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패인 주름, 짙고 무거운 인상. 허준호를 처음 보면 느껴지는 감상이다. 어쩐지 중후한 역할만 맡았을 것 같은 그이지만, 그의 역사를 찬찬히 훑어보면 그에게 의외의 면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독도에 관한 질문을 하자 "기분이 어떻습니까?"라며 일본 기자의 펜을 뺏었던 강직한 성격의 그에게도 질풍노도의 시기는 있었고, 성격파 배우로 자리매김하며 수많은 영화에 등장한 그에게도 무명 시절은 있었다. 오늘은 영화 <모가디슈>(2021)에서 또 한 번 깊은 연기를 선보여준 허준호의 과거를 짤막하게 훑어보려 한다. 의외의 TMI도 있으니 끝까지 읽어주시길!
1. 아버지는 배우 원로배우 허장강.
허준호는 아버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배우다. 그는 한국 영화가 꽃피우던 60년대,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를 가졌던 배우 허장강의 아들이다.
원로배우 허장강은 짙은 눈썹에 선이 굵은 이목구비로 남다른 카리스마가 특징인 배우였다. 그는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제는 잊혀진 영화 <살살이 몰랐지>(1966)의 대사다. 낯간지러운 대사를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뻔뻔하게 소화해내는 그는 주역을 많이 맡진 못했지만, 어느 영화에도 빠지지 않는 명품 조연이었다.
그러나 허준호는 아버지의 명성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오롯이 자신의 실력으로 대중에게 인정받기 위해 20대 시절을 무명 시절로 보냈다.
- 살살이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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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화랑
출연 서영춘, 도금봉, 전영주
개봉 1966.00.00.
2. 무명배우가 청룡영화제에 서기까지.
그의 뚝심 있는 성격처럼 그는 한 번에 뜨기보다 조연으로 차근차근 얼굴을 알렸고, 9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1996년, 그는 영화 <테러리스트>를 통해 제34회 대종상 남우조연상과 제16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그중 청룡영화상을 수상했다. 재능과 성실함이 이룩해낸 쾌거였다.
이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진 그는, 2004년 <실미도>에 출연해 다시 한 번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영화제에 섰다. <실미도>로 그는 <테러리스트> 때에는 놓쳤던 대종상 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영화에서 겉은 냉철하고, 차갑지만 속은 정이 깊었던, ‘겉바속촉’ 캐릭터 조돈일 중사 역을 맡았다. 훈련병들의 거수 경례와 떨어진 사탕봉지 장면은 <실미도>를 사랑하는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 청 블루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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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규형
출연 조민수, 천호진
개봉 1986.09.18.

-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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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영빈
출연 최민수, 이경영, 염정아
개봉 1995.05.13.

- 실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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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강우석
출연 설경구, 안성기, 허준호, 정재영
개봉 2003.12.24.
3. 시청률 57퍼센트 드라마의 주인공!
90년대 중반 이후 브라운관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던 허준호는 드라마 <보고 또 보고>(1998)를 통해 완벽하게 국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임성한 작가의 최고 히트작인 <보고 또 보고>는 역대 일일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이었던 57.3%를 기록하며 국민 드라마 타이틀을 얻었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와 KBS 뉴스 9의 시청률을 앞섰으니, 이 드라마의 파급력이 얼마나 굉장했을지 감이 잡힌다.
허준호는 드라마에서 박씨 일가의 차남 박기풍 역을 맡아 애처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강인하고 진한 인상의 허준호가 아내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 그야말로 새로운 모습이었다.
여담으로, 지금은 도무지 상상도 안되지만, 데뷔 초에는 코믹한 연기도 한 적이 있었다. 처참한 평가와 성적으로 이제는 잊혀진 조폭 영화 <4발가락>(2002)에서 아우디 역을 맡았다. 드라마 <왕초>(1999)의 발가락은 기억나지 않을, 다른 의미로 대단한 영화였다.

- 보고 또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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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장두익
출연 김지수, 윤해영, 정보석, 허준호, 박용하, 정욱, 김창숙, 사미자, 이순재, 성현아
방송 1998, MBC

- 4발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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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계윤식
출연 허준호, 이창훈, 박준규, 이원종
개봉 2002.05.17.
4. 6년 간의 공백기
이후로도 드라마 <왕초>(1999), <호텔리어>(2001), <올인>(2003) 등 굵직한 작품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쌓은 그는 드라마 <주몽>(2006)에서 해모수 역을 맡아 큰 사랑을 받았다. 3회 분량에서 시작했지만, 시청자들의 바람에 의해 분량이 늘어난 사례로, <주몽>의 초반 인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는 2010년, 영화 <이끼> 이후 돌연 6년간의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드라마로서는 2007년 <로비스트>가 마지막이었기에, 9년 동안 공백기를 가진 셈이다.
긴 휴식기 동안 그는 미국 LA에 위치한 한인라디오 DJ로 활약하거나 미국 전역에서 전도사 활동을 하는 등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에게 힘든 시간이었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 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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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장용우
출연 차인표, 송윤아, 김남주, 허준호
방송 1999, MBC

- 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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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유철용
출연 이병헌, 송혜교, 지성, 박솔미, 허준호, 이덕화
방송 2003, SBS

- 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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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이주환, 김근홍
출연
방송 2006, MBC

-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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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강우석
출연 정재영, 박해일, 유준상, 유선, 허준호, 유해진, 김상호, 김준배
개봉 2010.07.14.
5. 운명 같은 재회와 사랑, 그리고 복귀.
공백기를 갖는 동안 그는 운명과도 같은 재회를 하게 된다. 그의 측근 중 한 명은 “허준호가 과거 젊은 시절 좋은 감정으로 지냈던 옛 인연과 오랜만에 우연히 재회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달래주며 지내오다가 결혼에 이르게 됐다. 특히 허준호가 힘든 시기였는데 여성분이 큰 힘이 돼 줬다”며 상황을 전했다.
다시 연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가정에 찾아온 평화 덕분인 것 같다고 또 다른 지인이 의견을 냈다. 그는 2016년, KBS 드라마 <뷰티풀 마인드>로 6년 만에 배우 복귀를 했고, 그 이후부터는 다시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이다.

