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택배로 영화 <오펜하이머> 4K UHD를 받았다. 프리오더 전쟁을 뚫고 구매한(사실 필자가 구매한 버전은 상대적으로 쉬웠지만), 그리고 올해의 영화로 호명 받는 <오펜하이머>를 받아든 것치고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울적한 마음이 먼저였다. 블루레이를 안 모으는 사람은 아마 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모으는데 이번 블루레이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배부른 소리냐”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겠다. 이 블루레이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한국에 정식 발매하는 마지막 블루레이다. 그러니까, 유니버설 스튜디오 홈엔터테인먼트가 한국에 전하는 작별 인사인 것이다.

인터넷, 스마트 기기, 그리고 멤버십만 있으면 어디서든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다(물론 그 영화가 OTT 서비스 중이란 기본 전제가 있지만). 이 시대에 익숙하다면 비디오니, DVD니, 블루레이니 영화를 볼 수 있는 물리매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대에서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DVD를 모으던 시절에도 지인에게 “그걸 왜 사?”라는 질문을 적잖게 들은 필자는 관객 대다수가 느끼는 물리매체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영화가 점점 물질성을 잃어가는 요즘이기에 물리매체가 더욱 귀하게 느껴지곤 한다. 25년 전만 해도 동네에는 잘나가는 비디오가게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딜 가도 대여점은커녕 물리매체를 파는 곳조차 찾기 어렵다. 온라인이라고 다를까. 잘나가던 온라인 판매점도 하나둘 폐점했고, '어디 가면 어느 매장이 있다더라' 같이 사는 사람들끼리만 구전설화처럼 전해지곤 한다.

비디오부터 DVD를 거쳐 블루레이에 당도한 필자 입장에서 한국 영화산업의 흉흉함은 극장 성적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한국 시장을 포기한 것도 한국 영화산업 쇠락의 징조처럼 보인다. 굳이 말하자면 대형 스튜디오의 홈비디오 산업 철수는 유니버설이 처음도 아니다. 한국 관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미디어 기업이자, 특정 브랜드 한정이긴 하나 '마블공화국'이란 별명까지 얻고도 한국에서 가장 빨리 철수한 건 월트 디즈니 컴퍼니다.(덧붙여 설명하면 두 회사 모두 이후 제품을 생산하고 있지만 한국에 발매하지 않기에 한국어 자막 등이 없다. 즉 직구 시장이 열린 요즘이라도 구매할 이유가 대거 줄어든 것이다.)

왜! 대형 스튜디오들이 한국 2차매체 시장을 포기하는 걸까. 한국 영화 시장은 세계 상위권이라던데? 답은 간단하다. 한국 영화 시장에 물리매체 산업이 끼어들 타이밍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시장은 코로나19 이전에도 다소 기형적이었다. 매출의 60~70%가 극장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개봉했을 때 못 벌면 향후 벌 수 있는 여지가 크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는 구조가 바뀌었다. 극장 매출 비중은 확 줄고(30~40%) OTT 시장이 확 늘었다(50~60%). 이렇게 '편리한' 시스템을 접하는 과정에서 DVD와 블루레이, 물리매체 시장은 확 줄었다. 그나마 10%대였던 시장 비중은 5%로 줄었다. 시장 성장률로 보면 팬데믹 때 확 줄었다가 회복세를 보이는 극장, 팬데믹 기점으로 꾸준히 상승세인 OTT와 달리 팬데믹이 끝나자 도리어 -19.1% 감소했다.

비단 시장의 축소를 제외하고도 제작 공정이 번거로운 만큼 가격대가 비싸다는 점(DVD 시절 2만원대에서 3~4만원 대로 올랐다), 기술발전에 따라 차세대 매체의 등장도 빨라져 중복 구매의 부담감, 비디오에 비해 조작이 번거로워 사용자친화면에서 멀어지고 있는 점 등도 시장 증대에 발목을 잡고 있다. 후자는 그래도 DVD 시절 후반기에 '바로 재생'이란 시스템을 차용해 조금이나마 개선한 바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빨라진 차세대 매체 표준의 등장은 억제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VHS에서 DVD까지 20년(1976-1996), DVD에서 블루레이까지 10년(1996-2006), 블루레이에서 4K UHD 블루레이까지 또 10년(2006-2016). 홈비디오로선 여기가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점에선 4K UHD 블루레이를 사느니 애플tv+나 넷플릭스처럼 4K 지원 플랫폼을 구독하는 게 훨씬 이득인 것이다. 소장한다고 해도 4K VOD를 구매하는 것이 간편하고.
이런 상황에서 대형 스튜디오의 한국 물리매체 시장 철수를 비난할 수도 없다. 누구보다 이 시장의 현황을 알고 있는 건 (필자 포함) 소비하고 있는 수집가들이니까. 그리고 해외 스튜디오가 철수해도 살 블루레이는 많다. 한국영화, 해외 독립영화사의 작품, (구매자들 사이에서 빛 그 자체인) 워너브러더스와 파라마운트 영화 등등은 플레인아카이브, 김치DVD, 위트콜렉션, 아트 크래프츠, 해리슨앤컴퍼니 등 국내 블루레이 제작사를 통해 여전히 발매하고 있으니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매해 복원·발간하는 고전 명작 블루레이도 놓치면 안 된다.
문제는 이 같은 시장이 소수의 마니아들 위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수의 마니아들도 이제는 한국 물리매체 시장을 언젠가 보내줘야 한다고 ‘헤어질 결심’하고 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이런 시장을 살리자고 홍보하거나 독려하는 것도 (기업이 물러나는 시점에서) 부질없는 일이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도 꾸준히 출시해주는 영화사와 제작사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오펜하이머> 블루레이를 받아들고 마음 한구석이 서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전 '전단지' 관련 글(링크)에서도 썼다시피 필자는 수집병, 못버려병이 중증이다. 어떤 산업을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그만큼 소비해줘야 한다는 게 필자의 (다소 삐뚤어진) 애정인지라 블루레이도 400장가량 모았다. 어떤 영화는 영화 자체가 좋아서, 어떤 작품은 패키지가 이뻐서, 어떤 건 배우의 연기가 좋아서 등등의 이유로 사 모으니 사는 족족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블루레이를 구매한 걸 영화사와 영화 산업에 대한 예우라고 믿고 있다. 물론 OTT 시대가 도래하며 필자도 이렇게 사모은 것을 많이 후회하긴 했지만(그 돈으로 엔비디아 주식을 샀다면!) 그럼에도 블루레이는 필자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감탄을 할 때면 투자한 금액의 본전보다 뿌듯함이 더 컸다. 그렇기에 자의가 아닌 타의로, 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음반시장이 돌고 돌아 레트로 열풍으로 LP가 유행인데 언젠가 영화 물리매체시장도 돌고 돌아 디스크가 유행하지 않을까. 아, 그것보다 VHS 유행이 먼저이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