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춤추는 사람, 제임스 전
60년 발레 인생. 그는 안무가이자 현역 무용수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제임스 전’은 열두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태권도에 열심이던 그는 스무 살에 뉴욕 줄리어드 예술대학 무용과에 입학한다. 발레를 배우기에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발레리노가 된다.
졸업 후 벨기에 브뤼셀의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과 미국 잭슨빌의 플로리다 발레단에서 활동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유니버셜 발레단의 초창기 멤버로 그리고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1995년 아내 김인희 단장과 함께 서울발레씨어터를 창단, 20년 넘는 시간 동안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안무하며 최근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BEING 현존(1995)’, ‘흑과백(1996)’, '생명의 선(1999)’, ‘봄,시냇물(2005)’, 'Life is(2011)’, ‘Rage(2014)' 등이 있다. 2010년, 나는 그와 한 기업의 후원으로 ‘노숙인 발레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난 그를 ‘현실의 춤꾼’이라고 부른다. 발레로 현실의 고단을 끝없이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 편의 인생영화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서슴없이 <여인의 향기>를 선택했다.
2.
여인의 향기
영화는 1974년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감독 디노 리시)를 당시 미국을 배경으로 옮긴 작품으로, 1993년에 개봉했다. 시력을 잃어가는 퇴역 장교 ‘프랭크 슬레이드’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학생 ‘찰리 심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프랭크는 과거 화려한 경력을 가진 군인이었지만, 이제는 시력을 잃어가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부활절 연휴, 프랭크는 자신을 돌보기 위해 방문한 아르바이트생 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영화는 탱고와 사랑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프랭크는 탱고와 사랑을 통해 다시 삶의 의미를 되찾고, 찰리 또한 프랭크를 통해 인생의 첫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다.
영화는 탱고와 음악, 그리고 어른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단연 프랭크가 탱고를 추는 장면이다.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앞을 보지 못하는 퇴역한 군인, 그리고 둘의 사이를 흐르는 카를로스 가르델의 “Por Una Cabeza”, 그리고 둘의 경쾌한 탱고는 언제 보아도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든다.
프랭크와 심스의 여정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을 떠올린다.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두 명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다를 뿐, 소명을 받고 평범한 세계를 떠나 모험과 시련을 거쳐 귀환하는 이야기다. 포악한 용을 물리치거나, 화려한 보물을 가지고 돌아오지는 않지만, 비뚤어진 어른이었던 프랭크는 예전의 모습을, 두려움에 떨던 심스는 용기를 되찾는다. 그렇게 어른은 진짜 어른이 되고, 청년은 어른이 되는 관문을 통과한다.
영화는 어른도 실수하고, 성장한다는 상식을 이야기한다. 탱고가 처음이라며 실수를 두려워하는 여인에게 프랭크는 말한다. 인생과 달리 탱고에는 실수가 없다, 스텝이 엉킨다면 그게 바로 탱고라고. 권총을 들고 자살하려는 프랭크는 심스에게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묻는다. 심스는 당신은 내가 본 누구보다 멋진 탱고를 추고 누구보다 페라리를 잘 모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프랭크는 여인을 춤추게 했고, 심스는 프랭크가 계속 춤추게 만들었다.
3.
탑건 : 매버릭
영화는 1986년 개봉한 <탑건>의 속편이다. 주인공 매버릭은 최고의 파일럿이자 전설적인 인물이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졸업한 훈련학교 교관으로 발탁된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적국의 핵시설을 비밀리에 요격하기 위해, 훈련생들을 이끌고 극한의 비행 미션을 수행하는 것.
매버릭은 이 임무를 통해 잊고 싶던 자신의 과거와 마주친다. 훈련생 중의 하나인 루스터는 매버릭과의 비행 도중 사망한 가장 친한 친구이자 ‘RIO(레이더 중재 장치 조종사)’였던 ‘구스’의 친아들이다. 매버릭이 자신의 사관학교 입학을 방해했다고 오해하는 루스터는 사사건건 매버릭과 충돌한다.
영화는 전투기와 음악, 어른에 관한 이야기다. 영웅으로 살았지만 더 빠르게 날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주인공과 아버지의 부재라는 결핍을 떨치지 못하고 사는 견습 영웅. 영화의 백미는 둘이 적국에 고립되어 낡고 낡은 F-14 전투기를 몰고 귀환하는 장면이다. 위기의 순간을 어렵게 넘긴 둘,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창공에서 들려오는 레이디 가가의 ‘Hold My Hand’는 영웅의 성장과 변화를 보여주는 완벽한 노래다.
