터리로는 어려웠던 4K로 찍었다는 것도 차별점일 수 있겠네요.

이태석 신부 선종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톤즈는 현재 어떤 모습인가요? 병원, 학교가 이태석 신부님 시절처럼 잘 운영되고 있는지, 가장 달라진 점은 어떤 점인지 궁금합니다.

병원부터 말하면 더 커졌어요. 이탈리아에서 예산을 지원했고, 이태석 신부님의 이름을 따 ‘John Lee Hospital’을 설립했습니다. 예전 병원 뒤에 더 크게 만들었고, 그 안에 기존의 병원을 유지하고 있어요. 지금 톤즈에 병원이 2개 더 생겼다고 하는데, 그래도 상주하는 의사가 있으면서 최상의 상태로 운영 중이에요. 살레시오수도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학교도 여전히 잘 운영되고, 톤즈의 교육열도 아주 높은 편이에요. 모두 이태석 신부님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거죠.

영화가 시작할 때,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에 ‘사랑해 당신을’ 노래가 여러 버전으로 나와요. 너무 좋더라고요. 특별히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2020년 1월에 했던 첫 촬영이 마지막 촬영이 됐어요.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추가촬영이 기약 없이 미뤄지게 된 건데요. 결국 다시 톤즈에 가지 못했습니다. 정말 힘들더라고요. 소스는 뻔한데 말이죠. 그런데 영화에도 나오지만, 모니카 수녀님을 만났어요. 저와 톤즈에 동행했던 산티노에게 물어 보니, 모니카 수녀님도 예전에 이태석 신부님 제자였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뷰를 하는데, 일곱 살 때 처음 신부님을 만났대요. 아버지처럼 잘 해주셨고, 등록금도 내주셨고, 노래도 가르쳐주셨다는 거예요. 한번 불러볼래요? 했더니 ‘사랑해 당신을’ 노래를 부른 거예요. 영어로요. 산티노에게 물어봤죠. 신부님께서 이 노래도 많이 부르셨냐고요. 자주 흥얼거리셨고,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주셨다고 했어요.

게다가 이태석 신부님 선종 10주기 미사에 모인 제자들이 노래를 한다는데, 글쎄 ‘사랑해 당신을’을 부른다는 거예요. 영화에 다 담았죠. 그러면서 영화 소스가 뻔한데, 도입부를 어떻게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노래를 붙였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그림이었고, 음악으로 시작해서 마음에 여유도 주면서 관객들을 톤즈로 안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 그 노래가 된 겁니다. 부산 시사회 때 이태석 신부님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왔어요. 신부님 영화를 모두 본 분들인데, 이번 영화는 슬프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힘이 났어요.

<이태석> 스틸컷. 사진 제공=블루필름웍스

영화를 찍으면서 보시기에 현재 톤즈에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아마 이태석 신부님이 계셨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하고 느낄만한 점들이랄까요.

가장 안타까웠던 게 바로 브라스밴드였어요. 사라져버린 거죠. 악기들도 예전 초등학교 건물 창고에 들어 있고요. 아이들이 다 커서 졸업한 거예요. 다음 기수를 받아야 했는데, 가르칠 사람도 없었죠. 악기도 사람이 계속 관리해줘야 하는데, 이제는 소리도 안 나요. 촬영을 도와줬던 산티노가 악기에 자욱한 먼지를 털어 내고 부는 장면에 영화에 나오는데, 소리가 안 났죠. 이태석 신부님이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이어지지 못한 것이 브라스밴드인 것 같아요. 참 아쉬워요. 방치됐던 악기들은 추후 다른 곳에 옮겼대요. 박물관 같은 걸 지으면 거기에 전시하려고요.

제가 영화에서 이태석 신부님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처음 남수단에 1~2주 정도 짧게 방문했던 이태석 신부가 이후에 도망치듯 나갔다는 사실이었어요. 영화에서는 이태석 신부를 처음 남수단으로 인도했던 인도인 제임스 신부가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하죠. 실제로 영화를 찍으면서 고 이태석 신부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있다면요.

