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영화 <펄프픽션>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던 당시의 사진. 턱만 봐도 알겠지만.. 중지를 치켜든 사람이 쿠엔틴 타란티노다. 브루스 윌리스, 마리아 드 메데이로스, 존 트라볼타가 함께 있다.

3월 27일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54번째 생일이다.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로 "천재가 나타났다"는 라는 칭호를 받으며 쑥쑥 성장한 그가 거장이 됐고, 중년이 됐다. 타란티노는 무언가를 유별나게 좋아한다는 걸로 정평나 있다. 온갖 레퍼런스들을 뒤섞어 만든 그의 걸작들이야말로 확실한 증거다. 저 멀리 한국에서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덕후'의 관점으로 그의 행보를 돌이켜보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영화에 빠졌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1963년 테네시 녹스빌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LA에서 보냈다.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어머니를 따라 극장에 다녔고, 그녀는 <애정과 욕망>(1971)과 <서바이벌 게임>(1972) 같은 성인영화도 볼 수 있게끔 허락했다고 한다. 중학생 때 이미 <스모키 밴디트>(1977)에 영향 받은 <캡틴 피치퍼즈와 앤초비 밴디트>라는 시나리오를 썼다. 15살 되던 해 여름엔 엘모어 레너드(훗날 타란티노는 레너드의 소설 <럼 펀치>를 각색한 <재키 브라운>을 연출했다)의 소설 <스위치>를 훔쳐 어머니에게 외출 금지령을 당한 적도 있다. IQ가 160이었지만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었는지, 일찌감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포르노극장과 연극단에서 일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대형 비디오대여점에서 5년간 일하며 영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자랑했다.


실천하고 기어코 증명한다

1987년 드디어 첫 영화 <나의 베스트 프렌드의 생일>을 연출했지만 편집 중에 화재가 일어나 마지막 릴이 유실됐다. 본래 70분이었던 영화는 36분 짜리로 남아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됐고, <펄프 픽션> DVD 부록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타란티노가 시나리오를 쓰고 토니 스콧이 연출한 <트루 로맨스>의 뼈대가 됐다. 90년대 초반, 처음으로 돈을 받고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각본을 썼다. 영화는 (<씬 시티>(2005), <데스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그라인드하우스'(2007) 등을 함께한 절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연출로 1996년 개봉됐고, 타란티노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했다.

타란티노는 1991년 프로듀서 로렌스 벤더와 함께 제작사 '어 밴드 아파트'(A Band Apart)를 열었다. 회사명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 <국외자들>(Bande à part)에서 따왔고, <저수지의 개들>의 이미지를 활용해 로고를 만들었다. 1993년 <트루 로맨스>부터 2009년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까지, 타란티노와 관련한 여러 영화들이 이 회사를 통해 제작됐다.


자기애가 아주 강하다
<저수지의 개들> / <펄프 픽션> / <포 룸>

감독 데뷔 전 극단에서 배우로도 활동한 타란티노는 영화에서 종종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저수지의 개들>의 오프닝 속 마돈나에 대한 썰을 푸는 미스터 브라운이 바로 타란티노다. 다음 영화 <펄프 픽션>에서는 빈센트(존 트라볼타)와 줄스(사무엘 L. 잭슨)가 실수로 죽인 시체를 맡아주는 역할도 맡았다. 90년대 중반엔 자주 연기를 했는데 옴니버스 영화 <포 룸> 속 단편 <할리우드에서 온 남자>, <황혼에서 새벽까지>, <걸 6> 등에서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재키 브라운>과 <킬 빌 1>은 자동응답기 목소리와 갱단 '크레이지88' 멤버로 참여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데스 프루프>에서는 바텐더 워렌을 연기했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후반부에는 얼결에 장고를 도와주는 광산업체 직원으로 나왔다. 이 정도면 자기 연기에 꽤나 만족하고 있다고 봐도 될 듯하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 <데스 프루프> / <장고: 분노의 추적자>