- 뷰티풀 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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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모완일, 이재훈
출연 장혁, 허준호, 오정세, 류승수, 유재명, 박세영, 윤현민, 박소담, 심이영, 동하, 김도현, 전성우, 이재룡, 하재숙, 모리유, 장기용
방송 2016, KBS2
6. 소신 있는 배우, “기분이 어떠세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캡쳐로 보았을 허준호의 “기분이 어떠세요?”. 허준호는 2009년 5월 뮤지컬 <겜블러> 공연 홍보를 위해 일본에 방문했었는데, 일본 기자 중 한 명이 그에게 한일 간의 독도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 허준호는 드라마 <올인>으로 일본 내에서 갑작스레 큰 인기를 모은 상황이었다. 일본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이제 막 발을 들인 그에게 기자의 질문은 굉장히 얄궂었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인기, 일본 시장과 같은 건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다는 듯, 해당 기자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펜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에 취재진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질문을 던진 기자는 허준호의 뜻을 알고 “미안합니다. 볼펜을 돌려주세요”라며 사과했다.
허준호의 “기분이 어떠세요?”는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회자되며 그의 소신과 뚝심, 강직함을 보여주고 있다.
7. 춤도 잘 추고요,
본격적인 허준호에 관한 TMI. 그는 사실 서울예대 무용과를 졸업했다. 강직하고 굳건해만 보이는 허준호지만, 그에게도 사춘기는 있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말썽도 많았고 방황의 시간도 길었다고 한다. 무용과를 택한 이유도 단순히 공부보단 몸 쓰는 게 좋아서 택했다고. 무용에 대한 열정이 크지 않은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안에서 겉도는 게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무용과 입학 후에도 방황을 멈추지 못했는데, 그의 안에 있던 끼를 알아본 서울예대 교수님이 그를 다잡아 주었다. 그는 교수님의 지도 덕에 무용과를 졸업하고, 다시 한번 연극과에 입학해 뮤지컬을 공부하며 연기자라는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 이때, 그를 잡아준 교수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인이셨다고 한다.
8. 노래도 잘 해요.
서울예대 무용과 졸업 후, 서울예대 연극과에 다시 입학한 그는 뮤지컬 배우를 꿈꿀 만큼 노래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배우다. 실제로 그는 1994년 동료 김대희와 함께 가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2000년 드라마 <나쁜 친구들>에서는 출연진들과 함께 O.S.T를 부르기도. 시원하게 내지르는 창법이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하다.
9. 다시 카메라에 서고, 달라진 허준호.
허준호는 현재 전성기를 맞이했다. 과거엔 하루 2∼3갑씩 피우던 담배도 끊고, 운동과 묵상으로 자신을 단련했다. 배우로서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시나리오 읽기와 배역 탐구도 멈추지 않았다. 목회자가 되고자 했다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 그는 수도사와 같은 단순한 생활 패턴을 유지하며 배우로서 단단한 힘을 길렀다. 데뷔 때 힘을 발휘했던 그의 성실함이 그의 재기에 다시 한번 힘을 보탠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모가디슈>에서 그는 금연초를 피웠다. 강혜정 대표는 “회식자리에선 술 대신 콜라를 마셨다”며 “인간미가 없다 싶을 정도로 자기관리가 무시무시하면서도 선배로서 리더십이 있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는 활을 쏘는 장면 촬영 도중 손에 깊은 상처가 났는데, 촬영 중 이를 말하면 연출자가 부담을 갖게 될까 단 한 번도 티를 내지 않았다고.
10. 아버지 허장강, 아들 허준호.
다시 아버지 허장강에 관한 이야기다. 배우 허장강은 성격파 배우로 한국의 험프리 보가트로도 불렸다. 그리고 아들 허준호는 긴 무명 시절과 공백기를 지나, 성격파 배우로 완벽히 자리매김 했다. 답습이 아닌, 대를 이었다는 느낌이다.
특정한 역할의 전문배우가 되면 배우로서 길이 쉬워진다. 마치 잘 닦인 운동장 트랙 같다. 그처럼, 쉽고 짧다. 성격파 배우가 되면 매번 새롭게 자신의 길을 파야 되기에 어렵다. 밀림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참고해야 할지, 내 등 뒤도, 눈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로지 나를 믿고 가야 한다. 어렵고, 무진하다. 허준호는 후자를 택했다. 도무지 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모가디슈>에서도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허준호. 연기 경력 30년이지만, 여전히 변할 게 남아 있다. 그는 극 중 주 소말리아 북한 대사관의 림용수 대사 역을 맡아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선보일 예정이다.

- 모가디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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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류승완
출연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구교환, 김소진, 정만식
개봉 2021.07.28.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