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멘탈>

울상 짓는 한국 극장가에 의외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이 있다. 바로 <엘리멘탈>이다. 6월 14일 개봉한 <엘리멘탈>은 당시 같이 개봉한 <플래시>, 전주에 개봉한 <트랜스포머>, 한국영화계의 희망 <범죄도시 3> 등에 밀려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개봉주 내내 2~4위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엘리멘탈>은 북미 현지에서도 힘을 쓰지 못하며 금방 극장가에서 물러날 듯 보였다. 하지만 꾸준히 입소문을 내며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1위를 놓치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멘탈>이 한국에서 특히 갑작스러운 역주행을 시작한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마도 한국계 미국인 피터 손 감독이 부모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한국적 정서를 잘 녹여낸 것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피터 손 감독은 연출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작품에서 목소리 연기로 활약한 바, 오늘은 피터 손 감독의 '배우' 연대기를 준비했다.


벌써 20년차 베테랑 피터 손

<굿 다이노>, <엘리멘탈> 개봉 당시 내한한 피터 손

연출 데뷔작 <굿 다이노>, 그리고 이번 신작 <엘리멘탈> 개봉 당시 한국을 찾은 피터 손 감독은 특유의 순둥한 이미지와 (서양인들이 자주 놀라곤 하는) 동양인의 동안 유전자 덕에 '신예 감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2000년에 픽사에 입사한, 그러니까 애니메이션계에서 20년 넘게 활동한 베테랑 중 한 명이다. 감독으로선 이제 두 번째 작품이긴 하나 픽사 입사 전에도 1999년 <아이언 자이언트>의 참여하는 등 경력이 상당하다. 특이한 경력을 하나 더 소개하자면, <벼랑 위의 포뇨> 영어 더빙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는 것. 아마 이제부터 소개할 그의 목소리 연기 실력과, 동양인 정서에 대한 이해도로 발탁된 것이 아닐까 싶다.


<라따뚜이> 에밀

<라따뚜이> 에밀. 피터 손 목소리 연기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부흥기를 연 <라따뚜이>. 요리의 재미와 음식의 맛을 알게 된 쥐 레미가 요리사로선 재능이 전혀 없는 인간 알베르토 링귀니를 만나 합심한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으로 픽사의 독특한 상상과 섬세한 스토리텔링을 한껏 드러났다. 피터 손 감독은 레미의 형 에밀을 맡았다. 에밀은 레미와는 달리 쥐의 '본능'에 충실해서 그냥 먹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맛 타령하는 동생이 재수 없을 법도 한데, 그럼에도 동생을 아끼는 마음으로 그를 틈틈이 도와주곤 한다. 피터 손은 이 작품을 비롯해, 에밀이 등장하는 단편이나 게임의 목소리도 모조리 담당했다. 또 <라따뚜이> 본편의 애니메이터로도 참여했다. 씨네플레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최애하는 캐릭터로 에밀로 뽑았다.

<라따뚜이>를 연출한 브래드 버드 감독(왼쪽)과 피터 손


<몬스터 대학교> 스퀴시

<몬스터 대학교> 스퀴시.

단편 <조지와 A.J.>(George and A.J.)의 러셀(<업>의 보이스카웃 러셀로 본편은 조던 나가이가 연기했다), <작은 버즈 라이트이어>의 쓰레기통 등 몇 편의 단편을 작업하고 장편으로 복귀(?)한 작품은 <몬스터 대학교>이다. <몬스터 주식회사> 주인공 설리와 마이크의 대학 시절을 그린 영화는 서로 앙숙이었던 두 친구가 어떻게 단짝이 됐는지 보여주는데, 그들의 주변 친구들 또한 범상치 않다. 만학도, 마마보이, 히피, 샴쌍둥이 등등 모두 특색이 넘치는 괴물들이다. 이중 피터 손이 맡은 건 마마보이 스퀴시. 인간에게 공포를 줘야 인정받는 몬스터 세계에서, 이처럼 순박한 애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둥이다. 그러다가 또 은근 반전 매력을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남긴다. 눈 많은 걸 빼면 동글동글한 외형이 귀여운 편이어서 <몬스터 대학교> 캐릭터 중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에밀과 마찬가지로 이후 나오는 게임이나 단편의 스퀴시도 모두 전담했다.


