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 <심판>이 2년 만에 한국 극장가에 개봉됐다.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해 연기를 시작한 다이앤 크루거는 <트로이>(2004), <내셔널 트레져> 시리즈,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등을 거쳐 배우로 자리잡아, 2017년 모국인 독일에서 촬영한 <심판>으로 ‘칸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다이앤 크루거를 비롯, 2000년 이후, 즉 21세기 들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들의 면면을 정리했다.
2000_ 비요크 <어둠 속의 댄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1년간의 설득 끝에 <어둠 속의 댄서>의 주인공 셀마 역에 아이슬란드의 뮤지션 비요크를 섭외했다. 무대와 뮤직비디오 등에서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독보적인 존재감을 떨쳐왔지만 정극 연기 경험은 거의 없었던 비요크는, 눈이 멀어가는 와중에도 아들의 시력을 지키려다 살인/절도의 누명을 쓰는 가련한 여인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서글픈 처지에도 노래와 춤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으려는 몸짓이 그렇게 찬란해 보일 수 없었다.
2001_ 이자벨 위페르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의 에리카는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지독한 훈육 덕에 유명 음악학교의 피아노 교수가 된 그는, 잘생긴 외모에 출중한 연주 실력을 가진 학생이 접근하지만 한사코 거부하다가 자신의 변태적인 성향을 드러낸 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자벨 위페르는 흥분을 드러내며 마음을 설득하는 대신, 철저히 에리카의 표면만을 드러내는 위대한 연기로 1978년 <비올렛 노지에르> 이후 23년 만에 두 번째 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02_ 카티 오우티넨 <과거가 없는 남자>
카티 오우티넨은 핀란드의 시네아스트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페르소나다. 1986년 <천국의 그림자>를 시작으로 <성냥팔이 소녀>, <어둠은 걷히고> 등 꾸준히 협업해왔다. 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오우티넨은 하루아침에 돈도 기억도 잃어버린 남자를 돕는 구세군 여인 이루마 역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무미건조한 연기에서도 포근함이 뚝뚝 묻어난다.
2003_ 마리 조제 크로즈 <야만적 침략>
<미제국의 몰락>(1986)의 속편. 시리즈의 주인공 레미는 죽음을 앞두고 가족은 물론, 함께 미국의 몰락을 꾀했던 이들을 불러모은다. 오히려 남보다 먼 아들과도 화해하지만, 레미는 마약을 통해 유대를 쌓은 나탈리에게 안락사를 부탁하고 제 집을 남긴다. 드니 아르캉 감독은 드니 빌뇌브와 아톰 에고이안 영화에서 발견한 마리 조제 크로즈를 캐스팅 한 첫 작품을 통해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2004_ 장만옥 <클린>
장만옥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클린>은 전 남편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작품이다. <이마 베프>(1996)를 통해 처음 만난 그들은 3년간의 결혼생활을 마친 후에 <클린>을 작업했다. 서로 마약을 하던 남편이 죽고 옥살이를 한 뒤 출소한 에밀리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처지에도 ‘깨끗해져서’ 하나뿐인 피붙이 아들과 살기 위해 희망을 더듬는다. 수상 이후 15년이 흐른 사이, 장만옥의 필모그래피는 중편 <베터 라이프>(2010) 하나만 더해진 상태다.
2005_ 하나 라즐로 <프리 존>
하나 라즐로는 1990년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여성 연예인으로 손꼽혔던 배우 겸 코미디언이다. 21세기를 시작으로 오랫동안 활동을 멈추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감독 아모스 기타이의 <프리 존>을 통해 5년 만에 복귀했다. 그해 심사위원장이었던 에밀 쿠스트리차는 <프리 존>에서 요르단 국경을 향해 길을 떠나는 세 주인공으로 호흡을 맞춘 하나 라즐로, 나탈리 포트만, 히암 압바스의 공동수상을 고려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06_ 페넬로페 크루즈 등 여섯 배우 <귀향>
실제로 공동수상이 실현된 건 그 이듬해였다. 여성의 세계에 오랫동안 천착해온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3대에 걸친 여성들의 가족사를 그린 <귀향>의 여섯 배우가 칸의 여왕들이 됐다. 그들이 <귀향>을 가득 채운 어머니와 딸 사이의 자연스러운 공기를 목격한 이들이라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결정. 그 다음해, <귀향>의 페넬로페 크루즈는 스페인 배우로선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2007_ 전도연 <밀양>
드디어 한국 배우가 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전도연의 명연은 비단 아들이 유괴 당하고 결국 주검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절망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종교에 기대어 범인을 용서하려던 와중 그가 스스로 죄 사함 받았다고 말하는 걸 듣고는 믿음을 송두리째 놓아버리는 이의 황폐한 영혼마저 끄집어냈다.
