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이 끝나가고 오스카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전 세계 영화 전문 매체에서 올해 최고의 영화 리스트를 발표하고 있다. 여러 매체의 발표에 이어 프랑스의 권위 있는 영화 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도 2023년 TOP 10 영화를 선정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누벨바그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가 필자로 있던 영화 잡지로 지금도 프랑스 영화계의 지적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에 선정한 리스트는 할리우드 거장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를 비롯한 알제리 출신 감독 라바 아메르-자이메슈의 범죄드라마까지 다양하다. 그중 한국에 개봉되지 않은 작품도 여럿 있으며, 한국에서 한차례도 상영되지 않은 영화의 제목은 원제로 표시했다.
10위-b <쇼잉 업> (Showing Up)

2021년 <퍼스트 카우>로 눈도장을 찍은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쇼잉 업>으로 또다시 일상에 대한 찬사를 드러낸다. 전시를 앞둔 조각가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그녀는 집의 보일러 고장으로 한동안 온수를 쓰지 못하고 있다. 이에 더해 동료 예술가이자 집주인인 조는 그녀에게 다친 비둘기의 간호까지 맡긴다. 전시 기한은 다가오는데, 그녀의 일상에는 자꾸만 신경 쓸 거리가 늘어난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많은 영화들이 평면적으로 그려 온 천재적인 예술가형의 자리에 생활인이자 노동자로서의 예술가를 새로 그려 넣었다. 분주한 주인공 조각가 리지 카르 역은 미셸 윌리엄스가 맡았고, 그녀의 동료 예술가 조 역은 <더 웨일>에서 명연기를 보인 배우 홍 차우가 맡았다. 이 작품은 2023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한 바 있다.
10위-a <Un Prince>

프랑스 피에르 크레튼 감독의 <Un Prince>는 <쇼잉 업>과 투표수 동률을 차지하면서 함께 10위에 선정됐다. <Un Prince>는 <L' Avenir le dira>, <House of Love> 등 주로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혼합한 다큐 영화를 제작해 온 크레튼이 “전적으로 허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첫 픽션 영화이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연출과 함께 연기도 선보였다. 영화는 원예 학교에 공부를 하러 온 청년의 여정을 그려낸다. 피에르-조셉은 정원사가 되기 위해 원예 견습 센터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교장 프랑수아즈 브라운과 식물학 선생님 알베르토, 고용주 아드리앙 등 견습생 시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간다.
9위 <라스트 썸머> (Last Summer)

<라스트 썸머>는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큰 호응을 받은 작품으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상영되었다. 섹슈얼한 영화를 선보여 왔던 프랑스 감독 카트린느 브레야가 10년 만에 발표한 신작으로 덴마크 합작영화 <퀸 오브 하츠>(2019)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유능한 변호사인 안느는 남편 피에르, 두 명의 딸과 함께 파리 근교의 한 주택에서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에르의 전처가 낳은 아들인 17세 소년 테오가 안느의 집에 오게 되면서 그녀의 마음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안느는 테오에 대한 욕망을 참지 못하고 그와 금지된 사랑을 나눈다.
8위 <The Temple Woods Gang>

알제리 출신의 라바 아메르-자이메슈(Rabah Ameur-Zaïmeche) 감독의 도시 범죄드라마 <The Temple Woods Gang>은 파리의 저소득층 주택 단지에서 벌어지는 강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은퇴한 한 군인이 파리 외곽의 ‘템플 우즈’ 주택 프로젝트(클리시 수 부아에 위치한 부아 뒤 사원)에 살고 있다. 그가 어머니를 묻을 즈음, 이 지역의 강도단에 속한 이웃 베베는 부유한 아랍 왕자의 호송대를 털 준비를 한다. 이 어둡고 사회적인 범죄 영화는 알제리 출신의 감독과 같이 빈민가에서 자란 아프리카 또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에게 프랑스 사회가 제공하는 제한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7위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
(Do Not Expect Too Much from the End of the World)

라두 주데 감독의 영화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이하<지구 종말>)는 루마니아의 가혹한 노동 환경을 통쾌하게 폭로하는 풍자 영화다. <지구 종말>은 2시간 44분 동안 다국적 기업의 직원 안젤라가 작업 중 부상을 당한 노동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대상을 물색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안젤라는 일이 꼬일 때마다 위악적인 혐오 발언을 일삼는 SNS 속 부캐 ‘보비타’를 이용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라두 주데는 전작 <배드 럭 뱅잉>에 이어 강렬한 이미지와 정돈되지 않은 문법으로 루마니아의 부조리한 현실을 깊숙이 드러낸다. 영화 속 노동 착취가 만연한 먼 나라의 풍경은 결코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다.
6위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 (Unrueh)

