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데이가 모 대기업의 상술이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빼빼로데이를 챙기는 문화는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11월 11일을 보면 움찔하게 되는 이유는 어릴 적 좋아했던 사람에게 ‘나와 함께 하자’는 의미로 빼빼로를 내던지듯 전해주었던 추억 때문일까. 아니면 나란한 숫자들이 꼭 연인을 보는 듯하기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빼빼로데이는 연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된다. 평소에는 낯간지러워서, 시간이 없어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우리 연인이 놓인 상황과 감정을 빼빼로데이를 핑계 삼아 이야기해보자. 연애 시기에 꼭 맞는 영화와, 이야기해보면 좋을 주제를 함께 적어내릴 예정이다. 1일차 풋내기 커플부터 5년 차 장기연애 커플까지, 빼빼로데이를 핑계 삼아 영화 한 편과 함께 속내를 터놓아보는 건 어떨까. 


1일 ~ 100일 차커플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할거야?”
<뷰티 인사이드>

<뷰티 인사이드>(2015)

1일에서 100일 사이의 커플은 닿으면 데일 듯, 가장 뜨거운 사이다. 그게 곧 ‘가장 사랑하는 사이’를 의미하진 않지만 가장 열정적임에는 분명하다. 사랑의 삼각형에서 친애와 희생보다는 열정이 가장 도드라지는 시기랄까.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없는 시기. 이때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만약에’ 게임이다. “나 사랑해?”, “내가 살이 엄청 쪄도?”, “내가 못생겨져도?”, “내가 성별이 바뀌어도?”, “그러면, 내 외모가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해도 나를 알아볼 수 있어? 사랑할 수 있어?” 

<뷰티 인사이드>(2015)는 18번째 생일 이후로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바뀌는 남자 김우진과 그런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이어나가는 이수(한효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랑해, 오늘의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이라는 포스터 속 문구처럼 <뷰티 인사이드>는 매일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우진을 사랑하면서도 혼란스러워하는 이수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세상 속에서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는지가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감정 표현이 그리 섬세하진 않다. 오히려 대중적인 문법으로 사건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기 때문에 영화와 친하지 않은 연인도 편하게 볼 수 있다. 

뷰티 인사이드

감독 백종열

출연 한효주, 김대명, 도지한, 배성우, 박신혜, 이범수, 박서준, 김상호, 천우희, 우에노 주리, 이재준, 김민재, 이현우, 조달환, 이진욱, 홍다미, 서강준, 김희원, 이동욱, 고아성, 김주혁, 유연석

개봉 201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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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일 ~ 365일차 커플

“이상형과 연애하면 행복할까?”
<루비 스팍스>

<루비 스팍스>(2018)

체감상 가장 많이 헤어지는 시기가 6개월에서 1년 쯤이다. 사랑의 열정은 ‘이 사람은 나와 꼭 맞아’, ‘완벽한 사람이야’라는 환상에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얄팍한 믿음에 균열이 갈 때 우리는 연인과 다툼을 한다. ‘너 변했어’라는 말과 함께. 완벽한 이상형일거라 굳게 믿었던 그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실망시키는 걸까. 사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이상형이라는 틀에 상대방을 끼워 넣는다. 그 결과는? 다이나믹 듀오의 ‘죽일 놈’ 가사로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네 잔소리는 넥타이처럼 내 목을 조여서 날 얌전하게 만들었지. 그래서 그게 좋아 보였어. 그때 내 속은 한참 뒤틀리고 꼬였어”

그렇다면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이상형과 연애하면 연애에 아무 문제 없을까? <루비 스팍스>는 이러한 상상에서 출발한 영화다. 천재작가 캘빈(폴 다노)은 꿈 속에서 만난 이상형 루비(조 카잔)를 주인공으로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완벽한 이상형이라 생각했던 루비가 소설을 찢고 눈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연인으로.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게 된 캘빈은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루비와의 연애에 몰입하지만, 그가 소설에 적지 않은 부분을 루비가 마음대로 움직이며 행동하자 결국 다시 타자기 앞에 앉는다. 한 생명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소설가가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지 않나. “내가 썼지만 그들이 알아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소설 속 인물마저 저마다의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데 상대방과 나를 동일시 여기며 통제하려는 오류를 범하게 되면 결국 그 끝은 이별일 뿐이다. 

