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마을을 기억하는가?

‘영화 마을’을 기억하는가? 부엉이가 나뭇가지에 앉은 마스코트와 함께,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비디오 산업을 주름잡았던 프랜차이즈 대여점이다. 블루레이와 OTT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제는 종로와 동묘 시장에서 간신히 VHS 비디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여전히 일본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는 소규모 블루레이 대여점이 몇 군데 존재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다. 애당초 블루레이를 수집하는 영화광들이 매우 적다. LP를 모으는 힙스터들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여 최근에는 CD 산업 수준의 규모를 회복한 것과 달리, VHS 비디오는 완벽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블루레이 시장 역시 하락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난데없이 VHS 비디오와 블루레이에 대한 언급은 왜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제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발돋움한 봉준호 감독이 프랑스의 온라인 저널 “Konbini”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5만 편가량을 소장 중인 프랑스의 유명 블루레이 판매점 “JM Video”에 찾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Konbini”에서 진행하는 영화 토크쇼의 일환인 ‘Video Club’ 콘텐츠는 M.나이트 샤말란, 브래드 피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브루노 뒤몽, 에드워드 노튼 등 세계 각국의 유명 영화인들을 블루레이 판매점으로 초대하여 그들의 영화 세계를 공유한다. 그중 지난 3월 “Konbini”의 비디오 클럽 콘텐츠에 참여한 봉준호 감독 편이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6,000편가량의 블루레이를 소장하고 있어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집광이자 씨네필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의 컬렉션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 그의 선택은 고전, 애니메이션, 실험영화, 예술영화, 국내영화, 할리우드 영화 등 여러 방면의 영화를 고루 다루면서도 동시에 그 깊이를 잃지 않았다. 약 70편가량의 작품을 언급한 봉준호의 선택이 궁금하다면 지금부터 이 기사를 통해 확인하시길!


지금의 봉준호를 있게 만든 영화!

영화 <공포의 보수>

봉준호는 과거 인터뷰에서부터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만큼 자주 언급하는 프랑스 감독이 있다. 바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그의 대표작인 <공포의 보수>(1953)는 윌리엄 프리드킨이 1977년 <소서러>로 리메이크하여 익히 잘 알려진 작품이다. 돈을 벌기 위해 죽음의 길을 향해 곡예비행을 하는 4명의 트럭 운전사의 이야기를 다룬 <공포의 보수>에 대해 봉준호는 “어린 시절 화장실을 참으면서 영화를 볼 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영화였다”라고 밝혔다. 그는 어린 시절 주말마다 방영한 해외 명작 영화 방송을 통해, 앙리 조르주 클루조를 비롯하여 장 르누아르,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봉준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김기영의 <하녀>

봉준호는 루치노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1)을 들고선 지난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 투표에 대한 이유를 덧붙였다. 베르너 헤어조그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5), <그리즐리 맨>(2005) 등을 소개하며 텔루라이드 영화제에서 그를 마주친 이야기를 풀기도 했다. 언제나 그의 영화적 자산이라고 표현하는 김기영의 이야기는 빼놓지 않았다. 그를 스페인의 거장 루이스 부뉴엘에게 빗대며, ‘어떻게 군사독재 시절 충격적인 에너지를 지닌 작품을 만들었는지 놀랍다’라고 고백했다. 김기영의 걸작 <하녀>(1960)를 비롯한 <이어도>(1977)를 제작진에게 추천했다. 더불어 봉준호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1982)와 <돼지와 군함>(1961), <붉은 살의>(1964) 등을 언급하면서, 엄청난 거장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블루레이를 수집하기 어렵다는 고충을 토로했다.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에 대해서는 대학교 때 그의 영화를 보며 공부했다고 밝히며, 아시아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추앙했다.

<괴물>

<괴물>(2006)을 만들 당시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항상 꼽는 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 1982)과 존 부어만의 <서바이벌 게임>(1972),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1979)와 같은 작품에 대한 언급 역시 잊지 않았다. <괴물>의 크리처물이 뻔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시작 12분 만에 벌건 대낮 한강에서 괴물의 전신을 보여주는 연출을 택하게 되었다며 그의 제작 비하인드를 소개했다. 실험 영화 섹션에 도착한 봉준호는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감독의 <포르티니/카니>(1976), 요나스 메카스의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2000)>를 가리키며 구하기 어려운 블루레이를 구했다며, 대학생 시절 스트라우브와 메카스의 영화를 자주 보았다고 했다.


