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라는 말만큼 작금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집안일을 잘하고 자녀를 잘 양육하며 남편을 편하게 도와주는 내조의 여왕이라니. 김남주와 오지호가 출연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내조의 여왕>도 벌써 14년 전 이야기다. 지난 주 개봉한 그레타 거윅의 <바비>부터 7월 12일 개봉한 <슬기로운 아내 수업>까지 극장가는 이제 수동적인 여성상을 향해 통쾌한 업어치기 한판승을 거두려는 영화들로 가득하다. 구시대의 억압을 깨며 다시 여성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4편의 영화를 지금부터 만나보자.


<슬기로운 아내 수업>(2023) dir. 마르탱 프로보스트

1960년대 프랑스는 혼돈 그 자체였다. 파리의 한 편에서는 1968년 유럽의 젊은이들을 뒤흔든 68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고, 반대편에서는 샤롤 드골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도 프랑스에는 약 1,000개 정도의 주부 교육 기관이 존재했다. ‘아내 학교’의 목표는 어린 소녀들에게 걸레질, 정원 가꾸기, 요리, 바느질 등 가사 노동을 충실히 잘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것. 그들은 헌신적이고 성실한 아내가 된다면 남편에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화 <슬기로운 아내 수업>의 현모양처 양성학교의 선생이자 교장 로베르(프랑수아 브렐레앙)의 아내인 폴레트(줄리엣 비노쉬)는 점점 줄어드는 학생 수에 골머리를 앓는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아내 학교로 학생을 보내는 가정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고, 어린 소녀들의 계몽된 인식은 좀처럼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마침 폴레트의 남편 로베르는 토끼 스튜를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려 죽게 되고, 폴레트는 홀로 학교를 운영해야 하는 위기에 봉착한다. 게다가 남편이 남긴 도박 빚은 학교를 파산 위기로 내모는데.

<슬기로운 아내 수업>은 <더 미드와이프>(2017), <세라핀>(2008) 등 여성 서사의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마르탱 프로보스트의 신작으로 지난 7월 12일 국내에 개봉한 작품이다. 프랑스 영화의 아이콘인 줄리엣 비노쉬를 비롯하여 노에미 르보브스키, 프랑수아 벨레앙 등 다양한 배우들이 등장하며 2021년 세자르 시상식에서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영화의 배경은 혁명의 전조가 흐르던 1967년의 프랑스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성은 금기이며, 사랑은 사치고,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은 족쇄처럼 다가왔다. 늙은 농장주에게 어린 소녀가 매매혼을 당할 위험에 처하고, 습관처럼 하는 남편과의 관계가 지루했으며, 차 따르는 법조차 지적당해야 하는 시대적 풍경이 영화 속에 여실히 드러난다.

<슬기로운 아내 수업>이 이 체제를 뒤집는 방식은 간단하고 강렬하다. 가정에 헌신하는 남자 앙드레(에두아르 바에르)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고, 학생들은 연대를 선언하며, 기존의 교육 방식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들은 68년의 3월 파리로 향한다. 그들의 몸을 실던 버스도 버린 채 ‘아내 7계명’을 뒤집은 새로운 여성을 향한 7계명을 선포한다. 혁명의 소용돌이 안에 여성의 인권 운동도 함께한다는 선언적인 장면과 함께.


<현모양처>(2010) dir. 프랑수아 오종

<슬기로운 아내 수업>을 보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줄리엣 비노쉬보다 더 프랑스 영화계에서 전설적인 존재인 카트린 드뇌브가 주연으로 출연한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현모양처>다. 프랑수아 오종의 중기작인 <현모양처>는 잘나가는 우산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 로베르 퓨졸(파브리스 루치니)를 남편으로 둔 수잔(카트린 드뇌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수잔은 내조와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힘쓰던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하지만 로베르의 독재적인 경영 방식에 노조가 파업을 결심하고, 로베르를 인질로 잡아버린다. 얼떨결에 로베르를 대신하여 공장의 경영주가 된 수잔은 정상화를 위해 그녀만의 리더십으로 공장을 이끈다. 탁월하고 인간적인 경영 덕분에 두터운 신망을 얻었지만, 남편 로베르는 회사의 경영권을 되찾기 위해 뒤에서 수작을 부리기 시작한다.

