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는 '5·18 민주화 운동'

봄이고, 5월 18일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37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저릿함을 안겨준다.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커다란 비중을 기억하려는 듯, 그동안 영화계에서도 당시 광주를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들이 제작됐다. 오는 가을엔 <의형제>, <고지전>을 연출한 장훈 감독이 송강호, 독일배우 토마스 크레취만과 함께 5.18을 그린 <택시운전사>를 선보일 예정이기도 하다.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를 수 있게 된 2017년 5월 18일에 되새길 만한 5.18 관련 영화들을 정리했다.


80년대의 공기가 담긴 두 고전
- <칸트씨의 발표회>, <오! 꿈의 나라>
칸트씨의 발표회

5.18에 대한 최초의 영화는 35분 짜리 단편영화 <칸트씨의 발표회>라는 것이 정설이다.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남자 칸트(철학자 칸트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와 그의 행동을 찍는 사진작가를 따라간다. 칸트라는 사내가 미쳐버린 배경에 바로 5.18이 있음을 드러내면서 살을 더한다. 다소 난해한 극영화인 <칸트씨의 발표회>는, 5.18의 참상을 기록한 자료와 80년대 중반 서울 구석구석이 담긴 다큐멘터리적인 이미지들이 다소 거칠게 배치돼, 현실을 영화적으로 담아내겠다는 젊은 감독의 야심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아시아영화에 천착해온 서구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의 추천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상영되기도 했다.

오! 꿈의 나라

<오! 꿈의 나라>는 한국 독립영화를 언급할 때 첫 머리로 언급되는 영화집단 '장산곶매'의 데뷔작이다. 시민들이 모두 진압당한, 5.18 그 이후가 배경이다. 동두천 기지촌에 사는 지인의 거처에서 정부의 추적을 피하고 있는 주인공은 언론을 통한 왜곡된 정보와 정부에 대한 무분별한 믿음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사람들의 인식, 홀로 도망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때문에 5.18 당시 광주의 풍경은 간간이 짧게 붙는 인서트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오! 꿈의 나라>가 묘사하는 80년대 대한민국이란 지극히 폭력적이다. 백주대낮에 버스에서 기습 검문을 당해 길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패대기쳐지는 시대. 많은 분량이 광주가 아닌 기지촌에서 펼쳐지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강조되는 미군의 그림자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다 다각적으로 대변하기도 한다. 이듬해 장산곶매는 두 번째 영화 <파업전야>를 내놓았다.


그날, 광주의 지옥을 묘사하다
<부활의 노래>, <꽃잎>, <화려한 휴가>
부활의 노래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최초의 35mm 극영화'를 표방한 작품도 있었다. 1991년 작 <부활의 노래>다. 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투옥돼 단식투쟁으로 세상으로 떠난 전남대 전 총학생회장 박관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박기순 등 실존 열사들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전반까지 운동권 학생들의 평범한 삶을 국악의 유흥과 함께 보여주던 영화는 1981년 그들의 삶이 망가진 모습으로 훌쩍 넘어간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말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1년 전을 회상하는 식으로 당시의 아비규환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무너져버린 모습에 그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까지 차곡차곡 담았다. <부활의 노래>는 검열에서 25분을 자르라는 통보를 받고 재촬영과 재편집을 거쳤음에도 결국 이듬해 핵심적인 장면 3분이 삭제된 채 개봉될 수밖에 없었다.

꽃잎


미쳐버린 소녀. 내놓는 영화마다 뜨거운 화두를 던지며 '문제적 감독'이라는 칭호를 달고 다녔던 장선우가 연출한 5.18 영화 <꽃잎>의 주인공이다. 이 소녀가 군부독재에 희생된 광주 시민들의 상징이라는 걸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 시작 10분 만에 소녀가 대낮에도 꾸는 꿈을 통해 그녀가 저 지경이 된 배경에 광주 학살이 있음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꽃잎>은 남루한 차림에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이곳저곳을 헤매는 소녀, 그녀를 학대하다가 결국 측은함을 느끼는 남자, 소녀를 찾아다니는 오빠의 친구들, 그리고 흑백임에도 사람들의 얼굴과 거리 곳곳에 새겨진 시뻘건 핏자국이 선연히 보이는 듯한 학살의 참상을 오가며 소녀의 가냘픈 몸에 짊어진 고통을 뼈저리게 풀어놓는다. 16살에 촬영한 첫 영화로 소녀의 거대한 상처를 유감없이 표현한 이정현의 명연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화려한 휴가

오랜만에 5.18 항쟁의 아비규환을 그린 극영화 <화려한 휴가>는 2007년 한여름 극장가 대목에 도착했다.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7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그해 흥행 순위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역사를 기억하고 위로하자는 대중의 뜻이 통해서겠지만, 가족애와 로맨스가 결합된 대중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라 '대의'만큼이나 '재미'를 확실히 붙든 결과이기도 하다. 정치에 일절 관심 없던 평범한 사람들이 갑자기 군부독재 폭압에 휘말려 싸우는 클라이맥스 역시 전쟁영화 특유의 스펙터클에 기댔다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감정에 의존한다는 한계는 아쉽지만, 당시 벌어진 폭력의 참혹함만큼은 확연히 전달했다.


