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생맥주로 마시면 잔 밑에서부터 거품이 잘게 올라오는 흑맥주 기네스. 토닉과 함께 시원한 하이볼로 마시면 제맛인 아이리시 위스키 제임슨.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시무스 히니와 버나드 쇼까지 대문호들의 나라. 혹은 “With or Without You”를 부르던 평화의 상징 밴드 U2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펍 문화의 발달로 매일 술과 함께 여흥을 즐기는 나라지만, 아일랜드는 어떤 나라보다도 괜찮은 예술을 만들 줄 아는 곳이다.
이제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예술성에 영화라는 항목도 포함할 차례다. 물론 단순히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만든 타국의 영화 중에도 훌륭한 작품이 많다. 가령 2015년 아카데미 레이스에서 작품상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 존 크로울리 감독의 <브루클린>(2015),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을 다루며 마이클 패스벤더의 최고작 중 하나인 스티브 맥퀸의 <헝거>(2008), 켄 로치에게 첫 번째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던 아일랜드 독립전쟁 시기를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1969년대 북아일랜드 분쟁을 다루며 아카데미 여러 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케네스 브래너의 <벨파스트>(2021)까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서 오랜 기간 발생한 역사적 분쟁은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감독들이 흥미를 느낀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기사에서는 오로지 ‘아일랜드’ 출신 감독들이 만든 영화를 다루려고 한다. 아일랜드에도 멋지고 쿨한 감독들이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알았으면 하니깐.
마틴 맥도나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는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아일랜드 출신 노동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으며 아일랜드 이중 국적을 갖고 있다. 영국 악센트를 사용하고 있지만, 인터뷰에서 종종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밝힌 마틴 맥도나가 드디어 자신의 조국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바로 지난해 골든 글러브와 베니스 영화제 등을 휩쓸었던 화제작 <이니셰린의 밴시>(2022)다. 아일랜드의 외딴 섬마을 이니셰린에 사는 절친인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단 글리슨)은 어느 날 절교를 하게 된다. 콜름은 지루하고 지겨운 이 마을과 파우릭이 싫어졌다면서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려 하고, 파우릭은 콜름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한다. 그와 절교하고 유명한 바이올린 작곡가가 되려 하는 콜름은 자신에게 말을 걸면 손가락을 잘라 던지겠다고 파우릭에게 경고한다. 한편 파우릭의 동생 시오반은 학자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나고, 파우릭은 홀로 남아 콜름과의 관계를 되짚어 본다.
언뜻 바보 같은 한량 파우릭과 지식인을 자처하는 콜름, 두 남자 사이의 우정과 관련한 작은 소동처럼 보이는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사실 가슴 아픈 아일랜드 역사를 경유하고 있다. 관객들이 두 친구의 관계에 집중하는 사이에도 아일랜드 본토에서 떨어진 외딴섬 이니셰린의 하늘에는 포탄과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 속 이니셰린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적 배경만큼은 확실한데, 1920년대 초반이라는 점이다. 본토에서 울리는 총성과 포탄은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두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서로 총구를 겨눈 아일랜드 내전으로부터 비롯된 소리다. 같은 피를 나눈 한 민족이 어느 순간 다른 뜻을 품고 서로를 증오하며 죽이려 든다. 내전의 영향이 닿지 않는 이니셰린에서도 두 천치 같은 친구가 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 말 한마디만 걸면 손가락을 자르려 들고, 분노한 친구는 그를 죽이려 덤빈다. 사소하게만 보이던 두 남성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일랜드의 뼈아픈 역사를 발견한다. 마틴 맥도나의 신들린 각본은 조국의 역사적 비극을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존 카니 <싱 스트리트>
2000년대 후반 이후 어쿠스틱 기타를 사면 무조건 한 번쯤은 부른 노래 ‘Falling Slowly’는 음악만큼이나 유명한 영화 <원스>의 주제가다. 13만 유로(약 14만 달러)라는 저예산으로 2000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거둔 최대의 히트작 <원스>의 감독 존 카니 역시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이다. 2014년 미국으로 가서 만든 <비긴 어게인>으로 다시 한번 메가 히트를 달성한 그가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와 연출한 영화가 <싱 스트리트>(2016). 가세가 기울어 ‘싱 스트리트 크리스천 브라더스 스쿨’이라는 똥통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코너’(페리다 윌시-필로). 그는 학교 맞은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소녀 ‘라피나’(루시 보인턴)에게 잘 보이려고 밴드를 하고 있단 거짓말을 하고 만다. 급하게 거짓말을 수습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밴드 멤버를 모집한 코너는 어설픈 실력으로 당시 유명곡들을 차근차근 커버하기 시작한다. ‘라피나’를 뮤직비디오에 출연시켜 환심을 사려던 코너의 계획은 어찌어찌 잘 흘러가고 있는 듯하지만, 라피나는 며칠 뒤 남자친구와 함께 런던으로 떠나겠다는 말을 남긴다.