아, 이태석 신부님도 결국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장면이었어요. 또 하나는 이태석 신부님이 계셨을 때 톤즈에 콜레라가 창궐했어요. 간호사들이 도망갔다고 말하는 장면에 영화에 나옵니다. 그때 전쟁 중이던 군인들도 치료를 받기 위해 수십 명이 왔었대요. 목숨을 걸고 의사로서 고쳐준 거죠. 그런 점이 이번 영화에서 새롭게 발굴한 이태석 신부님의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하나 아쉬운 점은 음악가로서의 이태석을 조명하고 싶었는데 못한 점이에요. 조사하다 보니, 부산에서 열린 음악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으셨더라고요. 교육청에 문의해 보니 오래되어서 남은 자료가 없었어요. 오래전부터 음악적으로도 출중했던 분이란 걸 알리고 싶었는데, 아쉬운 지점이죠.

영화를 보고 이태석 신부님이 쇼핑을 많이 다니셨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됐어요.

아프리카에서도 큰 도시는 케냐의 나이로비 정도입니다. 영화에서 인터뷰한 분도 나이로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분이에요. 그분도 이태석 신부님이 톤즈에 가셨을 무렵 케냐로 이민 가셨대요. 나이로비 성당에서 이태석 신부님을 처음 만났고, 이후 집으로 초대해 예배를 드리면서 동향, 부산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요. 이역만리에서 만난 신부님이 동생뻘이었던 거죠. 그때부터는 신부님이 나이로비로 오시면 열흘이든 스무날이든 편하게 쉬다 가시라고 했대요.

의외로 신부님이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란 것, 나이로비에 오면 며칠이라도 쉬고 싶은데 아침에 나가서 저녁까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선물을 사러 나가셨다는 것도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면모라고 봐요. 또 하나는 이태석 신부님께서 암 판정을 확정 받고 신경숙 교수님께 알렸던 첫 메일이죠. 저희가 영화 찍는다고 고군분투하는 걸 보신 신 교수님께서 처음으로 공개해주셨어요. 박진홍 신부님과 톤즈에서 찍었던 사진도 이번 영화에서 처음 보실 수 있습니다.

<이태석> 스틸컷. 사진 제공=블루필름웍스

반가운 얼굴들을 추적하셨습니다. 이태석 신부 선종 전 한국에 입국했던 톤즈의 두 청년도 있었고요, 의대를 졸업한 모습이 어엿해 보였어요. 또 고해성사하던 소녀는, 세 아이의 엄마가 돼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찍으면서 이태석 신부님이 뿌린 씨앗이 어떻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었다고 느끼셨나요?

수단이 이제 막 독립한 나라잖아요. 가장 크게 느낀 건 아이들을 대했을 때예요. 이태석 신부님께서 아이들에게 “너희는 이 나라의 기둥이다. 그러면 너희는 공부해야 한다. 고등학교만 나와서도 안 된다. 대학을 가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늘 하셨대요. 아이들이 그 이야기를 매일 들었던 거예요. 그 작은 톤즈라는 도시에서 주바 의대에 간 아이가 열 명이 넘어요. 교육열이 투철해졌다는 거죠. 또 그 아이들이 의사만 된 게 아니에요. 신부님 말씀 따라 공부를 해서 행정가, 교사, 군인이 되어 나라에 헌신하고 있어요. 신부님 말씀을 기억하고 있던 거죠.

또 이태석 신부님이 생전에 정말 신경을 쓰셨던 곳이 한센인 마을이에요.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한센인 마을에 식량을 제공하러 가요. 마지막으로 음악이죠. 브라스밴드 했던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한 것이 음악’이라고 해요. 총성만 있던 곳에서 제대로 된 음악을 깨우쳐 준 순간이 살아 있었던 겁니다. 오직 이태석 신부님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고 봐요.

영화 제작 기간은 어떻게 되나요?

2019년 9월에 영화 제안을 받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좀 빠르긴 했지만 2020년 1월에 현장에 갔습니다. 1월 14일이 이태석 신부님 기일이니, 그 시기에 맞춰서 간 거죠. 스토리라인도 잡을 겸요. 돌아오는 길에 케냐 장면을 찍었고요. 말씀드렸듯이 코로나19가 터지면서 톤즈를 더 이상 갈 수가 없게 됐어요. 그때 20일 촬영한 것이 전부에요. 방학 기간 중이라 학교에 애들이 많이 없었어요. 당연히 추가촬영을 계획했었는데, 못 한 게 참 아쉬워요. 톤즈에 병원을 지어준 이탈리아 신부님도 만나고 싶었고,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였던 모니카 수녀님이 다녔던 수녀학교도 촬영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다 스톱됐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요.