씻을 수 없는 상처의 풍경
- <박하사탕>, <오래된 정원>, <스카우트>, <26년>
박하사탕

5.18 광주 항쟁을 소재로 끌어안을 때 수많은 감독들은, 그것의 힘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힘 때문에, 우회의 길을 택하곤 했다. 2000년 1월 1일 0시, 한국 대중의 곁에 도착한 <박하사탕>이 그 대표적인 예다. 첫사랑의 마음을 처음 느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남자 영호의 지난 삶을 차츰차츰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는, 마지막 바로 전 챕터에서 5월 광주의 풍경을 묘사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병이었던 영호는 면회 왔다가 헛걸음치는 순임을 지나쳐 한밤 광주역 부근에서 총을 들어야 한다. 거기서 만난 여고생은 살려달라고 하고, 영호는 그 여학생에게 얼른 도망치라고 발버둥을 치다가 그만 그녀를 쏘고 만다. 영호의 고운 손에 처음으로 피가 묻는 순간. 이창동 감독은 자꾸만 굴러떨어져 결국 파멸에 다다르는 비극의 시작에 바로 5.18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오래된 정원

'문제적 감독'으로는 장선우 못지 않은 악명을 떨치던 임상수는 박정희 암살사건을 다룬 <그때 그사람들> 차기작으로 황석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래된 정원>을 연출했다. 블랙코미디의 정서가 퍼져 있던 전작들과 달리, <오래된 정원>은 웃음기를 싹 거둔 멜로드라마다. 도피생활을 하던 현우와 그를 숨겨주는 윤희는 머잖아 사랑을 느끼지만,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그 이유, 시대의 폭력으로 인해 다시 헤어져야만 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관한 서정시"라는 평처럼 낭만적인 터치가 장점인 영화지만, 그만큼 시대에 관한 시선이 뭉툭하다는 인상을 감추기 어렵다.

스카우트

<화려한 휴가>가 큰 성공을 거두고 얼마 후 80년 봄 광주를 그린 또 다른 영화 <스카우트>가 개봉했다. 대학 야구부 직원 호창이 고교야구 톱스타 선동열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로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선동열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그는 그곳에서 7년 전 헤어진 연인 세영을 만난다. 하지만 곧 광주에는 어둠이 밀어닥친다. 여타 영화들과 달리 가벼움을 잃지 않는 <스카우트>는 투쟁 자체를 다루기보다 서울에서 온 호창을 통해 스스로 마음 한켠에 자리한 소중한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시대상 자체에 집중한다. 5.18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 가운데 가장 그 소재에서 자유로운 영화라 할 만하다.  

26년

강풀 만화를 원작으로 한 <26년>은, 80년 5월로부터 26년 후 서울을 그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사람'이 버젓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광주의 건달 진배, 국가대표 사격선수 미진, 서대문서 소속 경찰 정혁은 모두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2세로, 어느 대기업 회장의 제안으로 그 사람을 암살키로 한다. 5.18과 암살 작전이라는 소재를 제대로 엮은 원작 웹툰을 각색한 작품이었고, 여러 제작 난항을 겪고 소셜펀딩을 통해 개봉했지만, 영화 자체는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았다. 정권 교체에 실패할 경우 개봉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의견으로 대선 전에 개봉시켜야 한다는 목표가 뚜렷했다고 알려진 영화는, 순조로운 성적으로 3주차까지 300만을 관객을 목전으로 뒀지만,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현 503)가 당선되자마자 거짓말처럼 관객이 떨어져나갔다.


아직도 광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추다
- <오월愛>

김태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오월愛>는 중국집 배달부 아저씨, 구두 닦는 아저씨, 꽃집 아저씨, 시장 아주머니 등 당시 금남로 현장에 있었고 여전히 광주를 떠나지 않은 시민들이 겪었던 열흘의 기억을 담담히 늘어놓는다. 이런 거 찍어서 밥이 나오냐 옷이 나오냐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현재에도 아물지 않은 가슴에서 꺼낸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들도 있다. 감독은 제목처럼 사랑을 가득 담아 그들의 31년 전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과거를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 커다란 고통을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얼굴들을 알알이 새겼다. 100분 남짓의 러닝타임에 다 담지 못했지만 한분 한분마다 네다섯 시간씩 인생을 새겨들으면서 얻을 수 있었던 환대 때문에 가능했던 천금 같은 기록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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