시릴 쇼이블린 감독의 영화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2022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스위스 영화다. 19세기 기술 발전으로 인해 격변이 시작되던 스위스의 한 시계 제조 공장에서 젊은 여성 노동자 조세핀은 핵심 기계 장치를 만든다. 공장의 관리자들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량과 작업 시간, 임금을 재조정하고, 조세핀은 지역 아나키스트들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 러시아 여행자를 만난다.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는 2022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다.
5위 <사랑은 낙엽을 타고> (Fallen Leaves)

데드팬 코미디의 대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우연히 만난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리는 멜로이자 코미디 영화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챙겼다는 이유로 슈퍼마켓에서 해고된 여자 안사와 술과 담배로 우울함을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공장 노동자 홀라파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영화의 아이러니한 코미디는 미국 인디 영화의 거장 짐 자무쉬 감독의 감정적으로 절제되면서도 엉뚱한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또 무뚝뚝한 인물의 감정선과 달리 화려한 영화의 컬러는 자크 드미 감독의 미장센을 연상시킨다. 주인공 안사와 홀라파는 드미의 영화 속 연인들처럼 서로 엇갈린다.
4위 <파벨만스> (The Fabelmans)

<파벨만스>는 전 세계가 사랑한 거장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영화로 훗날 거장 감독이 될 아이 새미가 영화감독이 되기까지 영향을 받았던 어린 시절의 사건들을 담고 있다. 새미는 난생처음 극장에서 세실 B. 드밀 감독의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영화와 사랑에 빠진다. 그날 밤, 새미는 기차와 자동차가 충돌한 영화의 장면을 계속 떠올리며 밤잠을 설친다. 새미는 엄마 미치와 함께 아빠가 선물해준 장난감 기차로 기차 충돌 장면을 재현해 찍으면서 첫 영화를 만든다. 그날 이후 새미는 자기만의 작고 아늑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간다.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파벨만스>는 새미가 거장 감독이 되기까지 영향을 주었던 가족 관계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에게 영화를 둘러싼 여러 시각을 입혀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에 관한 영화다.
3위 <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추락의 해부>는 2023년 제16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산드라 휠러의 연기가 돋보이는 <추락의 해부>는 역동적인 법정 드라마다. 독일인 작가 산드라와 사뮤엘 부부는 시각 장애가 있는 11세 아들 다니엘과 함께 외딴 산간 지역의 통나무집에 산다. 산드라가 인터뷰를 한 어느 날 아침, 다니엘이 집 밖 눈더미에서 사뮤엘의 사체를 발견한다. 사인을 두고 타살이 의심되는 가운데, 산드라가 용의자로 기소된다. 다니엘은 재판에 참석해 사랑하는 부모의 숨겨진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
2위 <클로즈 유어 아이즈> (Close Your Eyes)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벌집의 정령>, <남쪽>, <햇빛 속의 모과나무> 단 세 편만으로 거장이 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31년 만에 내놓은 장편 영화다. 영화는 감독이 필름 영화에 보내는 찬사로 가득하다. 필름 영화감독 미겔이 1990년 자신의 영화 촬영 도중에 사라진 주연 배우이자 친구인 훌리오를 33년 후에 다시 찾아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감독의 자기 반영적인 영화다. 에리세는 자기를 극중 미겔과 훌리오 둘로 나누어서 반영한다. 두 인물은 모두 필름 영화가 도태되고 난 후 영화 산업계를 떠나거나 그곳에서 사라진 이들이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행방불명된 훌리오의 인물 설정은 오랜 시간 영화를 내놓지 않은 감독 개인의 경험이 반영되었다. 또 미겔 감독이 훌리오를 찾아 나서는 여정 역시 오랜 시간 필름영화를 찍어 온 에리세 자신이 필름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1위 <트렌케 라우켄> (Trenque Lauquen)

로라 시타렐라 감독의 영화 <트렌케 라우켄>은 사라진 한 여자를 찾아 나서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대담한 미스터리다. 한 여성이 사라지고 그녀를 사랑한 두 남성이 그녀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라파엘은 여자 친구였던 라우라를 찾다가 자신이 몰랐던 그녀의 모습을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 라우라의 운전기사 에제키엘은 그녀가 남긴 쪽지를 보고 더 이상 그녀를 찾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그녀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수년 전 이 지역에서 실종된 여성을 포함한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에 대한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트렌케 라우켄>은 2023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