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연코 크리스토퍼 놀란의 (현재까지) 최고작이 아닐 수 없다. 각본, 연출, 음악, 촬영, 편집까지… <오펜하이머>는 영화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요소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그 어떤 부분에서의 아쉬움도 주지 않는, 2023년 기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랄까. 1억 달러의 제작비가 투여된 대작, <오펜하이머>는 개봉 한 달여 만에 7억 2천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며(8월 25일 기준) 전 세계에서도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저명한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동료들과 함께 핵을 개발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전기 영화다. 2005년 출간된 오펜하이머의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 카이 버드·마틴 셔윈 공저)를 영화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소설과 영화는 전개 방식과 포커스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9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일생이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반면, 영화 버전은 오펜하이머가 핵을 개발하고 난 이후, 미국 원자력 위원회 의장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 공청회에서 하는 증언을 중심으로 오펜하이머의 과거와 현재, 시간을 넘나들며 재현된다(<메멘토>를 포함한 놀란의 전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의 시작점은 22살의 청년,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다. 캠브리지 대학의 연구원에서 유학 중이던 그는 실험도, 연구도 만족스럽지 않지만 우연한 기회에 저명한 물리학자인 ‘닐 보어’(케네스 브레너)를 만나 다시금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그의 조언으로 독일에서 박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버클리 대학에서 그가 쫓던 주제인 ‘양자물리학’ 연구에 착수한다.
2차 세계대전이 정점을 지나고 있던 1942년, 물리학계의 최고 학자로 부상한 오펜하이머 앞에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맷 데이먼)이 나타난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 핵 개발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나치에 대항할 만한 미국의 핵 개발 프로젝트,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아줄 것을 요청한다. 그렇게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주의 외딴 마을, ‘로스 앨러모스’에서 학계를 대표하는 최고 물리학자들과 함께 핵 개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딜레마 1:
궁극적으로 <오펜하이머>는 ‘딜레마’를 그리는 영화다. 따라서 영화는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천재성과 성취보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정치적, 윤리적, 그리고 인간적 딜레마에 초점을 맞춘다. 종전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궁극적으로는 인류 최대의 살상 무기, 즉 반인류적 장치라는 역설을 오펜하이머는 어떻게든 자의적으로나마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핵을 완성하고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의 심리를 계속되는 비극의 환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어 종전을 축하하는 행사에 연사로 참여한 오펜하이머에게 미국의 승리와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불에 타고 있는 시신들로 비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펜하이머>는 핵 실험과 폭발에서 예상되는 거대한 스펙터클보다는 오펜하이머의 끊임없는 내적 갈등, 혹은 변화를 함유하는 이미지들을 구현하는 데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가령 영화의 초반, 청년 오펜하이머가 물리학에 빠진 이유는 바로 별의 운명에 대한 그의 멈출 수 없는 상상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연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가진 재능을 부각시키는 몇몇의 에피소드가 아닌, 그가 상상하는 자연, 즉 별과 하늘, 나무와 숲의 이미지로 그의 존재를 소개한다. 마치 오펜하이머가 이 세상의 이치를 (물리학적으로) 바라보듯 말이다. 전쟁의 참상이 숲의 초록과 녹음으로 그려졌던 테렌스 말릭의 <씬 레드 라인>이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딜레마 2:
물론, ‘핵 발명’이라는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화두를 ‘오펜하이머’라는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로만 접근했다면 영화는 지금과 같은 총체적 완성도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원작을 읽는 것에서 더 나아가 놀란이 얼마나 현대사에 대한 치열한 조사를 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만큼 영화는 전쟁 중인 미국 사회 내부의 상황을 다각적인 시선에서 그린다. 가령 흑인 차별만큼이나 고질적인 문제였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그것이다. 미국 내에서의 심각한 차별로 이름조차 바꾸며 살았던 유대인들, 특히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유대인 출신의 학자들에게는 미국 정부가 제안했던 핵발명 프로젝트가 그 잠재적 위험성과 도덕적인 책무감에도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고용을 종용한 것은 오펜하이머 박사다. 그로브스 장군이 처음으로 맨하탄 프로젝트를 들고 찾아온 날, 그는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 미국이 ‘반유대주의’를 버려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강조하며 곳곳의 저명한 (유대인) 물리학자들을 모을 것을 요구한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인 기지가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아가 영화는 오펜하이머를 포함해 지식인들이 참여했던 갖가지 사상 모임을 중요한 영화적 배경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오펜하이머가 참여했던 버클리 대학의 ‘공산주의자 모임’은 그가 그의 오랜 연인이자 당원인, ‘진 테트록’(플로렌스 퓨)을 만났던 장소이기도 하고 현재의 아내, ‘키티’와 사랑에 빠진 곳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정치적 성향이 로맨스를 위한 장치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오펜하이머’의 공산주의자적 성향은 궁극적으로 그가 핵 발명이라는 엄청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사상 심판을 받아야 하는 굴욕적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다. 동시에 이는 오펜하이머의 또 다른 딜레마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서 고통받는 인민들을 위해 자금을 전달하는 선한 공산주의자이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지적인 영화다. 단순히 과학자를 주제로 했기 때문이거나,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다루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 <오펜하이머>는 인간으로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난제에 대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지를 수밖에 없는 ‘원죄’(프로메테우스가 그랬듯)에 대해서 끊임없는 가정과 명제, 그리고 해석을 제시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말미에,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가 산책 중이던 아이젠슈타인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 - 어쩌면 영화는 두 과학자의 이 염세적이고도 간결한 결론을 인류 역사의 답으로 제시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답에 과연 동의할 것인지는, 관객들의 몫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