일본에 대한 애정을 담아 <킬 빌 1>을 만들었다

<킬 빌>이 액션영화에 대한 온갖 오마주로 똘똘 뭉쳐 있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일본은 <킬 빌>을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다. 브라이드(우마 서먼)가 4년 반 만에 깨어나 오렌 이시이(루시 리우)에게 복수하기 위해 향하는 곳이 일본이다. 오키나와에서 스시 집을 평화롭게 운영하고 있는 명인 핫토리 한조에게 검을 받은 뒤, 도쿄로 향해 거대 요정 청엽정(靑葉停)과 오렌의 조직 '크레이지 88'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일본의 존재는 비단 소재와 배경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오렌의 과거사를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시퀀스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나카자와 가즈토에게 연출을 맡겼다. 컬러풀한 이미지와 원근감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점의 연출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청엽정 시퀀스가 시작될 때 등장하는 밴드는 실제 활동하는 5,6,7,8's가 직접 연기했고 음악("우후~ 우후후~") 역시 그들의 것이다. 일당백 액션으로 압도하던 영화는 철퇴를 휘두르는 소녀 고고 유바리(쿠리야마 치아키)를 등장시켜 1:1 액션의 묘미까지 곁들였다. 타란티노가 가장 좋아하는 21세기 영화라고 밝힌 <배틀로얄>(2000)에서 단연 돋보인 쿠리야마 치아키의 음침한 기운이 고고의 괴상한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5,6,7,8's / 쿠리야마 치아키

새파란 격자 배경에서 화려한 검술을 선보이는 시퀀스의 콘셉트는 <사무라이 픽션>의 유명한 이미지에서 따왔다. 2편의 브라이드와 파이메이(유가휘)가 수련하는 장면에서는 붉은 배경으로 다시 한번 인용했다.

<킬 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는 1973년 개봉된 일본영화 <수라설희>가 아닐까? 한 여자의 처절한 복수가 이야기의 동력이라는 점부터 그 영향은 명징하다. 브라이드와 오렌이 결투를 벌이는 신은, 오렌이 입은 순백의 기모노, 눈 내리는 일본식 정원, 하얀 눈 위에 흩뿌려지는 피 등이 어우러져 1편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데에 충분한 비장미를 선사한다. <수라설희>의 히로인인 카지 메이코가 부른 노래 ‘수라의 꽃’(修羅の花), '원망의 노래’(怨み節)는 각각 1편의 클라이막스와 2편의 엔딩크레딧과 함께 흐른다.

<수라설희>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

불과 몇 년 전까지 타란티노가 뽑은 '베스트 영화 10' 리스트에는 정창화 감독이 연출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늘 랭크돼 있었다. 이 작품은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제작돼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킬 빌>에서 자주 등장하는 싸이렌 같은 효과음이 바로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서 따온 것이다.

2004년 칸 영화제에 비경쟁작으로 초대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돌연 경쟁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당시 경쟁부문 심사위원이 바로 타란티노였다. 유례 없이 다양한 국가와 장르로 구성된 경쟁작들 사이에서 액션 마니아인 타란티노는 <올드보이>에 손을 들어주었다.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에 이은 그랑프리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때 황금종려상이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에 돌아갔는데,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기 위한 퍼포먼스였다고 기정사실화된 바, <올드보이>가 실질적인 최고상을 받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타란티노와 박찬욱의 연은 <올드보이>가 처음이 아니다. 1994년 <펄프픽션> 개봉에 맞춰 한국을 방문한 타란티노를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했던 박찬욱이 인터뷰 한 것이다. 10년 후 칸에서 박찬욱이 그때 인터뷰를 기억하냐고 묻자, 타란티노는 그게 당신이었냐며 반가워했다고.

타란티노가 선정한 1992~2009년 최고의 영화 20편 가운데 한국영화가 3편을 차지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아닌) <공동경비구역 JSA>,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다. 그는 2013년 시상식 참석차 싱가포르에 있다가 봉준호를 만나기 위해 부산국제영화제를 깜짝 방문한 바 있다.