<굿 다이노> 포레스트 우드부시

피터 손이 연기한 포레스트 우드부시(오른쪽). 표정부터 범상치 않다.

연출 데뷔작 <굿 다이노>에서도 피터 손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수많은 동물들을 데리고 다니는 포레스트 우드부시다. 스티라코사우루스 종으로 새부터 작은 야생 동물까지 수많은 동물들이 그의 뿔에 얹어 살고 있다. 그가 키운다고 하기엔 정작 본인은 뭐에 홀린 것처럼 행동하곤 해서 다소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 극에서도 인간 스팟을 데려가려다가 알로 때문에 실패한다. 피터 손의 다른 캐릭터들이 순진하거나 맹한 성격이었던 것과 달리 포레스트 우드부시는 느릿한 말투부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억양까지 다소 공포스러운 느낌마저 주는 편. 어쩌면 피터 손 본인이 독특한 캐릭터를 한 번쯤 해보고 싶어서 자신의 연출작에서 도전해 본 건 아닐까 싶을 정도.


<루카> 치초

매번 이렇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에르콜레를 무척 따르는 치초.

픽사 스튜디오의 전전작 <루카>는 뭍에 올라오면 인간이 되는 심해 바다괴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육지를 동경하는 루카와 그런 그를 인간 세상으로 인도한 친구 알베르토, 그리고 두 사람이 처음으로 친해진 인간 줄리아. 이 세 사람은 지역에서 열리는 자전거 대회 '포르토로소 컵'의 챔피언 에르콜레와 대결하게 되면서 우정을 쌓는다. 피터 손은 에르콜레를 보좌하는 캐릭터 중 치초를 맡았다. 귀도와 함께 에르콜레를 돕는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를 동경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굳이 따지자면 대사보다는 슬랩스틱으로 극에 코미디를 보여주는 캐릭터라 비중은 앞선 캐릭터들보다 덜하지만, 피터 손인걸 알고 들으면 감탄사나 짤막한 대사 같은 것에 괜히 웃음이 터진다.


<버즈 라이트이어> 삭스

<버즈 라이트이어> 최고 신스틸러 삭스. 영화를 보면 스틸컷만 봐도 목소리가 들린다.

피터 손의 연기 커리어 끝판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삭스다. <버즈 라이트이어>는 우주비행사 버즈가 우주 비행 도중 사고를 겪고 간신히 귀환하지만, 이미 먼 미래가 된 지구에서 마주하게 된 모험을 그린다. 피터 손이 연기한 삭스는 오랜만에 지구에 귀환한 버즈의 적응을 돕기 위한 정서 안정용 로봇으로 귀여운 '치즈냥이' 모습을 하고 있다. 로봇이란 설정에 맞게 일정한 톤으로 대사하는 피터 손의 연기 또한 일품이다. 사실 다른 작품이야 관람한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피터 손의 연기력이 궁금하다면 <버즈 라이트이어>를 꼭 보길 바란다. 삭스라는 귀염둥이에 푹 빠져들고 말 테니까.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강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사진)에선 대사가 없었던 강케

피터 손의 출연작은 픽사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엘리멘탈>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피터 손의 목소리를 잠깐이나마 들을 수 있다. 그는 마일스 모랄레스의 룸메이트 '강케' 역을 맡았다. 극 대부분이 스파이더버스에서 진행되는 작품이라 비중이 큰 건 아니지만 초반부에 마일스와 대화를 주고받는 '만담' 같은 장면이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