그와 동시대를 보내는 감독들의 영화!

영화 <조디악>

‘Video Club’ 콘텐츠가 시작하자마자 봉준호가 손에 집어 든 작품은 그가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와 함께 옴니버스로 참여한 2008년 영화 <도쿄!>였다. 그는 노아 바움백의 오스카 레이스에 함께했던 <결혼 이야기>(2019)를 들고선 ‘훌륭한 각본가’라고 평하곤,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2007)을 꺼내어 ‘친분은 없지만 상의할 거리를 위해 그의 사무실에 들렀다. 먼지 한 톨 없고,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던 그의 책상이 기억에 남는다’라며 단 한 번 핀처를 만났던 일화를 공개했다. 핀처의 완벽을 추구하는 연출 스타일처럼 그가 상당한 완벽주의자임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마인드 헌터>

TV 시리즈 섹션에 도착한 봉준호는 아담 맥케이 감독이 각본으로 참여한, 새롭게 준비 중인 <기생충> TV 시리즈 버전의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 데이빗 핀처의 <마인드 헌터>와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를 가장 좋아하는 TV 시리즈로 꼽은 그는 ‘시리즈물을 잘 보지 못한다. 2화 이상 넘기기가 어렵다’라고 털어놓으며,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6부작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을 보고 ‘나는 시리즈를 촬영하면 얼마 못 가 잘릴지도 모른다’라고 농담을 던졌다.

<큐어>

그는 자신과 동시대를 경유하고 있는 동아시아 감독들에 대한 찬사 역시 잊지 않았다. 해외에서 봉준호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을 거론하며 20년이 지난 지금도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창동 감독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에는 <밀양>(2007)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다.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을 발견하고는 매우 반가워하며, 전에 없던 독특한 에너지를 지닌다고 평했다. 최근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홍상수의 최근작 <인트로덕션>(2021), <소설가의 영화>(2022), <탑>(2022) 등을 매우 좋아한다고 밝혔다. 그가 <살인의 추억>(2003)을 제작할 당시 많은 영감을 받았던 구로사와 기요시의 명작 <큐어>(1997)를 두고는 ‘살인마는 취재할 수가 없기에, <큐어>에 등장하는 범인의 모습을 떠올렸다’라고 밝혔다.


봉준호가 바라보는 영화의 미래

<레벤느망>

봉준호가 <도쿄!>와 <공포의 보수>를 집어 든 후, 그는 아주 반가운 얼굴로 두 감독의 작품을 손에 쥐었다. 그가 2021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을 할 당시 황금사자상의 영예를 선사한 오드리 디완 감독의 <레벤느망>(2021)과 <기생충>의 칸 입성 당시 그가 발견한 신인 감독 마티 디옵의 <애틀란틱스>(2019)였다. 그 이후로도 그는 젊은 감독들의 영화들을 소환하여 그들의 영화 세계를 응원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셀린 시아마를 두고는 ‘프랑스 감독인데 미국에서만 만났다. <기생충>의 오스카 캠페인 당시 자주 마주쳤다’라며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행복한 라짜로>

그가 「사이트 앤 사운드」 투표에서 꼽은 가장 의외의 선택이 있다면 이탈리아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의 <행복한 라짜로>(2018)다. 봉준호는 2011년 칸에서 심사위원으로 있을 당시 알리체 로르와커의 데뷔작 <천상의 육체>(2011)를 보았다고 밝히며 그 작품의 블루레이를 꼭 갖고 싶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그가 강력하게 지지하는 감독 중 하나인 미국의 켈리 레이카트의 <웬디와 루시>(2008)를 고르며 강아지와 미셸 윌리엄스의 트래킹 숏이 아름답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작년에 개봉한 국내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2022)를 선택하면서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때가 되었다>

원하는 블루레이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제작진의 말에 ‘감당할 수 있겠어?'라는 농담을 치며 한 줄을 전부 가져가려는 시늉을 한 봉준호는 단 한 장의 블루레이만을 가져갔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노바디즈 히어로>(2022)로 많은 관객의 호평을 받았던 프랑스 감독 알랭 기로디의 2006년 작 <때가 되었다>를 선택했다. 봉준호의 최근작이 블랙 코미디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프랑스에서 가장 짙은 농도의 블랙 코미디를 다루는 알랭 기로디 영화를 택한 점은 그의 향후 영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징표가 아닐까.

이런 표정으로 농담하는 봉준호 감독의 다음 작품도 기대하자.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