어른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어른이 아니었던 그 시절에서 위로를 찾는다. 어른은 과거를 지우고 싶다. 부족했던 인내와 철없던 치기를 부끄러워한다. 매버릭은 구스와의 과거를 잊고 싶지만, 루스터를 만나 잊을 수 없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날고 싶었던 이유도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을 하늘에서나마 잠시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무도 없는 창공에서 어린이를 꿈꾸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적막에서 과거를 잊는다.
영화의 엔딩은 36년이 흐른 성장한 세상의 관점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영웅 서사였다면, 악당을 물리치고 개선하는 영웅의 귀환 길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둘의 포옹은 전통적인 해피 엔딩의 상징이었겠지만, 매버릭에는 그런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은 죽을 고비를 넘은 남성 영웅을 기다리지 않고 사라진다. 그리고 맥빠진 모습으로 창고에서 비행기를 고치고 있는 그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다. 철없던 영웅이 어른이 된 것을 축하하는 여신의 모습처럼.
4.
어른의 두 얼굴
이 시대는 어른이라는 말이 귀하다. 진짜 어른을 만나기 힘들어졌다. 어른은 있지만, 어른다움은 없다. 모든 어른에겐 두 얼굴이 있다. 추구하는 얼굴과 회피하는 얼굴. 여전히 새로운 꿈을 추구하지만, 힘든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것이 어른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은 파괴된 가정의 현실을 회피하지만 이지안을 위로하며 새로운 꿈을 추구한다. 드라마 테마곡이었던 ‘어른’(노래 손디아)의 가사는 추구와 회피의 갈등을 극명하게 들려준다.
눈을 감아 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갤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은
나를 버리면 모두 갤 거라고.
나는 내가 되고 별은 영원히 빛나고
잠들지 않는 꿈을 꾸고 있어.
바보 같은 나는 내가 될 수 없단 걸
눈을 뜨고야 그걸 알게 됐죠.
<여인의 향기> 프랭크는 죽음을 결심했었지만, 결국 새로운 삶을 꿈꾼다. <탑건: 매버릭>의 매버릭은 영웅처럼 죽고 싶었지만 마침내 마지막 사랑을 찾는다. 심스와 루스터는 어른을 증오했지만, 결국 스스로 어른이 된다. 어른을 어른답지 못하게 만드는 건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책임질 수 없다면 그건 어른이 아니다. 두 영화는 그런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탑건: 매버릭>의 주제곡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도 피와 눈물이다. 대신 노래는 어른에게 끝없이 나의 손을 잡으라고 외친다.
진짜 어른을 보기 힘든 이유는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어른이 사라졌기 때문일 수 있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장학사업을 해온 ‘어른 김장하’의 “줬으면 그만이지”란 말이 오히려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니까. 어느 순간 그런 어른들이 종적을 감춘 것이 아니라, 가면을 쓰고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든 다른 얼굴로 나타날 수 있는 어른 아닌 어른들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어른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2015년, 안무가 제임스 전은 월간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무용은 속일 수가 없다. 젊은 안무가들을 보면서 걱정되는 부분은 유럽과 미국의 안무를 무작정 따라 한 카피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맛이 나와야 하는데 쉽진 않다는 걸 잘 안다. 물론 안무가끼리 서로 영향을 받긴 하지만, '누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더 해봐야지'하고, 독립적으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른에게 참 미안한 말이지만, 결국 계속 고민하는 모습이 어른다움 아닐지.
안무는 요리고 지금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여전히 고민 중이라는 제임스 전의 말에서 난 어른을 본다. 끝.
글쓰는 기획자, 김우정
김우정의 <영화 라면>은 각계각층의 명사가 추천하는, 반복해서 보고 싶은 인생영화와 함께 최신 작품을 버무려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 코너는 영화 한 편을 심층 분석하는 비평이나 최신 영화를 평가하는 평론은 아닙니다. 그저 한 번 사는 인생의 서로 다른 가치를 영화 속에서 찾고 싶고, 라면을 먹은 것처럼 잠시나마 사소한 행복을 선물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음 화는 뮤지컬 작가 오은희의 <동사서독>이 이어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