프랑수아 오종의 <현모양처>는 최근 오종 영화와는 꽤 거리가 먼 작품이다. 근작들과 달리 가볍고 유쾌한 톤을 유지한다. 로베르의 공장이 우산 공장이라는 점은 카트린 드뇌브의 대표작 <쉘부르의 우산>(1964)를 연상하게 만들지 않는가?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2018)처럼 여전히 급진적이고 명징하게 사회의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수잔은 사장직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편지를 쓸 때면, 아직도 “저는 단지 여성일 뿐이지만”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런 제약 속에서도 <현모양처>는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수잔을 데리고 가려 한다. 마치 탈 가부장제라는 역사적 순간은 비가역적이라고 선언하듯 말이다. 더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으로부터 작별을 고하는 영화의 태도는 해방감 그 이상의 통렬함을 준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1992) dir. 존 애브넷

역사의 흐름으로 향하는 <슬기로운 아내 수업>과 해방감을 만끽하는 <현모양처>를 지나고 나면, 50년대와 80년대라는 30년의 세월을 연결하려는 존 애브넷 감독의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만날 수 있다. 패니 플래그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홀대받는 중년 여성 에블린(케시 베이츠)은 시어머니의 요양 병원에서 말동무가 필요해 보이는 80세의 노파 니니(제시카 탠디)를 만나 그녀의 시누이인 잇지(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잇지는 사랑하던 오빠 버디를 기차 사고로 떠나보낸 뒤, 그녀와 친했던 버디의 연인 루스(메리-루이스 파커)마저 결혼 후 조지아주로 떠난다. 하지만 루스는 남편에게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하루를 보냈고, 잇지는 그녀를 다시 고향으로 데리고 와 간이역 카페를 함께 운영하기로 한다.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던 중 그녀의 남편은 아이를 데려가겠다며 총을 들고 밤 중에 마을로 향했고, 그날 밤 이후로 남편은 사라져 버렸다.

빨갛게 익지 않은 토마토를 밀가루, 계란, 빵가루를 입혀 기름에 자작하게 튀기는 음식인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미국 남부의 대표적인 소울 푸드 중 하나다. 차별과 폭력이 만연했던 1950년대의 미국 남부에서 잇지와 루스 두 여성은 평화로운 공동체를 구성해 나갔다. 아직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시절에도 그녀는 자신과 함께 일해 온 빅 조지(스탠 쇼)와 시프시(시설리 타이슨)을 위해 모든 것을 베풀었으며, 알콜 중독자와 다른 여성들도 그녀의 간이역 카페인 휘슬 카페의 일원이었다. 루스의 아들은 그의 옛 연인 버디처럼 기차 사고를 당하면서 오른팔을 잃는다. 그럼에도 마을 공동체는 따스한 마음으로 유쾌하게 오른팔의 장례를 치르고, 아이가 장성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가정 폭력을 휘두른 남편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그의 행방은 알 필요가 없다. 영화는 그의 실종 혹은 죽음에 관심이 없다. 그저 여성들이 구축한 안정적인 공동체 안에서 다양성이 포용 되는 사회를 꿈꿀 뿐이다.


<안토니아스 라인>(1995) dir. 마를렌 고리스

이번엔 아예 남성이 필요 없는 모계 사회는 어떨까? 네덜란드의 감독 마를렌 고리스의 대표작 <안토니아스 라인>은 다양성을 포용한 공동체에서 폭력적인 남성의 이름을 지워버린 세상을 구축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를 미군이 내몰았던 시기에 안토니아(빌레케 반 아메루이)는 그녀의 16살 난 딸 다니엘(엘스 도터만스)과 함게 어머니 일레곤다(도라 반 더 그로엔)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어머니는 고약한 남편과 아버지에 시달리며 평생을 앓다가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모녀만이 남겨진 농경 사회에서 전형적인 가부장적 농부 댄은 안토니아에게 폭언을 내뱉는다. 그의 아들은 자기 여동생을 강간하기에 이른다. 남성들의 힘이 득세한 마을에서 안토니아는 남성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농장을 일군다. 그 농장에는 말더듬이도 있고, 강간 피해자인 여성도 있고, 전쟁의 상흔으로 무기력한 지식인과 보름달마다 늑대처럼 우는 여성도 있다.

1996년 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던 <안토니아스 라인>은 화끈한 체제 전복의 극단을 달린다. 같은 홀아비의 처지의 시몬(레이노앗 부세마커르)이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안토니아는 “아들도 남편도 내게는 필요 없다”라는 말로 한 방을 먹인다. 안토니아가 작은 마을에 구축한 유토피아는 4대 모계 사회로 이루어져 있다.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출산하기는 하지만, 다니엘이 남성과 관계 맺는 장면은 철저히 ‘임신’을 통한 출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대로 안토니아는 결혼제도 밖에서 시몬과 일주일에 한 번 유희를 위한 관계를 갖는다. 이들의 관계에는 결혼이나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이 건설한 유토피아적 세계는 다양성을 완벽하게 보장한다. 안토니아의 임종으로 끝나는 영화를 돌이켜 본다면, 그녀가 뿌린 다양성의 세계는 20명의 가족이라는 으풍성한 결실로 돌아온다. 모성애 신화부터 결혼제도와 가부장의 폭력까지 모든 것을 통렬하게 반박하는 <안토니아스 라인>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울림을 준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