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시대다. 무슨 분야든 1인 제작, 배포가 손쉬워지면서 다양한 작품이 등장했고, 그만큼 그동안 분류하던 장르만으로는 작품의 세세한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요즘에는 서브장르(하위장르)보다 더 세세한 특징을 잡아낼 수 있는 '마이크로장르'로도 작품을 분류하곤 한다. 이번에는 근 몇 년 간 영화계나 문화계를 홀리고 있는 마이크로장르를 소개한다.
리미널 스페이스
유튜브를 좀 챙겨본다면, <백룸>이란 단편 영화를 한 번쯤 만났을 것이다. 사실 '백룸'이란 제목의 단편은 꽤 있는 편인데, 현재 가장 유명한 작품은 케인 픽셀즈(Kane Pixels)가 연출한 9분짜리 파운드 푸티지다. 이 영상은 영상을 촬영하던 한 남자가 넘어지면서 미지의 공간에 떨어지고, 출구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담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오는 공포감을 포착한 이 작품, 이런 유의 장르는 '리미널 스페이스'라고 한다.
리미널 스페이스란 단어는 실제 학술용어로 사용되는 단어다. 간단히 설명하면 두 가지 공간이 공존하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한 사회에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며 일어나는 문화적 공존, 혹은 공간과 공간 사이의 경계 모두를 뜻한다. 이 '리미널 스페이스'가 공포 장르에 와선 현실적인 듯, 그렇지만 현실이 아닌 친근한 공간에서 오는 공포감을 자극한 작품을 이르는 말로 자리 잡았다. 넓은 공간으로는 고요함 속에서 오는 고독함과 미지의 공포를, 좁은 복도로는 폐쇄적인 공간에서의 공포를 자극할 수 있어서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케인 픽셀즈가 이 장르의 창시자는 아니고, 이전에도 공포 팬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사용되는 기법이었으나 그가 가장 적확하게 이 장르의 특징을 영상에 담아 장르 대표를 맡게 됐다. 그는 <백룸>을 기반으로 여러 단편을 내놓으며 일종의 유니버스를 주조하고 있다. 그래서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다소 어려운 이름 대신 '백룸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동안 <유전> <잇 컴스 앳 나이트> <더 위치> 등 독창적인 공포 영화를 선사한 제작배급사 A24가 케인 픽셀즈의 <백룸> 장편화를 발표했다. 유튜브 영상의 강렬함을 어떻게 장편으로 옮길 수 있을지, 그리고 이 장르의 대중적인 부흥이 도래할지 궁금하다.
크리피파스타
어느 시대든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괴담이 있다. 홍콩 할매라던가 빨간 마스크 등이 그런 '도시전설'의 대표 사례다. 인터넷에선 의도적으로, 아니면 기억의 착각으로 올린 글이 꽤 그럴싸한 괴담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례들을 이제는 (구전으로 퍼지는) 도시전설과 구분하고자 '크리피파스타'라고 부른다.
크리피파스타는 인터넷을 하는 세대에겐 익숙한 이름이 많다. 가장 유명한 건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진 '슬렌더맨'. 슬렌더맨은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에 정장을 입긴 장신의 깡마른 남자인데, 어린아이를 납치하거나 해를 가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해외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진과 여러 가지 목격담이 올라오며 오래된 도시전설처럼 전해졌지만, 실상은 그 게시물이 곧 괴담의 시발점이었던 것. 위에 소개한 리미널 스페이스 '백룸' 또한 크리피파스타에서 영상화된 것.
이런 창작물 외에도 특정 작품에 대한 괴담도 크리피파스타로 분류된다. 예를 들면 미키 마우스 애니메이션 중 자살을 묘사한 에피소드가 있다던가 헬로 키티가 입을 만들기 위해 폭력적인 행동을 한다던가 하는 식이다. 이런 괴담의 대다수는 크리피파스타인데, 누군가가 쓴 글을 보고 팬메이드 영상이 나오기도 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서운 리미널 스페이스와 달리 크리피파스타는 폭력과 유혈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 마니아들만이 즐기는 장르긴 하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인기에 비해 주류 매체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슬렌더맨'처럼 대중적으로 유명한 소재도 있어 장르 정도는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카세트 퓨처리즘
아무래도 공포 장르의 소재가 워낙 다양해서 서브장르나 마이크로장르가 다양한 편이다. 하지만 공포 못지않게 다양한 장르가 있으니 SF다. '과학 픽션'이란 장르명부터 워낙 폭넓으니 서브장르도 굉장히 많은 편인데, 그 서브장르에 따라 분위기가 천차만별인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가장 유명한 SF 서브장르들이라면 00펑크일 것이다. 스팀펑크, 디젤펑크, 사이버펑크 등등. 이 '펑크' 앞에 붙는 이름이 그 미래가 어떤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발전했는가를 의미한다. 스팀펑크는 외연기관, 디젤펑크는 내연기관, 사이버펑크는 사이버스페이스 기반으로 발전한 사회상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런 와중에 최근 대두된 SF 서브장르가 있는데, '카세트 퓨처리즘'이다. 이 카세트 퓨처리즘은 (이름에서 암시하듯) 카세트 테이프가 유행한 80년대 기술을 기반으로 발전한 미래상이다. 카세트 테이프가 모든 것을 저장하는 장치로 사용되던 시기여서 '카세트'가 앞에 붙은 것. 다른 서브장르에 비하면 가까운 과거가 배경이라서 레트로한 느낌을 많이 주고, 그래서 레트로 SF처럼 친숙한 표현으로 더 많이 불리곤 한다.
카세트 퓨처리즘은 낯선 용어에 비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다름 아닌 1980년대 전후로 한 SF 영화들이 카세트 퓨처리즘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 아무래도 CG 효과가 보급화되기 전엔 아날로그 특수효과로 SF 영화를 만들었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1980년대 특유의 분위기가 담긴 SF 영화가 많이 나오게 된 것. 예를 들면 <블레이드 러너>가 사이버펑크의 대명사이지만 디자인과 기술 묘사에선 카세트 퓨처리즘이고, <에이리언>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디스플레이나 컴퓨터 묘사에선 카세트 퓨처리즘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사실 여기서 좀 더 폭넓게 보면, 카세트 퓨처리즘도 레트로 퓨처리즘의 서브장르다. 레트로 퓨처리즘은 스팀펑크, 디젤펑크, 카세트 퓨처리즘, 그리고 50년대 냉전시대의 배경이나 디자인을 반영한 아톰펑크(핵융합 관련 기술 발전)까지 전체적으로 아우른다. 이 네 가지가 대표적이고 그 외에 다양한 '과거 기술/디자인 기반' SF 전체를 통칭한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