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한국인이 좋아하는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테넷>(2020) 이후 3년 만에 신작 <오펜하이머>로 돌아왔다. <오펜하이머>는 2005년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에 의해 집필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바탕으로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 일부를 조명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맨해튼 프로젝트'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원자폭탄을 개발하기까지의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와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의 대립, 대량 살상 무기인 핵폭탄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윤리적 고뇌를 담았다.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채운 푸른 눈동자의 주인공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모두 챙겨 봤다면 한 번쯤은 봤을 그 배우, 킬리언 머피가 연기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페르소나로 익히 알려진 킬리언 머피는 페르소나임이 무색하게도 이번 작품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중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그간 빌런 또는 이름 없는 대역을 거쳐왔지만 그 어느 배우보다 놀란 감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킬리언 머피.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 속 그의 얼굴들을 모아봤다. 

오펜하이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조쉬 하트넷, 케이시 애플렉, 라미 말렉, 케네스 브래너

개봉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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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
조나단 크레인/스케어크로우(허수아비) 역

<배트맨 비긴즈>
<배트맨 비긴즈>

크리스토퍼 놀란과 킬리언 머피의 첫 만남은 무려 약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05년 개봉한 <배트맨 비긴즈>가 그 시작이기 때문이다. 대니 보일 감독의 좀비 호러 영화 <28일 후>에서 킬리언 머피는 주인공 짐 역을 맡았는데, 빡빡 짧게 밀어버린 머리에 광기 어린 눈을 한 킬리언의 모습을 본 놀란 감독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마침내 킬리언 머피가 <배트맨 비긴즈> 브루스 웨인 역으로 오디션을 보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나게 된다. 호텔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놀란 감독은 킬리언 머피에 대해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창의적으로 항상 흥미롭게 해석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오디션에 대한 비하인드도 있다. 킬리언 머피는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인데, 오디션 당시 미국 억양이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후문. 그는 오디션을 보면서도 자신이 배트맨 역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지만 놀란이 배트 수트를 입어보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놀란은 "난 정말 킬리언 머피와 함께 세트장에 가고 싶었고 영화에 데려가고 싶었다"라고 고백했다. 결국 피팅 테스트까지 했지만 브루스 웨인 역과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해당 역에 크리스찬 베일을, 킬리언 머피는 메인 빌런 조나단 크레인 역으로 캐스팅하게 된다. 

<배트맨 비긴즈>

킬리언 머피는 <배트맨 비긴즈>에서 정신과 담당 의사이자 공포 가스로 고담을 위협하는 빌런 조나단 크레인/스케어크로 역으로 출연했다. 손목에 있는 유독가스로 공포감을 심어주며 미치광이에 이르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인물로, 결국 배트맨에 의해 스스로 가스에 노출되어 허무하게 퇴장하고야 만다. 극 중에서 킬리언 머피는 설정 상 안경을 쓰고 등장하는데, 킬리언 머피의 에메랄드빛 파란 눈동자에-킬리언 머피는 눈이 예쁘기로 유명한 배우다-매료된 놀란 감독이 안경을 벗게 하는 이유와 방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후문이다.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

비록 아쉽게 퇴장하게 됐지만 놀란 감독의 애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놀란 감독은 이어 후속작인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킬리언 머피를 등장시키기에 이른다. <다크 나이트>는 영화 초반 주차장 시퀀스에서 스케어크로우-조나단 크레인- 일당과 체첸 일당 사이의 마약 거래를 다루는데, 이때 다시 한번 배트맨에게 체포당하며 복면이 벗겨지고 얼굴을 드러낸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베인(톰 하디)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고담 시티에서 판사 행세를 하며 고든(게리 올드만)에게 추방에 의한 사형을 선고하는 모습으로 출연한다. 비록 카메오였으나, 스케어크로우 등장 신 중 놀란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신이라고. 그렇게 킬리언 머피는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에 모두 출연한 유일한 빌런이자 DC 코믹스 빌런을 3편 연속으로 연기한 최초의 배우로 남았다. 

배트맨 비긴즈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마이클 케인, 리암 니슨, 케이티 홈즈, 게리 올드만, 킬리언 머피, 톰 윌킨슨, 룻거 하우어, 와타나베 켄, 마크 분 주니어

개봉 200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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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아론 에크하트, 마이클 케인, 매기 질렌할, 게리 올드만, 모건 프리먼, 모니크 커넨, 론 딘, 킬리언 머피

개봉 20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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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라이즈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마이클 케인, 게리 올드만, 앤 해서웨이, 톰 하디, 마리옹 꼬띠아르, 조셉 고든 레빗, 모건 프리먼, 리암 니슨, 킬리언 머피

개봉 201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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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로버트 피셔 역

