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패닝의 신작 <매혹당한 사람들>이 9월 초 개봉했고, <우리의 20세기>도 9월 27일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매혹당한 사람들>이 크게 흥행한 건 아니지만, 범접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으로 세상을 놀래켰던 아역배우가 성인이 돼 스펙트럼을 한껏 넓혀가고 있다는 것만큼 명명백백 확인할 수 있었죠.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우의 새 영화를 한 달 사이 두 편이나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니, 에디터는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그 흥분을 그대로 품고 엘르 패닝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활약상을 10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봤습니다. 우선 틀자마자 2분이 사라져버리는 마법의 영상 <Elle Fanning's Fan Fantasy>부터 보시죠.

(p.s. 이름 'Elle'은 '엘'이라 읽는 게 맞지만, 보편적으로 알려진 바를 따라 '엘르'로 표기했습니다.)


Elle Fanning's Fan Fantasy | Vogue

#MARY


엘르 패닝의 본명은 메리 엘르 패닝(Mary Elle Fanning). 메리가 이름, 엘르는 미들네임이죠. 정말 명석한 선택 아닌가요? 메리라는 흔하디흔한 이름보다는 '엘르'가 그의 독보적인 존재를 뒷받침해주는 게 사실이니까요. 참고로 언니 다코타 패닝의 풀네임은 해나 다코 패닝(Hannah Dakota Fanning)입니다. 다코타와 엘르. 이름만으로 세상을 사로잡을 자격이 충분!


#DAKOTA

아이 엠 샘

엘르 패닝은 2살부터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4살 터울의 언니 다코타의 어린 시절(?)로 데뷔했죠. 다코타가 단숨에 지구에서 가장 유능한 아역으로 발돋움한 <아이 엠 샘>(2001)이 엘르의 첫 영화입니다. 샘이 루시와 그네 타는 신, 루시가 엘르에서 다코타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세월이 흘렀음을 드러냅니다. <아이 엠 샘>의 감독 제시 넬슨은 "보통 아역들은 엄마가 촬영장에서 어르고달래야 하는데, 패닝 자매는 집처럼 편안해 보였다"고 말했다죠. 어쩜 그렇게, 타고났나봐요. TV시리즈 <테이큰>(2002)에서도 어린 다코타 역을 맡았습니다. 처음 자기 캐릭터를 맡기 시작한 건 2003년 두 번째 영화 <대디 데이 케어> 때부터.

테이큰
대디 데이 케어

#TOTORO

스크린과 TV를 오가며 이름을 알리던 엘르는 2005년 북미에서 재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1988) 더빙판에서 메이의 목소리를 연기했습니다. 토토로의 단짝이자 메이의 언니인 주인공 사츠키는 '역시' 다코타 패닝이 맡았죠. 엘르의 살짝 낮은 목소리와 씩씩한 메이의 모습이 만나는 케미가 쏠쏠! 2009년 애니메이션 <아스트로 보이 - 아톰의 귀환>에서도 엘르의 목소리 연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두 애니메이션 모두 일본과 관련한 작품들이네요.

My Neighbor Totoro Dubbing by Disney Dakota and Elle Fanning

#BLANCHETT-PITT

바벨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엘르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재미있는 사실이 눈에 띄었습니다. 케이트 블란쳇과 브래드 피트가 부부를 연기한 두 영화 <바벨>(2006)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에 모두 엘르가 참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정작 엘르는 두 영화에서 모두 블란쳇과 피트와 호흡을 맞추진 않았죠. <바벨>의 데비는 부모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유모와 함께 멕시코 국경을 넘으려다가 비극을 맞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는 블란쳇의 캐릭터 데이시의 아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엘르는 어린이용 영화뿐만 아니라 데이빗 핀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카메론 크로우 등 거장들의 작품에도 출연하면서 서서히 필모그래피의 밀도를 다져나갔습니다.


#COPPOLA

썸웨어

세상 모든 아역은 하루아침에 불쑥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엘르도 마찬가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마리 앙투아네트>(2006) 등으로 남다른 안목을 자랑했던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엘르의 성장을 지켜보곤 아역 티를 막 벗을 즈음 <썸웨어>(2010)의 주인공으로 발탁했습니다. 삶이 권태로운 배우 자니(스티븐 도르프)를 느닷없이 찾아온 열한 살 딸 클레오 역. 자유분방한 태도로 자니의 삶에 천천히 생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캐릭터라 클레오의 엘르 패닝이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죠. 어떤 옷을 걸쳐도 어떤 표정을 지어도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감춰질 틈이 없었달까요. 엘르에게 '패셔니스타'라는 수식이 붙기 시작한 것도 <썸웨어> 이후부터였습니다. 소피아의 아버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역시 <트윅스트>(2011) 캐스팅 러브콜을 보내, 생전 처음 보는 뱀파이어 캐릭터를 선보이기도 했죠. 소피아 코폴라는 <썸웨어> 이후 7년 만에 <매혹당한 사람들>로 다시 엘르와 작업했습니다.