2008_ 산드라 코르벨로니 <리냐 지 빠시>
<중앙역>(1998)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의 성공에 힘입어 할리우드에 진출한 월터 살레스 감독은, 실패하고 브라질로 돌아와 상파울루 빈민가에 사는 가족의 이야기를 내놓았다. 장편영화는 처음 작업한 산드라 코르벨로니는 서로 아버지가 다른 4형제를 홀로 키워낸 어머니의 초상을 보여줬다. 자식들을 보듬는 사랑보다는 상파울루에서의 척박한 삶을 견뎌내야 하는 피로가 더 돋보였다.
2009_ 샬롯 갱스부르 <안티크라이스트>
라스 폰 트리에는 <어둠 속의 댄서> 이후 9년 만에 자기 영화에 출연한 배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안티크라이스트>의 샬롯 갱스부르다. 여자는 남편과의 섹스에 탐닉하던 사이에 어린 아들이 추락사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치유를 위해 에덴의 숲으로 간다. 여성이 고난 받는 이야기와 그 고통을 전시하는 이미지를 발판 삼는 악취미를 가진 폰 트리에의 영화인 만큼, 먼저 적극적으로 출연 의사를 보였던 갱스부르가 <안티크라이스트>를 위한 감당한 표현 수위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2010_ 줄리엣 비노쉬 <사랑을 카피하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처음 외국어로 만든 <사랑을 카피하다>로 1990년대 중반부터 친분을 쌓은 줄리엣 비노쉬와 처음 작업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영국인 작가와 프랑스인 골동품상이 진짜 부부인 척 역할극을 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 비노쉬는 영화 연기는 처음인 오페라 가수 윌리엄 쉬멜을 상대로 사랑의 순간들을 드러낸다. 단순히 로맨스를 시전하는 걸 넘어 진심과 연기 사이의 간극을 표현하는 경지를 볼 수 있다. 비노쉬는 <세 가지 색: 블루>(1993)로 베니스,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로 베를린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사랑을 카피하다>로 칸에서까지 수상하면서 세계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석권하는 최초의 배우가 됐다.
2011_ 커스틴 던스트 <멜랑콜리아>
이쯤 되면 칸 여우주연상 보증수표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라스 폰 트리에가 <안티크라이스트>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새로운 ‘우울증 연작’ <멜랑콜리아>의 주연 커스틴 던스트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안티크라이스트>의 갱스부르가 광기의 기운이 선명했다면, 던스트 특유의 나른한 얼굴은 저스틴이 시달리는 권태와 피로를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지친 기색이 짙어질수록 지구의 종말이 오리라는 확신은 단단해졌다.
2012_ 크리스티나 플루투르 & 코스미나 스타라탄 <신의 소녀들>
2007년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크리스티안 문주가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신의 소녀들>의 두 주역이 공동수상했다. 놀랍게도 크리스티나 플루투르와 코스미나 스타라탄 모두 <신의 소녀들>이 영화 데뷔작이었다. 어려서 고아원에서 같이 자라, 독일에서 수녀가 된 보이치타를 그의 사랑을 되찾고 싶은 알리나가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에서 두 배우는 믿음과 자유, 우정과 사랑 사이의 긴장을 유지해 영화의 테마를 가능케 했다.
2013_ 베레니스 베조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남편 미셸 하자나비시우스가 연출한 <아티스트>(2011)로 널리 주목 받기 시작한 베레니스 베조는, 이란 출신의 아쉬가르 파르하디가 프랑스에서 연출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로 칸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전남편과 현재 애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애인의 아내가 자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생각에 괴로워 하는 복잡한 심경을 구현했다. 진실은 규정될 수 없다는 감독의 소신을 밀어붙인 영화처럼, 베조가 연기한 마리는 끝까지 애매한 태도를 관철한다.
