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와 신파의 조합으로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그것만이 내 세상>. 이병헌과 박정민의 콤비 플레이가 돋보이는 한편, 두 형제의 어머니 역의 윤여정은 늘 그래왔던 대로 중심에서 살짝 비껴선 채로 영화의 톤을 조절하는 역할을 해낸다. 첫 번째 시즌에 이어 다시 한번 대단한 흥행을 기록한 예능 <윤식당>으로 더욱 친숙한 윤여정의 최고의 캐릭터 10명을 선정해 간단한 소개를 덧붙였다. 


화녀
명자

윤여정은 1966년 TBC 공채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다만 그녀의 커리어에서 늘 우선 언급되는 작품은 김기영 감독의 1971년작 <화녀>다. 주인집 남자를 유혹하는 가정부 명자는 언뜻 상대에게 의존적으로 보여도 자기 뜻에 충실히 그와 그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몰아넣는다. 쥐를 맨손으로 잡아야 하는 고생도 고생이지만, 무엇보다 20대 초반의 윤여정이 내뿜는 자유분방한 에너지가 이 외설적이고 전복적인 치정극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윤여정을 대표하는 수식인 '욕망하는 여자'는 이때부터 자리잡은 셈이다. 같은 해 작업한 MBC 드라마 <장희빈> 역시 이런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했다.

장희빈
화녀

감독 김기영

출연 남궁원, 윤여정, 전계현

개봉 197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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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경애

<화녀>와 <장희빈>으로 승승장구하던 윤여정은 1974년 결혼과 동시에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여러 드라마를 같이 작업한 김수현 작가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에미>(1985)를 통해 11년 만에 복귀했다. 인신매매 당한 뒤 자살한 딸의 복수를 감행하는 어머니 역. 매매단의 보스까지 죽인 다음 표정 없이 경찰이 오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는 라스트신이 특히 인상적이다. 어머니도 엄마도 아닌 '에미'에서 느껴지는 끈덕진 정서와 복수극 특유의 스산한 공기가 뒤엉켰다.

에미

감독 박철수

출연 윤여정

개봉 198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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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해라
유순

<에미> 이후 윤여정의 연기는 대부분 TV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거의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수많은 캐릭터들이 있지만 에디터의 선택은 <네 멋대로 해라>(2002)의 유순이다.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 둔 아들 복수(양동근)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받으며 근근이 치킨집을 운영한다. 복수의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이후에도 많은 남자들과 생활을 꾸렸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지 못한, 철없고 처연한 여자다. 오랜만에 찾아와 물심양면 마음을 베푸는 아들에게 늘 경계의 눈빛만을 보내는데, 윤여정은 거기에 원망과 미안함을 선명히 담아내는 경지를 보여줬다.

네 멋대로 해라

감독 박성수

출연 양동근, 이나영

개봉 2002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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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가족
병한

"얘. 미안하구, 챙피하구, 죄의식 느끼구 그럴 필요 없잖아. 낫살 먹어 갖고. 인생은 그런 거 아니잖니. 그지? 그냥 니 몸 원하는 대루, 니 몸 위해주면서 사는 거 맞지?" 김기영 감독의 미개봉 유작 <죽어도 좋은 경험>(1990) 이후 13년 만의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윤여정이 뱉는 첫 대사다. (영화 제목을 선언하는 것처럼)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 품에 안기면서. 보편적인 대중을 위한 TV에서 보다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한 스크린으로 돌아온 윤여정에게 기대하던 걸 보란 듯 보여줬다. "평생을 나를 푸대접 하고 살"아왔던 자신을 잊고, 지금 당장 좋아하는 남자 품에 안겨 탱고를 추는 여자.

