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개봉한 홍상수의 <소설가의 영화>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는 점이다. 이 두 작품 이전에도 베를린 심사위원대상의 수상작들의 살펴보면 훗날에도 길이 남을 명작들이 눈에 띈다. 


1993년
<아리조나 드림>
Arizona Dream

유고슬라비아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는 <아빠는 출장중>(1985)과 <집시의 시간>(1988)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연달아 수상하면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성장했다. <아리조나 드림>은 그 도약의 증거라 할 만한 프로젝트다. <가위손>(1993)으로 스타덤에 오른 조니 뎁을 전면에 내세워, 자동차 판매상인 삼촌과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중년 여성과 생활하는 20대 청년의 성장기를 그렸다. 1991년 촬영됐지만 2년이 지난 후에야 베를린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된 <아리조나 드림>은 그해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지만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의 반응은 호불호가 뚜렷했다. 쿠스트리차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만든 <언더그라운드>(1995)가 다시 한번 칸 황금종려상을,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1998)가 베니스 감독상을 받으면서 유럽 3대 영화제를 섭렵하게 됐다.


1995년
<스모크>
Smoke

할리우드에 진출한 중국계 감독 1세대에 속하는 웨인 왕은 다큐멘터리의 터치가 물씬한 독립영화 <첸의 실종>(1982)을 시작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비슷한 부류로 소개되는 이안이나 오우삼과 달리, 웨인 왕의 영화는 줄곧 미국 내 중국인의 생활상에 초점을 맞췄고 네 중국인 모녀를 그린 <조이 럭 클럽>(1993)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1995년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스모크>는 웨인 왕의 시선이 중국계가 아닌 뉴욕의 백인과 흑인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의 소소한 삶을 세밀하게 포착해냈다. 하비 케이틀,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윌리엄 허트, 포레스트 휘태커 등 대배우들이 연기한 뉴요커들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보는 맛이 상당하다.


1997년
<하류>
河流
The River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차이밍량은 두 번째 영화 <애정만세>로 1994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애정만세> 이후 3년 만에 발표한 새 영화 <하류>는 데뷔작 <청소년 나타>의 주인공이었던 샤오강과 그의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 이강생과 미아오 티엔이 그대로 부자로 출연한다. 샤오강의 어머니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아시아 가족영화의 푸근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퇴직한 아버지는 게이 사우나에 드나들고, 포르노 비디오 업자와 연애하는 어머니는 귀가하면 포르노만 보고, 아들 샤오강은 영화 촬영장에서 시체를 연기한다. <하류>의 후반부는 어느날 갑자기 목이 아프기 시작한 샤오강이 아버지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여정인데, 차이밍량은 실제 배우 이강생이 목에 통증을 느끼는 것에서 이와 같은 설정을 착안했다. 이강생과 미아오 티엔은 차이밍량의 또 다른 작품 <거기는 지금 몇 시니?>(2001)에서도 부자 역을 맡았다.


2003년
<어댑테이션>
Adaptation

90년대 최고의 뮤직비디오/CF 감독으로 군림하던 스파이크 존즈가 2003년 발표한 두 번째 영화 연출작. 영화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1999)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 그는, 배우 존 말코비치의 의식 속으로 들어간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기가 막히게 전개하는 시나리오를 완성한 작가 찰리 코프먼와 다시 한번 손잡고 <어뎁테이션>을 만들었다. 비단 코프먼이 각본을 쓰는 걸 넘어, 서사 자체가 1인2역을 소화한 니콜라스 케이지가 찰리 코프먼과 쌍둥이 형제 도널드가 수잔 올린의 소설 <난초도둑>을 영화화 하는 과정일 정도로 코프먼의 영향력은 각별하다. 실존인물인 수잔 올린을 연기한 메릴 스트립은 <어뎁테이션>이 아닌 또 다른 베를린 경쟁부문 후보작이었던 <디 아워스>(2003)로 니콜 키드먼, 줄리앤 무어와 함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11년
토리노의 말
A torinói ló
The Turin Horse