<싱 스트리트>는 <원스>, <비긴 어게인> 등 음악 영화를 주로 다루는 존 카니의 작품세계에서 ‘회상’이라는 축을 담당하고 있다. 코너의 첫 등교 장면에서 흐르는 모터헤드의 ‘Stay Clean’, 가족들과 저녁에 둘러앉아 TV를 보면서 나오는 듀란 듀란의 ‘Rio’, 라피나를 만나는 장면에서 한 소절 등장하는 아-하의 ‘Take on Me’, 밑층에서는 부부싸움이 펼쳐지지만, 삼남매가 모여 앉아 부르는 대릴 홀 앤 존 오츠의 ‘Maneater’까지. <싱 스트리트>는 그야말로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신스팝과 뉴웨이브 시대에 대한 짙은 향수가 가득하다. 음악 하나만으로도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존 카니는 <싱 스트리트>를 통해 자신의 유년기를 대표하는 1980년대를 다시 소환한다. 어쩌면 허풍 가득한 소년 코너는 존 카니의 어린 시절을 닮았을지도. <싱 스트리트>의 배경이 되었던 아일랜드 더블린의 풍경을 보고 있자면, 한 번쯤 아일랜드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물론 헤드폰 너머로 들리는 음악은 모터헤드에 ‘Stay Clean’으로.
짐 쉐리단 <나의 왼발>
아일랜드 영화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작품은 바로 짐 쉐리단의 <나의 왼발>(1989)부터가 아닐까?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작품도 바로 이때부터다. <나의 왼발>은 뇌성마비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왼발을 제외하고 전신이 마비된 중증 장애가 있는 실존 인물 크리스티 브라운의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다. 아일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를 헌신적으로 아낀 어머니의 도움과 의사 아일린,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의 도움으로 그는 왼발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로 자서전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엄청난 고통 속에 자살 시도까지 했던 크리스티의 삶을 조명하며, 끝내 삶의 역경을 이겨낸 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었다.
<나의 왼발>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왼발만을 쓸 수 있는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크리스티 브라운을 연기했다.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메소드 연기’를 <나의 왼발>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32세의 나이에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짐 쉐리단의 영화 커리어의 정점이기도 했던 <나의 왼발>은 끝내 붙잡게 되는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그를 응원하는 가족애를 그리고 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보아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발끝에서 일어나는 자그마한 감정들과 감각은 어떤 연기자도 소화하지 못할 어떤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콤 베어리드 <말없는 소녀>
앞선 영화들과는 낯선 이름이 등장했다. 콤 베어리드 감독(바이레드, 바이레이드 등 표기가 다소 중구난방하기에 배급사 표기에 맞췄다)의 <말없는 소녀>(2021)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줄곧 다큐멘터리 영화와 TV 영화 연출을 맡았던 콤 베어리드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인 <말없는 소녀>는 그의 다큐멘터리 연출 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가난하고 위태로운 가정에서 살던 어린 소녀 코오트(캐서린 클린치)는 유달리 정적이고 조용한 아이다. 엄마아빠가 새로운 아이를 출산하면서 먼 친척 부부 이블린(캐리 크로울리)과 숀(앤드류 베넷)에게 방학 동안 맡겨진 코오트는 낯선 환경 속에서 따스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목장을 운영하는 두 부부의 삶은 단출하고 정적이다. 간혹 포커를 치러 온 동네 주민과 모금하러 온 교장이 이들의 집을 방문하지만, 세 사람의 일상은 식사와 노동이 전부다. 시간이 지나고 코오트는 다시 위태로운 집으로 돌아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원작으로 한 영화 <말없는 소녀>는 제목처럼 정적이다. 소녀는 도통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가족을 포함한 모두에게 경계심을 지닌다. 그녀의 위태한 가정은 더욱 소녀를 불안하게 만든다. 낯선 친척의 집에서도 소녀는 여전히 최소한의 대화만을 나누며 거리를 두려 하지만, 따뜻하게 맘을 여는 두 부부의 모습에서 점차 마음을 열게 된다. 단순한 삶이지만, 두 부부의 모습에는 애정과 관심이 세밀하게 어려있다. <플레이그라운드>(2022) 혹은 <클로즈>(2023)처럼 최근 아동을 다루는 작품들과 달리 <말없는 소녀>는 극한의 상황으로 아이를 몰지 않는다. 물론 위태한 가정의 모습이라는 위험이 그녀의 바깥세상에 도사리고 있지만, 영화는 이블린과 숀의 안전한 목장 안에서 소녀가 성장할 시간을 충분히 준다. 영화가 아이의 성장을 품어내는 방식. 어쩌면 <말없는 소녀>의 따스함은 영화의 태도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모진 세상에 아이를 던지는 것만이 영화가 그들의 삶을 고발하는 방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