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의 작물들이 일정 방향으로 누워 멀리서 보면 특별한 문양처럼 보이는 현상. 흔히 미스터리 서클이라 불리는 그 현상의 정확한 명칭은 ‘크롭(Crop) 서클’이다. 곡물이 만들어낸 원이라는 뜻. 과학적으로 의견이 분분한데,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실험은 여러 차례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초자연적인 현상, 나아가 외계인의 소행이라 믿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저 거대한 문양은 과연 누구의 소행인가
인도계 미국인 감독 M. 나이트 샤말란은 데뷔작 <식스 센스>(1999)에서부터 인간 및 세계가 가지고 있는 초자연적 현상과 능력에 대해 줄기차게 탐닉하고 있는 감독이다. <식스 센스>의 빅 히트 직후 발표한 <언브레이커블>(2000)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초능력에 대한 탐구였다면, 2년 후 개봉한 <싸인>(2002)은 자연 혹은 우주가 일으키는 괴이한 변이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그 시작이 크롭 서클이다.
전직 신부였던 그레이엄 헤스(멜 깁슨)는 아내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뒤, 신앙을 버린 상태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외곽 벅스 카운티의 농가에 아들 모건(로리 컬킨)과 딸 보(아비게일 브레스린), 그리고 전직 마이너리그 야구 선수였던 동생 메릴(호아킨 피닉스)과 함께 조용히 살고 있다. 어느 날 그의 옥수수밭에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옥수수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누워 엄청난 크기의 크롭 서클을 그려낸 것이다. 그러면서 혼란스러운 일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공포에 질린 개가 오줌을 지리다 못해 딸 보를 공격하다 모건이 휘두른 농기구에 찔려 죽는다. 고립된 외딴 농가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보는 연신 물맛이 이상하다며 집안 곳곳에 물을 따른 컵을 놓아둔다. TV에선 전 세계적으로 외계인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요란법석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사태를 ‘구경’한다. 모건은 UFO와 외계인에 관한 서적을 뒤적이며 아빠와 삼촌에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모건은 만성 천식에 시달리는 탓에 호흡기를 달고 산다. 삼촌 메릴은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고, 아빠 그레이엄은 혼란에 빠진 채 기묘한 슬픔마저 느낀다.
신앙을 버린 신부, 하늘의 심판에 직면하다?
그러다 실제로 외계인이 집을 습격하려는 징후가 포착된다. 그레이엄과 메릴이 추적에 나섰지만, 외계인은 슬쩍 흔적만 보인 채 3미터 높이의 지붕 위로 달아난다. 그레이엄과 메릴은 집에 있는 모든 문과 창을 판자를 덧대 틀어막는다. TV에선 외계인의 침공을 시시각각 생중계 중이다. 그레이엄은 TV를 끈다. 이 모든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TV를 비롯,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시스템들이 일시에 조작해낸 엉터리 허구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외계인을 처음 목격한 건 자기 자신이다. 아내가 사망하던 당시의 정황의 그레이엄의 뇌리를 자주 스쳐 지난다.
아내는 이웃에 사는 수의사 레이(나이트 샤말란)가 졸음운전을 하다가 충돌을 일으켜 트럭에 끼인 채 사망했었다. 트럭에 끼여 상반신과 하반신이 거의 분리되다시피 한 상태에서도 아내는 그레이엄에게 알쏭달쏭한 유언을 남겼다. “메릴에게 제대로 휘두르라고 전해달라”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는 영화 막판에 드러나지만, 그레이엄은 아내의 죽음과 외계인의 습격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식사 전 기도마저 거부하고 경찰에게 자신을 ‘신부님’이라 부르지 말아달라고까지 한다. 이쯤 되면 신앙을 버린 자로서 하늘의 심판을 맞닥뜨린 건 아닌지 자문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끝내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그럼에도 종국엔 아내의 알쏭달쏭한 유언이 그대로 들어맞는 일이 벌어지면서 모건을 납치하려던 외계인을 퇴치한다. 방송도 조용해진다. 사태 완결. 영화는 그렇게 조용하나 기이하게 시작했다가 고요하게 이글거리는 긴장을 한층 드높였다가 평온하게 끝난다.
<싸인>은 흥행 면에서는 성공했으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렸던 영화이다. 혹평을 한 부류는 전개가 지루하고 외계인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상태에서 지구 침공의 명분이 허황하다는 이유를 든다. 영화에서 외계인의 침공 이유는 지구인을 납치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에 취약(지구와 사람은 70퍼센트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하고 야구 방망이 몇 방으로 괴멸하는 외계인이라는 게 어이없는 설정이라는 거다. 반면에 신앙 회복과 가족관계의 정립이라는 주제 차원에서 호평하는 쪽도 만만찮았다. 내 입장을 질러 말하자면, 두 편의 입장 모두 아울러 좋은 영화였다.