영화 찍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고난을 극복하셨는지 궁금해요.

우선은 남수단이 아직도 위험하다는 점이었어요. 영화에 보면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이 나옵니다. 그 장면을 촬영하려고 밤에 나갔는데, ‘탕탕탕’ 하고 총소리가 들렸어요. 동행했던 현지인이 위험하다고 얼른 숙소로 돌아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엔딩크레딧에 톤즈 시내 모습을 넣었어요. 스토리라인에 넣기는 애매했지만, 시내 전경을 찍으려고 경찰 에스코트까지 받았었거든요. 아직 안전하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 가장 힘든 점이었죠. 뭐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추가촬영을 하지 못한 것도 안타깝긴 합니다.

<이태석> 스틸컷. 사진 제공=블루필름웍스

그래도 드론으로 담은 톤즈의 부감샷은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인제대 의과대 다니는 존이 영화를 보고 자기네 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어서 저도 정말 좋았어요. 빠듯한 예산이지만 최대한 좋은 영상을 담으려고 노력했거든요. 저는 아프리카에서 2년 정도 촬영한 경험이 있잖아요. 유목민들이 지나갈 때나 물소떼가 이동하는 건 그때 아니면 찍을 수 없는 걸 알죠.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바로 드론부터 날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촬영감독에게 ‘나 드론 날린다, 어떻게든 찍어!’라고 말했죠(웃음). 사실 드론에도 사연이 있어요. 입국할 때 빼앗긴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도 사서 갔어요. 결국 아프리카에서 나올 때 빼앗겼지만요.

반면에 가장 즐거웠던 경험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촬영감독이 욕심이 많은 편이에요.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해보자’ 제안했더니, 하겠더라고요. 예산이 빠듯한 걸 알면서도요. 그런데 먼저 4K로 하자고 하더라고요. 촬영감독이 갖고 있는 블랙매직사의 4K시네마 카메라로 촬영을 했어요. 그 작은 카메라로 찍었는데, 색감이 너무 예쁘게 잘 나오더라고요. 거기까진 좋았어요. 그런데 편집툴이 블랙매직사 계열인 ‘다빈치’로만 된다는 거예요. 제가 20년 넘게 영상 작업을 해서 프리미어, 파이널컷 이런 건 다 눈 감고도 하는데, 아 글쎄 이런 편집툴에서는 안 읽히잖아요. 정말 울면서 편집을 했습니다.

별로 즐거웠던 경험은 아닌 거 같은데요?

앎에 대한 즐거움이라고 할까요?(웃음) 그러고 보니 진짜 즐거웠던 건 2012년 모금 방송 촬영차 톤즈에 갔을 때 만났던 취재원들을 재회한 거네요. 홀어머니에 4남매였는데, 워낙 못 살았던 친구들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거든요. 어찌어찌 수소문해서 찾았어요. 정말 반가웠는데, 여전히 빈민촌에 있더라고요. 첫째, 둘째는 주바에 돈 벌러 갔고요. 그래봐야 10대 중후반일 텐데…. 엄마는 재혼했다고 했어요. 만나서는 반가웠지만, 지금 잘 사는 모습이 아니라 안타까웠던 기억이네요.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는 중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반가웠습니다. 다름 아닌 팝페라 가수 임형주였죠. 어떻게 영화에 참여하게 된 건가요? 그리고 실제 내레이션 현장에서는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임형주 가수와는 예전 월드비전 프로젝트 때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는 결국 어긋나서 함께 하진 못했죠. 사실 다큐멘터리에서 나레이션이 정말 중요하잖아요. 이전 이태석 신부님 영화 두 편은 워낙 유명한 이금희 아나운서가 나레이션을 맡았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내레이션 없이 하려고 했어요. 내레이션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해도 조금만 쓰려고요. 내레이션이 많이 나오면 너무 주입식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필요하겠더라고요. 사무실에 앉아 누구를 할까 고민을 하던 차에 책상에 놓인 임형주 가수의 CD가 딱 눈에 드어오더라고요. ‘에이, 안 해주겠지’하는 마음이었지만 문자를 남겼어요. 몇 시간 지나 전화가 온 거예요!