루비 스팍스

감독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출연 폴 다노, 조 카잔

개봉 2018.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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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 3년

“썸머가 나쁜 X이야?”
<500일의 썸머>

<500일의 썸머>(2010)

때로는 남의 연애를 두고 토론하는 게 서로의 가치관을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3년 차 쯤 되면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의외로 모르는 게 많은 시점. 초보운전 딱지를 뗐을 때가 가장 사고 위험이 높다던데, 1 ~ 3년차가 딱 그때쯤이 아닐까 싶다. 서로를 잘 안다고 자만하지만, 사실은 초보 딱지를 겨우 뗀 시기. 이럴 땐 우리의 얘기를 하기보다 남의 연애를 이야기하며 우리를 돌아보는 게 좋다. 

그런 의미에서 <500일의 썸머>는 21세기의 로맨스 명작이자 연애의 바이블이다. 크레딧이 올라간 다음,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된다고 해도 좋을 만큼 “썸머는 나쁜 X인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서로의 경험에 따라, 또 가치관에 따라 같은 장면을 다르게 본다. <500일의 썸머>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장면의 의미가 달라지는 영화로, 굉장히 입체적이다. 톰의 시선에서는 즐길 거 다 즐기고 버려버린 썸머가 나쁜 X이지만, 썸머의 입장에서 보면 톰은 치기어리고 믿을 수 없는 상대였다. 당신은 톰인지, 썸머인지. 그리고 당신의 연인은 어떤 쪽인지 뜨겁게 토론해보는 건 어떨까. 나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연인의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500일의 썸머

감독 마크 웹

출연 조셉 고든 레빗, 주이 디샤넬

개봉 2010.01.21. / 2021.05.26.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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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 5년

“우리는 권태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1)

연인이 가장 권태롭게 느껴지는 시기, 3 ~ 5년 차. 5년 차 쯤 되면 연인의 꼬질꼬질한 모습이 조금 더 익숙해질 시기다. 처음과 같은 설렘은 없고, 그 자리엔 편안함과 권태로움이 들어앉았다. 만약 동거를 하고 있다면 섹스리스까지 찾아왔을 확률이 높다. 운명이라 느꼈던 연인이 평범하게 보이기 시작한다면 연애에 빨간 불이 들어왔음을 스스로 직감할 수 있다. 결혼까지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고 있다면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해진다. 배우자 자리에 이 사람을 놓아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을지, 도무지 갈피가 서지 않을 때.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 헤어질까?”만 주구장창 얘기하고 있다면. 그러지 말고 연인과 대화를 해보길 추천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장기 연애 커플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막차를 놓친 주인공 무기(스다 마사키)와 키누(아리무라 카스미)는 첫차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마치 잃어버렸던 퍼즐 한 조각을 찾은 것처럼 서로 꼭 닮아 있음을 알게 되고 운명과도 같은 연애를 시작한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유지야!”라는 말처럼, 두 사람은 꽃다발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시작을 유지할 수 있을까. 대학이라는, 어쩌면 가장 연애하기 좋은 틀 안에서 놀던 두 사람은 취업 시장에 뛰어들면서 점차 서로에게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감독 도이 노부히로

출연 아리무라 카스미, 스다 마사키, 키요하라 카야, 호소다 카나타

개봉 2021.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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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이상

“우리도 사랑일까?”
<우리도 사랑일까>

<우리도 사랑일까>(2012)

“우리도 사랑일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건 의외로 오래된 연인이다. 특히 5년 이상된 연인들은 이게 정인지, 우정인지, 동지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뭉툭한 감정이 사랑인건지 알 수가 없다. 잘 벼려진 칼날처럼 매섭고, 맹렬하게 사랑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이가 빠진 칼처럼 긴장감이 없다. ‘이것도 사랑이지’라고 믿고 싶다가도 나에게 다가오는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는 이성이 맥을 못춘다. 오래된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다시 긴장감 넘치는 그 애정의 소용돌이에 나를 밀어넣고 싶은 마음 반. 영원히 한 사람만 바라볼 수 있다면 사랑에 대한 담론은 없었을 테다. 우리는 나약하고, 욕심 많은 인간이기에 사랑이 있음에도 또 다른 사랑을 갈망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진 내가, 우리가 과연 사랑일까? 

<우리도 사랑일까>는 이런 장기간 연애 / 결혼 커플이 직면하는 문제를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결혼 5년 차 프리랜서 작가 마고(미셸 윌리엄스)가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대니얼(루크 커비)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고, 대니얼 역시 마찬가지다. 여행이 끝나면 사라질거라 믿었던 감정은 설상가상 대니얼이 마고의 앞집에 산다는 걸 알게 되면서 점차 커지기만 한다.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남편 루(세스 로건)와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대니얼에 대한 감정을 주체하기 버거운 상황.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고의 삶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리도 사랑일까

감독 사라 폴리

출연 세스 로건, 미셸 윌리엄스

개봉 2012.09.27. / 2016.09.22.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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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