과학과 신앙, 현실과 상상은 과연 양립 불가능인가
과학적 근거와 사실만 가지고 모든 허구를 재단하는 건 과학과 허구 양쪽을 전부 호도하게 될 수도 있다. 과학도 기본적으론 상상의 산물이다. 상상을 구체적 실험과 객관적 법칙을 적용하여 사실로서 증명하는 게 과학의 일이다. 인류가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상상은 일차적 동인이다. 그러던 것이 중세 이후 데카르트 식의 합리적 이성과 산업혁명 이후 서구에서 급격히 몰아친 기술과학 발전은 상상의 기본 씨앗을 짓밟은 채 도그마처럼 굳어버린 과학적 법칙을 맹종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이성으로 확립한 과학적 법칙을 도외시하거나 거기에 반하는 현상들을 모두 미신이나 종교적 맹신이라 치부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크롭 서클에 대한 과학적 증명도 여러모로 미온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결론은 여러 차례 실험을 통해 확인된 일면적 사실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외계인의 소행이라는 의견들을 일축하게 되는데, 그 역시 완전한 해명인지는 의문이다. 애초에 그걸 만들어낸 어떤 현상들이 이미 존재했었고, 이러저러한 실험을 통해 그 현상을 실제로 재현한 것이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최초에 발견됐을 때엔 어땠을까.
기록에 따르면 1678년 영국에서 일어난 ‘풀 베는 악마 사건(The Mowing-Devil)’이 최초였다. 밤에 갑자기 불빛이 번쩍하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논에 심어둔 귀리가 3분의 1이나 털렸다는 사실을 팸플릿으로 뿌려 알려진 사건이다. 어쩌면 그 훨씬 이전에도 지구 어디에선가 발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로 발견된 건 1946년 역시 영국에서였다. 확인되지 않은 현상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후 발생한 흔적들을 연구하고 그 패턴과 양상을 실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을 뿐이다. 단지 그게 그 현상의 정확한 인과라는 건 과연 확실한 결론일까. 답을 내리긴 어렵다.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이 많은 서태지가 2008년 충청남도 보령에 앨범 홍보용으로 만든 적도 있었다는 사실만 여담 삼아 부언한다.
우주는 광대하고 지구는 늘 새로워야 한다
현대인들은 대개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들을 믿고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실생활에서 기술과학의 결과물로 제공된 편의 시설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지도 오래다. 그럼에도 세상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하거나 진단할 수 없는 현상들이 여전히 많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어떤 목회자는 성경에 나온 여러 기적적인 현상들을 현대의 언어로 주석 달고 해석하려 하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고백한 적 있다. 그런 사람들은 초자연적 현상을 터부시하지 않는다. 과학 발전, 정확히 말해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진 기술적 유물론 혹은 다윈 식의 진화론이 현대 과학 문명의 초석이 되었지만, 그로 인해 오인되거나 방기되는 자연 또는 인간의 신비적 현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20년 전에 화두를 던진 <싸인>을 새삼 곱씹게 된 건 그런 이유다. 그래서 호불호를 떠나 그 중간 지점에 내 의견을 슬쩍 내려놓는 것이다.
어떤 정답을 내놓을 요량은 없다. 그저 한번 되짚어보고자 하는 사항일 뿐이다. 그러면서 하나의 의문을 또 던져 본다. 상상으로 그린 것이든, 실제로 외계인과 접촉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건, 인간이 그려내는 외계인의 형태는 대개 엇비슷하다. 파충류와 인간의 중간 단계거나 유인원의 초기 모습이거나 몸에 비늘이 있는 직립형 생물. 어째 볼 때마다 태아나 털이 생기기 전의 인간의 원형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싸인>에서 그레이엄이 외계인의 위협을 받는 동안 모건과 보에게 그들이 태어날 당시 상황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굳이 그 상황에서 왜 그랬을까. 그리고 아이들을 낳은 아내의 유언이 외계인을 퇴치하는 결정적 힌트가 되는 건 무슨 연유일까. 어쩌면 지구의 모든 생명은 결국 외계의 어떤 원자가 돌고 돌다가 잠깐 자리 잡은 우주의 작은 씨앗, 그리하여 더 깊은 뜻을 헤아려 보라는 광대한 신호(Sign)라는 의미는 아닐까, 라고 한번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그레이엄은 외계인에 맞서 아이들의 탄생 설화를 얼결에 털어놓은 셈. 우주는 새삼 광대하고, 지구는 새삼 신비롭다.
뱀꼬리: <싸인>에서 TV는 굉장히 중요한 소품이다. 외계인 침공을 생중계하는 장면은 그 모든 게 인간이 만들어낸 통제나 조작의 일각일 수 있다는 함의로 받아들일 여지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건 실체가 아닌 반사체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레이엄에 집에 침입한 외계인은 꺼져 있는 브라운관을 통해 등장한다. 그리고 보가 물을 담아놓은 유리컵을 통해 형체가 선연해진다. 인간이 발명한 모든 반사체는 결국 인간의 이성을 배반한다. 나는 이 영화가 던지는 더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 있다고 본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