Do Hwa

비디오대여점에서 근무하던 당시 한국인들과 친하게 지냈던 타란티노는, 뉴욕에서 'Do Hwa'라는 한식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다. 막국수, 떡볶이, 김치찌개, 육개장, 돼지갈비, 불고기, 주물럭 갈비구이 등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한식을 내놓는 곳이라고 한다. 그가 한식을 좋아하는 게 꽤 알려진 사실인지, 뉴욕의 '또순이'라는 식당이 폐업한다는 기사에 '타란티노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식당'이라고 언급돼 있기도 하다.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오스카를 안겨줬다
<재키 브라운>과 <킬 빌 1> OST

타란티노는 알아주는 음악 마니아다. 일찍이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부터 60~70년대 음악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감각을 자랑하고 있다. 70년대 소울/훵크에 바치는 <재키 브라운>, 힙합 프로듀서 RZA와 함께 선곡한 <킬 빌>의 사운드트랙 등 타란티노 영화의 OST는 근사한 컴필레이션 앨범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음악을 담는 음반에 대한 애착도 커서 그가 음반 콜렉터라는 점이 뚝뚝 묻어나는 섬세한 배려가 소장의 뿌듯함까지 안겨준다.

타란티노와 모리코네

그는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편애로도 유명하다. <킬 빌 2> 때부터 꾸준히 모리코네가 만들었던 음악들을 인용해왔고, 마침내 <장고: 분노의 추적자> 사운드트랙에 오리지널 곡 'Ancora Qui'를 제공 받았다. 최근작 <헤이트풀8>은 소원성취의 자리였다. OST 전반을 모리코네의 오리지널 넘버로 꽉꽉 채웠기 때문이다. 기존의 명곡들을 인용하는 대신, OST 대부분을 그의 음악들로만 채웠다. 아카데미 시상식 음악상에서 5번이나 고배를 마신 바 있는 모리코네는 <헤이트풀8>으로 작년 시상식에서 드디어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덕후라면 타란티노처럼.


사무엘 L. 잭슨에 대한 편애가 대단하다

타란티노가 만든 장편영화 8편을 모두 본 이들이라면, 그가 유독 애정을 갖는 배우가 누구인지 얼추 파악 가능하다. 사무엘 L. 잭슨은 타란티노의 편애를 독차지하는 배우다. 8편 가운데 총 6편에 참여했다. 흑인에 대한 애정이 유별난 그의 영화에서 잭슨의 존재가 돋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브라이드의 결혼식 피아니스트로 잠시 얼굴을 비춘 <킬 빌>, 내레이션을 담당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두 작품은 내리터브에 흑인의 비중이 전무하다)에 작은 역할로라도 잭슨을 참여시킨 것만 봐도 그 애정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펄프픽션>, <재키 브라운>, <장고: 분노의 추적자>, <헤이트풀8>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음이 확연히 보인다.


정작 타란티노 덕후들은 애가 탄다

타란티노의 과작의 감독이다. 1992년 첫 영화를 내놓은 뒤 지난 25년간 단 8편의 장편을 내놓았다. 보통 2~3년에 한편씩 내놓은 꼴이지만, <재키 브라운>과 <킬 빌> 사이에서는 6년간 신작을 내놓지 않았다. 그가 홍상수처럼 1년에 두 편씩 신작을 내놓는 감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허튼 생각을 해본 이가 에디터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와중, 작년엔 앞으로 두 편의 영화를 더 만들고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지금까지 발표한 영화 속 인물들이 각자 연결돼 있다는 떡밥까지 던졌다. 기대와 아쉬움이 동시에 일어나는 소식이었다. 남은 두 영화가 어떤 작품이 될지에 대해서는 루머만 분분하다. 엘모어 레너드의 다른 소설을 각색한다거나 마지막 영화는 <킬 빌 3>가 될 것이라는 바람 섞인 소문이 돌고 있지만 확정된 바는 없다. 3년 주기로 크리스마스에 영화를 개봉시키는 우연 같지 않은 우연에 맞춰 2018년 12월 25일에 그의 아홉 번째 영화를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지, 그냥 타란티노가 눈감는 순간까지 영화를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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