2014_ 줄리앤 무어 <맵 투 더 스타>
<맵 투 더 스타>의 하바나는 불안해 미칠 지경이다. 유명 배우인 어머니에게 학대 받았다고 믿으며 자란 그는 나이 들면서 설곳을 잃어간다고 느끼는 와중, 어머니가 활약했던 영화의 리메이크작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안절부절이다. 불안을 담아내기로는 적수가 없을 줄리앤 무어는 자신이 쇠락하고 있다는 절망에 완전히 반응하는 하바나의 황폐한 마음을 능수능란하게 담는다. 2014년 봄 <맵 투 더 스타>로 (줄리엣 비노쉬에 이어)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한 무어는 이듬해 2월 <스틸 앨리스>로 오스카 트로피를 차지하는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2015_ 루니 마라 <캐롤> & 엠마누엘 베르코 <몽 루아>
예년의 공동수상과 달리, 코엔 형제가 심사위원장이었던 2015년은 각각 다른 영화의 두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루니 마라와 엠마누엘 베르코 모두 로맨스의 주인공을 연기했지만, 처지는 전혀 다르다. <캐롤>의 테레즈가 이제 막 여자를 사랑하는 데에 눈을 뜬 여자였다면, <몽 루아>의 토니는 스키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되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남편에게 매달렸던 기억을 곱씹고 있다. 들뜨지 않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설렘이 선명하게 발산하는 루니 마라의 연기에 온전히 힘을 실어주지 않는 수상 결과가 아쉬운 게 사실이다.
2016_ 재클린 호세 <마 로사>
1980년대 중반부터 TV와 스크린에서 부지런히 활동해온 필리핀 배우 재클린 호세는, 2000년대 말부터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필리핀 감독 브릴란테 멘도사의 <마 로사>로 동남아 배우 최초로 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마닐라의 빈민가에서 네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로사가 부업으로 마약을 팔다가 경찰에 잡히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멘도사 특유의 사실적인 카메라 앞에선 호세는 그저 필리핀의 평범한 엄마로 보인다.
2017_ 다이앤 크루거 <심판>
독일 태생의 다이앤 크루거는 근 15년간 할리우드와 프랑스 영화계에서만 배우로 활동했다. <심판>은 크루거의 첫 모국어 영화다. 폭탄 테러로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게 된 카티아를 연기한 크루거는 한순간에 모든 걸 잃고 괴로워 하고, 범인을 찾아내 그를 응징해야 할지 용서해야 할지 고민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뛰어난 완급조절로 완성했다. 눈물도 말라버린 듯 마른 표정의 크루거는, 한 개인의 상실에서 시작해 무슬림을 향한 차별과 네오나치즘이 아직도 작동하는 독일 사회를 비판하는 <심판>의 원동력이다.
2018_ 사말 예슬라모바 <아이카>
카자흐스탄 배우 사말 예슬라모바는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의 <툴판>(2008)으로 데뷔 했다. 카자흐스탄의 최북단 지역에서 캐스팅 된 비전문배우였다. 이후 10년간 둘의 필모그래피는 멈춰 있었는데, 드디어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신작 <아이카>가 공개됐다. 아이를 낳고도 가난 때문에 병원에 두고 올 수밖에 없는 불법체류 노동자 아이카가 모스크바의 매서운 추위와 노동을 견뎌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영화다. 예슬라모바는 키르기스스탄의 언어를 배워 모스크바의 여성 이주노동자들과 소통하면서 아이카가 되기 위해 준비했고, 무려 6년에 걸친 촬영 끝에 완성된 <아이카>로 배우로서 결실을 맺게 됐다.
2019_ 에밀리 비첨 <리틀 조>
<리틀 조>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향기를 뿜는 꽃을 개발한 싱글맘이 몰래 집에 가져와 아들에게 선물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기괴한 SF영화다. 이상한 꽃을 둘러싼 사건을 맞닥뜨리는 주인공 앨리스를 연기한 에밀리 비첨은 아주 살짝 상기된 얼굴을 유지한 채 그가 느끼는 불안을 억누르면서 <리틀 조>의 오묘한 분위기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비첨의 수상은, 영화제 내내 유력 후보로 거론된 <불타는 여인의 초상>과 <미안해요 리키>의 배우들이 수상하지 못하는 결과로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