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혔다가 다시 부활한 캐릭터 중에는 '롬 스페이스나이트'라는 이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로봇이 있다. 마블 편집국은 1990년대 우후죽순으로 생산한 신규 캐릭터들의 80% 이상이 대중에 철저히 외면당한 것을 상기하고선 예전 캐릭터들을 다시 살려내 갖다 쓰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너무 허접해 농담거리로 전락한 캐릭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롬 스페이스나이트도 그중 하나다. 필자는 이 캐릭터가 비교적 최근 <인피니티> 같은 메이저급 스토리에서 진지하게 등장하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만화가게의 과월호 코너에서 1979년 출간된 <어벤저스> 만화책을 싸게 구입했다. <어벤저스> 광고 섹션에서 롬을 처음 보았다. 완구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마블 코믹스에서 발간한 <롬: 스페이스나이트> 만화책 1호 광고 페이지였다. 너무 엉성한 모습에 '예전 아이들은 이런 걸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겠구나, 쯧쯧'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그 엉성한 표지 그림을 담당한 사람이 <다크 나이트 리턴스>, <배트맨: 이어 원> 등으로 유명한 프랭크 밀러라는 사실을 알고 대단히 놀랐다.

롬은 1970년대 후반의 하이테크 토이 붐을 타고 만들어진 완구다. 롬(ROM)이라는 이름 자체도 컴퓨터 용어 'ROM'(Read-Only Memory)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원래는 초기 컴퓨터 언어 중 하나인 '코볼' (COBOL)이 될 예정이었다. 이 완구를 제작한 곳은 '모노폴리' 등의 게임으로 유명한 보드게임 업체 파커 브라더스다. 현재는 하스브로에 합병됐다. 당시는 아타리 2600, 콜리코비전 등 1세대 비디오게임이 유행하면서 보드 게임 산업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 때였다. 파커 브라더스는 <스타워즈> 액션피겨 라인의 대성공으로 유례 없이 대호황기를 누리던 완구 산업의 장점을 살린 자신들만의 상품을 만들기로 한다.

<롬: 스페이스나이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단가를 줄이기 위해 움직이는 관절을 최소화한 대신 다른 완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자 기능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홍보를 했다. 눈은 한 쌍의 붉은 LED로 점등되었고 등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녹음된 몇 가지의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전자 기능들이 추가된 완구들은 1970년대 말에도 이미 숱하게 존재했으나 흔하지는 않았고, 파커 브라더스는 이 점을 노려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상당한 길이의 TV 광고영상을 제작하였고 마블 코믹스와 합작하여 <롬: 스페이스나이트> 만화책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 파커 브라더스는 일찍부터 계획한 롬의 적수들과 인간 캐릭터들의 완구화를 취소했다.

역설적이게도 <롬: 스페이스나이트>는 발매 당시보다 현재에 더 많이 사랑받고 있다. 당시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볼 수 있던 '하이 테크놀로지'를 상징하는 요소들, 가령 깜빡거리며 빛나는 LED 눈이나 매끈한 은빛의 전형적인 1960년대풍 로봇의 외형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복고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얼핏 보면 <지구가 멈추는 날>(1951)에 나오는 은색 인간형 로봇과도 매우 닮아 있는데 전형적인 1960년대 미국 로봇의 모습이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의 등장으로 일본 아니메/망가가 미국에 유통되었고, 그 이후로 나온 미국의 로봇들은 그들 고유의 특성을 잃어버렸다. 예를 들어 <퍼시픽 림>(2013)에 나왔던 로봇은 전통적인 미국식 로봇이 아니라 일본식 메카물의 후손에 가깝다. 롬은 지금보다 한 세대 전, '투박한 미국식 로봇'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현재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시 당시에는 외면당한 완구들이 나중에 재조명을 받고 레어 아이템으로 등극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케너 사의 대형 에일리언 피규어가 있다. 인기 면에서 롬은 에일리언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미개봉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물건은 상당히 찾아보기 힘들기에 나름의 희소 가치는 있다.

현재 <롬: 스페이스나이트>의 저작권은 마블 코믹스와 하스브로가 공동 소유하고 있다. 풀어 말하자면 롬이 MCU에 등장하거나 하스브로가 라이센스를 제공한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5년에 하스브로/파라마운트는 롬, 지 아이 조, 트랜스포머의 세계관을 하나로 합쳐서 '하스브로 유니버스'를 만들겠다는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그 이상으로 진척된 상황이 알려진 바는 없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도 있을 일이다. 


최원서 / 그래픽 노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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