웃음기라곤 없는 흑백 이미지, 고도의 카메라워크, 기나긴 롱테이크 등을 끈질기게 고집해온 헝가리 시네아스트 벨라 타르의 필모그래피는 2011년에 내놓은 은퇴작 <토리노의 말>을 끝으로 멈춰 있다. 철학자 니체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을 보고 오열하며 마부를 말렸다는 일화에 착안해, 말과 마부 그리고 그의 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린 작품이다. 2시간 26분의 러닝타임이 단 30개의 장면으로만 구성될 만큼 극단적인 롱테이크가 돋보이는데, 쇼트 하나하나에 꾹꾹 담긴 이미지의 힘은 영화가 여전히 위대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마치 말과 함께 끌려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첫 장면부터 세상이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이는 마지막 장면까지 숨막히는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2014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우리 시대의 비주얼 마스터 웨스 앤더슨의 8번째 장편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베를린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다.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세계 최고의 부호 마담 D(틸다 스윈튼)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다녀간 지 며칠 후 살해당하고 유언으로 명화를 호텔 지배인 구스타브(레이프 파인즈)에게 남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로맨스와 추적극이 어우러진 서사가 웨스 앤더슨 특유의 자로 잰 듯한 구도와 수평/수직 이동, 눈이 시릴 듯한 컬러의 향연 아래 펼쳐져 뭇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다양성 영화' 규모로 개봉해 80만 명(2014년 당시 다양성 영화 개봉작의 경우 5만 관객을 넘기면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고 평했다)이 넘는 관객을 동원해 웨스 앤더슨 애호가 꽤나 보편적인 취향이 됐다.


2020년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

Never Rarely Sometimes Always

국내 극장가에선 정식으로 개봉되지 않은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는 2020년 최고의 영화를 꼽는 리스트에 빈번하게 포함된 작품들 중 하나였다. 한국 관객에겐 낯선, 미국의 여성감독 엘리자 히트먼이 연출한 이 영화는 90년대 펜실베니아 시골에 사는 17살 소녀 오텀을 따라간다. 의도치 않게 아이를 가진 걸 알게 된 오텀은 펜실베니아에선 중절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약을 먹고 배를 때려 보기도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사촌인 스카이라와 함께 수술을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어른과 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낯선 공간을 전전하며 서로 의지해야 만하는 두 소녀의 여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어텀을 연기한 시드니 플래니건은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가 생애 첫 연기였다.


2021년
우연과 상상
偶然想像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일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2021년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도약을 보여준 감독이라 할 만하다. 시작은 처음 초청된 베를린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쥔 <우연과 상상>이었다. 제목 그대로 '우연'과 '상상'이라는 키워드를 활용한 3개의 짧은 이야기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문은 열어둔 채로', '다시 한번'을 모았다. 우연과 상상이 맞물리는 흥미로운 내러티브도 좋지만, 대사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순간의 긴장과 무드를 섬세하게 잡아내는 하마구치의 연출력에 탄복하게 된다. 베를린 영화제 3개월 후, 하마구치는 또 다른 장편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2년 전 봉준호의 <기생충>처럼) 작품상/감독상을 비롯한 여러 부문 후보에 올라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의 젊은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2022년
소설가의 영화
The Novelist's Film

홍상수의 영화 세계는 직접 촬영감독의 역할까지 맡이 시작한 <인트로덕션>(2021)을 기점으로 보다 자유로워졌다. 작년 베를린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인트로덕션>과 배우 이혜영과 처음 작업한 <당신얼굴 앞에서>를 잇는 신작 <소설가의 영화>는 두 전작에 출연한 배우들로만 캐스팅을 꾸려 촬영한 작품이다. 오랫동안 신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 준희(이혜영)가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후배를 만나러 서울 근교에 오고, 그 날 평소 눈여겨 보던 배우 길수(김민희)를 만나 같이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동시대성은 도통 묻어나지 않았지만, 인물들이 마스크를 쓰고 벗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띄어 코로나19 팬데믹의 시대라는 걸 새삼 상기시킨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