<인셉션>

<메멘토>,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 등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인셉션>은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명실공히 놀란 감독의 최고작이다.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사이 완성된 이 작품에서도 당연하게 우리는 킬리언 머피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다(<인셉션>에 관한 대담에서 놀란 감독은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로 함께 일하면서 킬리언 머피와 다시 함께 일하기를 진심으로 열망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킬리언 머피는 사이토(와타나베 켄)의 의뢰를 받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타깃이 자 에너지 기업 '피셔 모로우'의 후계자 로버트 피셔 역을 맡았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재벌가 도련님으로, 예민하고 유약해 보이면서도 때론 강단 있는 캐릭터를 섬세하게 연기해 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인셉션>
<인셉션>
인셉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와타나베 켄, 조셉 고든 레빗, 마리옹 꼬띠아르, 엘리엇 페이지, 톰 하디, 킬리언 머피, 톰 베린저, 마이클 케인

개봉 201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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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
떨고 있는 병사 역

<덩케르크>

앞서 네 작품 속 크리스토퍼 놀란의 카메라에 포착된 킬리언 머피의 얼굴을 잘 살펴보자. 그는 총명한 의사의 가면을 쓴 불안한 내면의 소유자이자(<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겉으론 바르고 단단해 보이지만 아버지와의 오랜 불화와 정서적 학대로 예민하고 유약한 내면을 가진 성인 남성의 모습(<인셉션>)을 주로 연기해냈다. 이러한 이미지는 <덩케르크>에서도 한층 더 심화되어 이어진다. 

<덩케르크>
<덩케르크>

제2차 세계대전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모티브로 한 전쟁 영화 <덩케르크>에서 킬리언 머피는 이름조차 없는 '떨고 있는 병사(Shivering Soldier)' 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유보트의 공격으로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고,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덩케르크로 향하고 있던 도슨(마크 라이언스)의 문스톤 호에 구조된다. 덩케르크의 해안가로 향한다는 도슨의 말에 한껏 불안한 모습으로 당장 배를 돌리라 소리치지만 실패하고, 극도의 불안함을 통제하지 못해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조지(배리 케오간)에게 부상을 입히고야 만다. 국가의 승리와 동시에 각자의 생존을 도모해야만 하는 전쟁터에서 킬리언 머피가 맡은 떨고 있는 병사 역은 전쟁터에 차출되어야 했던 수많은 군인들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비춰진다. 때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바닷속에서 절박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이를 냉정하게 외면하지만,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끝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는 전쟁터의 군인. 킬리언 머피는 이성적으로 강단 있는 면모와 연약함 그 사이를 오고 가며 전쟁터의 보편적인 인간 군상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여담으로, 킬리언 머피가 맡고 싶었던 배역은 떨고 있는 병사가 아닌 스핏파이어 파일럿이었다고. 캐스팅을 두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킬리언 머피에게 전화해 "배 위에서 PTSD로 고통받는 작은 역할에 당신이 필요하다. 괜찮다면 대본을 보내겠다"라고 말했고, 대본을 읽은 킬리언 머피는 놀란에게 "대신 스핏파이어 파일럿 역할을 할 수 없냐"라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덧붙여 킬리언 머피는 "하지만 그보다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이번에도 머리에 뭘 써야 하냐'였던 것 같다"라며 캐스팅 비하인드를 전했다(킬리언 머피는 유독 놀란 작품에서 머리에 뭔가를 쓰고 나오기로 유명하다).  

<다크 나이트>
덩케르크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핀 화이트헤드, 마크 라이런스, 톰 하디, 해리 스타일스, 아뉴린 바나드, 톰 글린 카니, 잭 로던, 배리 케오간, 케네스 브래너, 킬리언 머피

개봉 202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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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

<오펜하이머>

그리고 마침내 <오펜하이머>다. 앞서 설명했듯,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맡아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하기까지의 오펜하이머의 주 업적과 핵, 수소폭탄에 반대하자 공산주의자이자 좌익 과학자였다는 이유로 스파이 의심을 받게 되는 이후의 삶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영화는 컬러 화면인 '핵분열'에서 오펜하이머의 주관적 시점을, 흑백 화면인 '핵융합'을 활용해 스트로스의 시점에서 보는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영리하게 다뤄냈다. 영화를 촘촘하게 채운 놀란의 각본과 이야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등 압도적인 호연을 펼친 배우들 등 언급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이번 글에서는 오롯이 킬리언 머피에 초점을 맞춰보자.

<오펜하이머>

섣부른 예측일 수 있겠지만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서 우리는 킬리언 머피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킬리언 머피는 놀란의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이미지에서 출발해 맨해튼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오펜하이머로 완벽하게 변모하며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수많은 과학자들을 통제하는 카리스마, 수많은 고민 끝에 자신을 믿고 행동하는 결단력 있는 태도로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적으로 이끈 오펜하이머의 모습은 그간 놀란의 작품 속 킬리언 머피의 생소한 얼굴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원자폭탄의 개발이 불러올 대규모의 인류 살상 앞에 고뇌하고 고통받는 내면을 세밀한 표정 변화와 눈빛 만으로 표현해 내며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놀란이 직접 집필했다는 1인칭 시점의 <오펜하이머> 각본은 그렇게 킬리언 머피의 호연을 통해 강력한 몰입감과 시너지를 내며 빛날 수 있었다(킬리언 머피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이 읽은 유일한 1인칭 대본이며,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을 믿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오펜하이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조쉬 하트넷, 케이시 애플렉, 라미 말렉, 케네스 브래너

개봉 202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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