#SUPER8

슈퍼에이트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J.J. 에이브럼스가 연출한 <슈퍼 에이트>(2011) 역시 <썸웨어>와 함께 사춘기 시기 엘르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영화입니다. 엘르는 8mm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조(조엘 코트니)가 이끄는 무리의 홍일점이자, 조의 첫사랑인 앨리스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크지만 얼뜨기 짝이없는 조에게 '사랑의 힘'을 불어넣는, 없어서는 안 될 캐릭터죠. 개봉 당시 "나도 앨리스 같은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외계인과 맞서 싸울 수 있을 텐데..." 하며  스크린을 넋놓고 쳐다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BLOOD

트윅스트 / 네온 데몬

갓 쌓인 눈처럼 새하얀 이미지 때문일까요, 두 영화에서 목격한 엘르 패닝의 피칠갑은 보다 강렬했습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트윅스트>에서 그녀는 뱀파이어인 듯 아닌 듯 주인공 볼티모어의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묘령의 존재 V로 등장합니다. 온몸이 창백한 채 두 눈, 입술, 오른쪽 뺨만 새빨갛던 독특한 외모는 뿌옇기만 한 V의 존재에 미스터리를 한층 더했는데요. 그래서 영화 마지막 저 위 이미지처럼 피를 뒤집어 쓰고 확 나올 때의 얼얼함이 상당했습니다. 작년 공개돼 상당한 찬반 논란을 일으켰던 <네온 데몬>(2016)에서도 피의 엘르를 만날 수 있었죠. 질투와 시기의 기운으로 득시글대는 모델들의 이야기를 난해한 화법으로 전달하는 영화였지만, 끈적한 피와 텅빈 눈빛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엘르가 등장하는 순간마다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트윅스트>와 <네온 데몬> 모두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이 닮았네요.


#PRINCESS

말레피센트

엘르가 <말레피센트> 속 오로라 공주를 연기한다는 소식이 들었을 때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중얼거렸습니다. 대단한 분장과 의상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그 어마어마한 아름다움만으로 공주의 아우라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실질적 주인공인 안젤리나 졸리의 말레피센트에게 초점이 맞춰진 영화지만, 캄캄한 설원을 밝히는 엘르 패닝의 오로라 공주에 대한 관심도 상당했습니다. <말레피센트>는 디즈니의 야심작답게 상당한 성공을 거둬, 흥행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줬던 엘르 패닝의 존재를 아주 드넓게 퍼트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2014년부터 줄곧 엘르의 필모그래피 최고 흥행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NON_HETEROSEXUAL

진저 앤 로사 / 어바웃 레이

의외로 엘르 패닝은 이성애의 주체/대상으로 그려진 적이 드뭅니다. 사춘기 이후에도 연애의 뉘앙스가 두드러진 캐릭터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게 사실이죠. 다만 비이성애자를 연기한 두 캐릭터 <진저 앤 로사>(2012)의 진저, <어바웃 레이>(2015)의 레이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영화들에서 '모델'처럼 보이던 엘르가 새삼 '사람'처럼 다가왔달까요. 자기와 다른 세상에 저항하지만, 너무나 큰 벽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좌절하는 사춘기의 심정이 고스란히 다가왔습니다. 그런 세상의 부정 앞에서 지지 않으려는 눈빛에서 새삼 엘르가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됐죠.


#CLASSICAL

트럼보 / 리브 바이 나이트

최근 엘르가 분한 캐릭터는 과거에 사는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천재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의 실화를 그린 <트럼보>(2015)는 1940년대, 금주법 시대의 범죄조직의 세계를 들여다본 누아르 <리브 바이 나이트>(2016)는 1920년 말을 배경으로 삼았죠. 중심에서 살짝 비껴나 누군가의 딸을 연기한다는 점 자체로는 엇비슷한 느낌입니다만, 의상과 표정의 차이만으로도 니콜라와 로레타는 전혀 딴판으로 보였죠.

엘르의 낮은 목소리가 주는 뉘앙스 역시 소녀와 어른의 경계에 놓인 캐릭터를 제대로 받쳐줬습니다. 시대 배경을 좀 더 과거로 돌린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그 매력은 더 극대화됐죠. 서서히 이성에게 눈 뜨고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하면서도 위기의 처지에 놓일 땐 곧장 제 살길을 마련하는 알리시아는 이미 성인 배우의 길목에 선 엘르 패닝에게 전환기를 마련해줄 만한 캐릭터였습니다. 엘르가 니콜 키드먼과 커스틴 던스트라는 대배우에게 눌리지 않는 기세를 보는 것만으로 <매혹당한 사람들>은 분명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매혹당한 사람들

#UPCOMING

우리의 20세기 / 하우 투 토크 투 걸스 앳 파티스

엘르 패닝의 행보는 더 부지런해지고 있습니다. 9월 27일 국내 개봉 예정인 <우리의 20세기>와 <헤드윅>을 연출한 존 카메론 미첼의 신작 <하우 투 토크 투 걸스 앳 파티스>가 올해 초 공개된 데 이어, 알려진 차기작만 무려 7개에 달합니다. 시대극 <매리 셸리>, 로맨스드라마 <시드니 홀>, 범죄 스릴러 <갈베스톤>, 우디 앨런 신작 등 그 면면도 아주 다양합니다. 다코타 패닝의 동생, 예쁜 아역 같은 오래된 수식을 던져버린 엘르 패닝이 앞으로 얼마나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갈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지(!) 기대를 놓지 않을 수 밖에요.

매리 셸리 / 시드니 홀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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