바람난 가족

감독 임상수

출연 문소리, 황정민, 윤여정, 김인문

개봉 2003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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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모니카 수녀

윤여정이 지금껏 맡았던 캐릭터들은 대개 뜨거운 가슴을 가졌지만 온기를 마음껏 드러내지 않는(못하는?) 쪽이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속 모니카 수녀는 조금 다르다. 각자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주인공 윤수(강동원)와 유정(이나영)이 '만남의 방'에서 마주 앉게 만드는 모니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푸근한 어른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는 태도는 분명 윤여정과는 낯선 것이었지만, 그게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여배우들
여정

<여배우들>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들 여섯이 크리스마스에 모여 화보를 촬영한다는 설정 아래, 그 배우들 각자의 연기인 듯 생활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 묻어났다. 젊은 배우들이 서로 묘한 긴장감을 드러내는 데 반해, 연장자인 윤여정은 우리가 방송에서 봤던 소탈함으로 크리스마스의 촬영장을 돌아다닌다. 킬힐을 앞에 두고 "이걸 어떻게 신어? 지팽이, 지팽이 줘야 돼" 하는 대사,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여배우들

감독 이재용

출연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개봉 2009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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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문경 모

홍상수는 김기영, 임상수와 더불어 윤여정과 여러 작품을 작업한 감독이다. 시작은 2009년작 <하하하>. 통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에서 윤여정은 제일 유명한 복국집을 운영하는 문경(김상경)의 엄마로 나온다. 거기에 사는 자식뻘의 젊은이들에게 엄마를 자처할 만큼 살가운 사람이다. 가족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윤여정이 가장 평범한 어머니상을 만났다는 게 흥미로운 점. 평소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오랫동안 촬영을 진행하는 홍상수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상당히 고됐다고 털어놓은 바 있는데, 이후에도 <다른나라에서>(2011), <자유의 언덕>(2014),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등 홍상수 영화에 계속 참여했다.

하하하

감독 홍상수

출연 김상경, 유준상, 문소리, 예지원, 김강우, 윤여정, 김규리, 기주봉, 김영호

개봉 2009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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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병식

윤여정과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는 연이 깊다. 첫머리에 언급한 출세작 <화녀>가 <하녀>의 셀프 리메이크였고, <하녀>를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 2010년판 <하녀>에도 주요한 캐릭터로 참여했다. 은이(전도연)를 하녀로 데려와 그녀를 아끼는 것처럼 보이는 상류층 저택의 나이든 하녀 병식 역이다. 자신과 별다를 바 없는 처지의 은이 옆에서 나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이것저것 챙겨주고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벼랑으로 몰리는 은이를 보고 눈물을 흘려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병식과 은이는 그저 "아무도 아"닐 뿐이지만.

하녀

감독 임상수

출연 전도연, 이정재, 윤여정, 서우

개봉 2010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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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상회
금님

<장수상회> 속 윤여정은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동네 여기저기를 누비며 버럭버럭 까칠함을 드러내는 노인 성칠(박근형)의 마음을 첫눈에 사로잡는 금님을 연기했다. 노년의 설렘을 내세우는 영화인 만큼 금님 역의 윤여정은 매순간 해사한 미소를 발산한다. 곱고 아름답다. 오랜만에 무겁고 거친 수사를 빌리지 않고서 윤여정의 캐릭터를 설명할 수 있었다. 

장수상회

감독 강제규

출연 박근형, 윤여정, 조진웅, 한지민

개봉 2014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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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춘 할망
계춘

윤여정에게서 할머니를 떠올리게 될 줄이야. 평생을 해녀로 산 계춘은 실종됐던 손녀 혜지(김고은)를 12년 만에 만나 다시 정을 붙여간다. 손녀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그저 이쁘다 이쁘다 기뻐하는 모습에서 할머니의 인자한 품이 떠오른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모니카 수녀, <장수상회>의 금님 모두 해맑은 표정 너머 어떤 긴장이 엿보였다면, <계춘할망>의 계춘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유채꽃밭처럼 포근해 보이기만 했다. 손녀를 찾아 눈물짓던 순간마저도.

계춘할망

감독 창감독

출연 윤여정, 김고은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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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는 여자
소영

소영은 노인들을 상대로 한 매춘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녀의 곁엔 가족이 없지만,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들과 그때그때 정을 나누며 막막한 세상을 버틸 힘을 얻는다. <죽여주는 여자>는 서울 곳곳에서 어둑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따라간다. 하여, 우리는 소영의 현재와 종종 듣게 되는 과거를 마주하며 뜨겁게 차오르는 슬픔에 몸을 떨 수밖에 없다. 소영의 본명을 부르는 옛 동료를 어정쩡하게 대면하다가 태연한 척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은 잊어버리기 어렵다.

죽여주는 여자

감독 이재용

출연 윤여정, 전무송, 윤계상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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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