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다음 소희>는 죽음을 다룬다. 특성화 고등학교 학생이 콜센터에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실제 사건이 영화의 모티브다.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열악한 노동 환경에 내던져져 죽거나 다치는 현장실습생의 사연은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에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됐다. 뉴스, 시사 프로그램, 르포 기사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실태가 드러났지만 비극은 반복되는 중이다. 이토록 절망스럽고 답답한 현실을 극화할 때, 영화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유사한 소재를 다룬 <젊은이의 양지>(신수원, 2019)는 모욕과 수치로 얼룩진 콜센터 노동 환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한편, 죽음이라는 사건에 접근하기 위해 미스터리 스릴러 구조를 차용한다. 센터장 세연(김호정)은 고등학생 준(윤찬영)의 실종과 관련된 수수께끼 게임 속에서 고통스럽게 삶의 다른 장면을 마주해나간다. 이는 아직도 현장실습의 비극이 상당 부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맞물리는 형식이다.

<다음 소희>는 다른 전략을 택한다. 여기엔 눈에 띄는 미스터리가 없다. 영화는 소희(김시은)의 죽음을 미궁 속에 숨겨두지 않는다. 그저 사건 전후로 벌어지는 일을 시간 순서대로 차근히 따라갈 뿐이다. 관객이 죽음이라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개인을 옥죄는 책임의 사슬을 발견할 때까지.

영화는 텅 빈 연습실에서 홀로 춤추는 소희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엄청나게 진지한 얼굴이다.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몸이 땀에 흠뻑 젖어도 개의치 않는다. 이 순간만큼은 어려운 안무를 해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만 같다. 포기하지 않는 건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생생한 몸짓을 거친 롱테이크에 담아낸 오프닝은 주인공의 성격과 영화의 태도를 한꺼번에 드러낸다. 앞으로 영화는 주저앉기 싫어하는 소녀와 끈질기게 동행할 것이다. ‘애완동물 관리과’ 소희는 졸업을 앞두고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시작한다. 취업 교육이랍시고 들은 건 튀지 않게 화장하라는 말뿐이지만 새로운 일 앞에서 소희는 열의를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을 해지하려는 고객에게 말장난 같은 단서 조항을 끝없이 읊어대며 피로와 짜증을 받아내는 ‘방어팀’ 업무는 그냥 “구린” 걸 넘어서 응대자의 마음까지 병들게 한다. 영화가 그려내는 콜센터의 일상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언어폭력에 대한 안전장치가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상담원은 고객에게 한창 욕먹는 중에도 상냥한 목소리로 인터넷 가입 상품을 팔아야 한다. 콜수를 채우지 못하면 퇴근할 수 없고, 실적이 나쁘면 공개적으로 질타 받는다. 그렇게 한 달을 채워도 계약서에 적힌 금액을 다 받을 수 없다. 임금 책정 기준이 모호하고 불투명한 탓이다.

<다음 소희>

필요할 땐 주먹질도 불사하는 여고생답게, 소희는 불합리한 상황을 마냥 참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는 회사에 화내고 따지는 한편 집과 학교에 은밀한 구조 신호를 보낸다. 누군가 알아차려 주기를, 그래서 그런 일은 그만둬도 된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면서. 카메라는 그런 소희의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인물의 사소한 떨림까지 함께 나눈다. 그렇게 줄곧 핸드헬드로 운용되던 카메라는 소희가 죽는 순간부터 우뚝 멈춰 선다. 러닝타임이 절반가량 지났을 즈음이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치고 <다음 소희>는 죽음 앞에서 담담하다. 감정의 온도가 갑자기 치솟는 일도, 죽음이 누군가를 각성케 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애도의 자세를 취하려 애쓰고 과장하는 기색도 없다. 그 건조한 태도가 외려 죽음을 온전한 독자적 사건으로 보게 만든다. 춤추는 걸 좋아했고 부당한 대우에 거침없이 맞서던 아이는 이제 여기에 없다. 어쩌면 이 부재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다음 소희>는 누군가의 온기와 체취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시간의 기묘함을 나누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다음 소희>

영화의 나머지 절반은 형사 유진(배두나)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오랜 휴직 끝에 복귀한 그는 몸풀기로 소희 사건을 맡는다. 앞뒤 정황은 물론 부검 결과까지 종합해 봐도 단순 자살. “예상대로”다. 그러나 유진은 좀처럼 사건을 종결짓지 못한다. 그는 소희의 구조 신호를 뒤늦게 감지하고 응답하는 자다. 경찰조직에 속한 심드렁한 표정의 여자라는 점에서, 유진은 정주리 감독의 전작 <도희야>(2014)의 주인공 영남과 닮았다.

둘 다 배두나가 연기한다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점이다. 한편, 개인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데다 중심 사건과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관찰자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유진을 감독의 대리자라고 봐도 무방할 테다. 그는 콜센터와 학교를 오가며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고 아무도 죽음에 책임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분노한다. 교육의 일환이 되어야 할 현장실습이 그저 학교의 취업률 올리는 도구가 된 상황을 꼬집으며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기도 한다. 참담한 세상 속 어른의 역할을 고민한 결과일 테지만, 그 대사들이 그저 스크린 너머를 향한 불분명한 웅변처럼 들리는 때도 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는 있겠다.

정작 죽음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유진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영화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유진과 함께 회사, 학교, 교육청, 노동청이 서로 무한히 책임을 떠넘기는 악순환의 풍경을 마주한다. 콜수, 판매량, 취업률처럼 숫자로 가치를 평가받는 세상에서 열아홉 살 학생들의 안전한 노동 환경을 고민하는 것은 그야말로 리스크를 떠안는 일이 된다. 관리자, 선생님, 장학사는 전부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돌이켜보면 소희를 그토록 압박했던 것도 책임의 사슬이다. 이 체계 안에서는 너무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만큼 문제가 된다. 기대치가 높아지면 그에 맞춰 업무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우리 팀 실적이 떨어지고, 후배들 앞길이 막히고, 동료들이 허덕인다. 괴로움을 호소하는 소희에게 어른들은 그건 네 자발적 선택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 명의 현장실습생에게 이 고리를 끊을 힘이 있기나 한 걸까? <다음 소희>는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현실적이지 못한지 끝내 보여주고야 만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제목은 희망보다 절망과 더 가깝게 들린다. ‘다음’이 더 나은 미래가 아니라 그저 다른 피해자를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다만 영화는 체념하지 않는다. <다음 소희>는 유진을 통해 제대로 보고 들으려는 노력이 내일의 비극을 막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다음’의 뉘앙스를 정하는 것은 우리 몫이라고 이야기한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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