안부 좀 묻다가 <이태석> 영화를 만들게 됐는데, 내레이션을 부탁하고 싶다고 바로 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임형주 가수가 “저 이태석 신부님 평소에 엄청 존경했어요. 작년에 가톨릭 신자가 됐고, 지금 평화방송에서 라디오도 하고 있거든요!”라면서 바로 하겠다고 답하더라고요. 해주기만 하면 ‘대박’일 거라 생각했는데, 평소 존경했다는 말을 들으니 더 좋더라고요. 그리고 데뷔 이래 성가곡을 처음 만들었는데, 영화 홍보에 쓰라고 곡도 줬어요. 1월에 오픈 예정이라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곡인데 말이에요. 세상에. 재능기부로 내레이션 참여해준 것만도 고마운데, 곡까지 쓰게 해줘서 영화의 뮤직비디오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임형주 가수의 참여가 정말 기적 같은 순간이었죠.

<이태석> 스틸컷. 사진 제공=블루필름웍스

영화감독의 꿈은 언제 가지셨는지 궁금해요.

사실 PD로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서 ‘김종학 감독은 천재다!’라고 느꼈어요. 그 이후의 <모래시계>도 ‘역시!’하면서 즐겁게 봤고요. 김종학 감독에게 빠져서 대학도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했습니다(웃음).

공부는 어디서 하셨어요?

MBC사이버아카데미 1기였어요. 드라마PD가 꿈이었거든요. 첫 작업이 KBS 다큐멘터리 <이것이 인생이다>였어요. 재연물이긴 했지만, 한 사람의 일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 있었어요. 그러다 수업에서 들었던 ‘다큐멘터리론’이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래서 교양 파트로 넘어갔어요. MBC에서 <화제집중> 같은 프로도 했고요. 보통 다큐멘터리는 10년차 이상 PD들에게 맡기는데, 저는 좀 일찍 시작한 편이에요. 그런데 방송 현장은 늘 촉박하고, 뭔가 말이 안 되더라도 맞춰나가야 하는 것들이 좀 있는 편이거든요. 그러면서 관객에게 사랑받는 건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전형적이거나 상투적인 것이 아니, 도태되지 않는 걸로 하려고 노력했고요. 그러니 도전이 두려운 건 없었습니다. 첫 영화를 운명적으로 <이태석>으로 하게 된 것도 그 전에 톤즈를 다녀왔던 경험, 4K를 다뤄봤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던 것처럼요.

어떤 감독에게 영향을 받으셨나요?

기본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를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그 이후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다 찾아봤죠. 감독을 조사하다 보니, 저처럼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이더라고요(웃음). 또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는 보고 완전히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 천재 감독이구나 하는, 영화의 힘을 느꼈죠. 다큐멘터리만 만들던 사람으로 뭔가 부족함? 부끄러움 같은 감정도 들더라고요. 극영화로 사회를 바꾸는 힘을 목도한 거죠. 다큐멘터리에서는 없는 걸 허구로 만들어낼 수는 없잖아요? 언젠가는 저도 극영화를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지만, 아직 글을 잘 못 쓰는 것 같아서 공부 중이에요(웃음).

차기작도 다큐멘터리로 준비 중이신가요?

독립운동가의 손주이자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에요. 할아버지가 한국인이고, 할머니가 중국인인데요, 할머니는 공산당 역사에서 중요한 광저우혁명에서 큰 역할을 했던 고위직이었어요. 손주는 지금 광주에 살고 있고, 현충일에 가끔 공연을 하기도 해요. 이 가족이 스토리가 엄청나서, 작업 중에 있습니다.

한 것도 별로 없는데 벌써 한 해가 다 저물어 12월입니다. 더불어 내년이면 이태석 신부 선종 13주기이고요.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태석 신부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이들이 보는 위인전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연말연시에 <이태석>을 보면서 ‘내가 이태석이라면’, ‘나도 이태석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면 좋겠어요.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만약 이태석 신부님이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볼 수 있는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이웃에게 봉사하는 건 작은 거라도 하면 되는데, 너무 큰 걸 우러러보기만 하면 이 영화를 만든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그릇은 의사. 작곡가이지만, 우리는 우리 그릇 크기에 맞는 나눔과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에요. 그게 <이태석>의 힘 같아요. 그걸 느끼러 관객들이 오시는 것 같고요. 물론 이 영화가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첫 영화가 아님에도 또 극장을 찾는 이유에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영화 보는 시간만이라도 그런 다짐을 하면 좋겠습니다.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