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배트맨을 연기한 배우들

원작이 있는 영화가 나올 때면, 가장 화제가 되는 건 캐스팅이다. 대체로 환영을 받기보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는데, 하물며 몇 십 년간 인기 순위 꼭대기에 서있는 캐릭터라면 그 눈초리가 어떻겠는가. 그래서인지 코믹스 원작 캐릭터들은 제작진 또한 그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이곤 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인기 배우라도 코믹스 캐릭터를 맡기는 쉽지 않은 법. '배트맨'으로 거론됐었으나 끝내 캐스팅 고배를 마셨던 배우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

최종 선택 = 크리스찬 베일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 <배트맨 비긴즈>

후보 1. 제이크 질렌할

제이크 질렌할 배트맨 팬메이드 이미지 (MessyPandas)

최근 각본가 데이비드 S. 고이어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관여한 여러 작품에 대한 일화를 풀었다. 그중 가장 화제가 된 일화는 <배트맨 비긴즈> 제작 당시 캐스팅으로 의견이 갈렸던 것. 당시 많은 배우들이 스크린테스트를 받았는데, 최종 후보는 크리스찬 베일과 제이크 질렌할이 남았다. 고이어는 제이크 질렌할에게 한 표를 던졌지만, 놀란 감독이 크리스찬 베일을 선택하면서 최종 낙점됐다. 제이크 질렌할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전까지 꽤 많은 히어로 역을 제안받았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이번 영화, 그리고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 등등. 하지만 결국 그의 히어로 영화 데뷔는 '미스테리오'가 됐다.


후보 2. 킬리언 머피

킬리언 머피의 스크린 테스트 자료

크리스토퍼 놀란의 페르소나, 혹은 최애 배우. 이 정도면 애착 인형.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그럴싸한 킬리언 머피도 배트맨 오디션을 봤다. 쟁쟁한 후보 사이에서 킬리언 머피는 배트맨으로 보이기 어려웠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의 연기력을 높게 사 <배트맨 비긴즈>의 메인 빌런 스케어크로우를 제안했다. 덕분에 킬리언 머피는 배트맨은 아니지만, <다크 나이트> 삼부작 모두 개근하는 몇 안 되는 캐릭터로 활약할 수 있었다.


후보 3. 히스 레저

히스 레저

<다크 나이트>에서 희대의 악역 조커로 명연기를 펼친 히스 레저도, <배트맨 비긴즈> 당시에 배트맨으로 오디션을 봤다. 놀란의 회고에 따르면 정작 히스 레저는 배트맨 역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그러다가 본인이 <배트맨 비긴즈>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점차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히스 레저는 배트맨을 연기하지 못했지만, <배트맨 비긴즈> 보고 만족했기에 <다크 나이트> 출연 제안을 받아들였다.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

최종 선택 = 로버트 패틴슨

<더 배트맨> 로버트 패틴슨

후보. 니콜라스 홀트

니콜라스 홀트 배트맨 팬메이드 이미지 (bosslogic)

2022년 개봉한 <더 배트맨>은 제작 발표 시절부터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당시 DC 엔터테인먼트는 DCEU(DC 확장 유니버스)를 진행하면서 벤 애플렉을 배트맨으로 기용하고 있었기에, <더 배트맨>이 굳이 나와야 하는지부터가 의구심을 샀다. 하지만 DCEU의 하락세와 독자적인 영화 <조커>의 성공이 맞물려 <더 배트맨>은 독자적인 영화로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때도 다양한 배우들이 배트맨 역으로 물망에 올랐는데, 그중 니콜라스 홀트가 꽤 유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34살 젊은 나이, '부유한 브루스 웨인'과 '강박적인 배트맨' 모두 꽤 잘 어울리는 외모, 히어로 영화 출연 경력 등등 니콜라스 홀트도 배트맨에 적합해보인다. 하지만 맷 리브스는 로버트 패틴슨에게서 자신이 생각하는 배트맨의 모습을 발견해 그를 캐스팅했다. 니콜라스 홀트도 <더 배트맨>을 관람한 후에 “나였으면 그만큼 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후기를 남겼다.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최종 선택 = 벤 애플렉

벤 애플렉의 배트맨

후보. 조슈 브롤린

충직하면서도 웃음기 없는 <듄>의 거스 할렉이 가장 조슈 브롤린 배트맨에 가까운 모습일 것 같다.

벤 애플렉은 <배트맨 v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배트맨 역으로 출연했다. 캐스팅 발표 당시 그는 엄청난 반발을 샀었는데, 잭 스나이더의 비전대로 캐스팅이 됐다면 반발이 더 극심했을지 모른다. <배트맨 v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기획 단계에서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처음엔 더 나이 든 배트맨을 그리려고 했다. 그 당시 캐스팅 후보에는 조슈 브롤린도 있었다. 브롤린은 본인 또한 배트맨의 광팬이라서 출연 제안에 상당히 기대했었다는데, 영화의 전체적인 방향이 바뀌면서 아쉽게 출연하지 못했다. 팬이었기에 캐스팅 실패가 더 아쉬웠을 텐데도 조슈 브롤린은 “80세가 되더라고 배트맨을 하고 싶다”며 열성적인 팬심을 드러내고 있다.

카리 앤드루스가 그린 코믹스 표지. 조슈 브롤린을 모티브로 삼은 듯 닮았다.


팀 버튼의 <배트맨>

최종 선택 = 마이클 키튼

<배트맨>에서 <플래시>까지.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

후보. 피어스 브로스넌

피어스 브로스넌 배트맨 팬메이드 이미지

1989년 <배트맨>의 마이클 키튼은 그야말로 두 번의 혁명이었다. 코미디에서 활약하던 배우를 그 음침한 캐릭터에 데려온 것이 첫번째요, 그럼에도 완벽한 연기와 연출로 새로운 배트맨을 완성시킨 것이 두 번째다. 재밌게도 당시 <배트맨> 오디션을 본 배우 중엔 피어스 브로스넌도 있었다. 그가 훗날 방송에서 밝히길 팀 버튼과의 미팅 도중 말실수를 해 배트맨에서 탈락한 것 같다고. 그는 팀 버튼에게 “팬티를 바지 밖에 입고 다니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단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이 말 때문에(어쩌면 덕분에) 피어스 브로스넌이 아닌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을 만나게 됐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말 때문에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이 있을 수 있었는지도.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포에버>

최종 선택 = 발 킬머

발 킬머의 배트맨

후보. 에단 호크

<가타카>의 에단 호크. 그의 브루스 웨인은 이런 모습일 듯하다.

팀 버튼 감독과 마이클 키튼이 <배트맨 2>를 마지막으로 하차한 후, 그 빈자리엔 조엘 슈마허 감독과 발 킬머가 앉게 됐다. 이 당시 발 킬머 말고 출연 제안을 받은 배우는 에단 호크가 있다. 요즘 에단 호크의 이미지는 예술 영화나 저예산 영화 쪽이 어울리긴 하지만 당시엔 이제 막 떠오르는 청춘스타로서 <배트맨> 시리즈의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제작진의 눈에 들었던 것. 하지만 에단 호크는 고정 이미지가 생길까봐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이후 인터뷰에선 배트맨을 연기했더라면 커리어가 더 다양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후회한 적도 있다고. 이런 전적 때문인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캐스팅 후보였다는 루머가 있다. 2022년 방영한 TV 애니메이션 <배트휠스>(Batwheels)에서 배트맨을 연기해 소원 성취(?) 했다.

에단 호크는 <배트휠스>에서 배트맨을 맡았다.


지금까지 제작된 영화의 캐스팅 후보였고, 아래는 미제작 영화에서 배트맨을 맡을 뻔한 배우들을 소개한다.

조지 밀러의 <저스티스 리그 모탈>

후보. 아미 해머

아미 해머 배트맨 팬메이드 이미지 (Mizuri)

이 영화가 있었다면, 어쩌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조지 밀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저스티스 리그 모탈>은 1편부터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 즉 DC의 유명 히어로들이 총집합하는 팀업 무비라는 파격적인 기획을 준비했다. DC 히어로의 '트리니티'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은 기본이고 플래시, 그린 랜턴, 아쿠아맨, 마샨 맨헌터 등이 등장한다. 저스티스 리그에 맞서는 빌런이나 조력자들도 상당히 많이 등장할 예정이었는데, 2007년 작가 조합 파업과 맞물리며 제작이 연기되면서 결국 취소 수순을 밟았다. 이 영화에서 배트맨을 맡은 배우는 (현재 논란으로 은퇴 수순을 밟은) 아미 해머. 확실히 그의 귀공자스러운 외모와 커다란 덩치를 생각하면 꽤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어서 나중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팬이 늘어났을 때, 배트맨 후보였던 사실이 화제가 됐다. 뭐, 지금 와선 그때의 떠들썩함도 다 잊히고 말았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배트맨: 이어 원>

후보. 호아킨 피닉스

일러스트레이터 Arkin Tyagi의 호아킨 피닉스 배트맨

<배트맨 비긴즈>의 전신 <배트맨: 이어 원>은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바탕으로 한다. '이어 원'이란 부제처럼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배트맨이 됐고 고담 시티의 가장 무서운 존재로 거듭났는지를 그린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박쥐를 불러 위장하는 장면은 이 원작에서 등장한 것을 반영했다. 조엘 슈마허가 만든 가벼운 배트맨을 다시 뒤집기 위해, 제작사는 배트맨을 다시 진중하게 그리고자 대런 아로노프스키에게 연출을 맡겼다. 그런데 여기서 제작사는 상대가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어떤 감독인지 잘 몰랐던 듯하다. 그가 집필한 <배트맨: 이어 원>은 기존 배트맨 서사와 차이점이 보였고, 상상한 것 이상으로 더 어두운 분위기였다. 결국 제작사와 감독 간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해 영화는 무산됐다. 당시 아로노프스키가 원한 배트맨은 호아킨 피닉스였다고 한다. 덧붙이자면 아로노프스키는 이후 <왓치맨> 영화화를 준비했는데, 그때도 참신한 각색을 했다가 끝내 영화 연출에서 하차했다.


볼프강 페터젠의 <배트맨 대 슈퍼맨>

후보. 콜린 파렐

볼프강 페터젠의 <배트맨 대 슈퍼맨> 팬메이드 이미지

VS 싸움은 언제여도 흥미로운 아이템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도 그래서 한참 전부터 구상됐던 영화이다. 2000년대 초 기획된 <배트맨 대 슈퍼맨>은 알프레드의 사망으로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을 포기하고 일반인으로 살다가 조커의 계략에 빠져 다시 배트맨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릴 예정이었다. 조커가 브루스 웨인의 아내를 죽이자 분노한 배트맨이 조커를 죽이려고 하고, 이를 슈퍼맨이 말리면서 둘의 대립이 시작된다. 그러다 조커의 계략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된 배트맨이 다시 슈퍼맨과 협력해 조커와 렉스 루터를 쓰러뜨린다. 볼프강 페터젠 감독이 연출할 이 영화는 주드 로가 슈퍼맨 역을, 콜린 파렐이 배트맨 역을 맡을 예정이었다. 두 배우가 슈퍼맨/배트맨을 연기하는 모습도 궁금한데 영국 배우, 아일랜드 배우가 맞붙는 구도라서 한 층 더 흥미롭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