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것이 넘쳐난다. OTT 플랫폼이 정착하면서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뚜렷했던 시대는 지나고, 여가시간마다 즐길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2023년을 되돌아보고자 씨네플레이 기자들도 각자 OTT 플랫폼에서 발견한 올해의 콘텐츠를 하나씩 선정했다. 단편부터 시리즈까지, 씨네플레이 기자 다섯 명이 추천한 작품들과 함께 올해를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김지연
<네버 해브 아이 에버> 시즌 4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피스>를 좋아한다면 ‘켈리’ 역의 민디 케일링이 만드는 시리즈를 ‘의리’로라도 보게 된다. 그렇게 시청을 시작했던 <네버 해브 아이 에버>가 어느새 시즌 4가 되고, 주인공 데비는 대학에 가고, 나는 아이를 다 키운 부모마냥 섭섭한 마음 반, 기특한 마음 반. <네버 해브 아이 에버>는 전형적인 하이틴물의 클리셰를 따르기도 하고, 또 비틀기도 하는데, 이 드라마가 다른 작품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주인공 ‘데비’의 존재다. 데비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소위 ‘쿨’한 학생이 아니다. 그는 찌질하기도 하고, 마치 <오피스>의 켈리처럼 밉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토록 데비에게 과몰입할 수 있었던 건 누구나 학창 시절, 데비의 모습을 조금씩은 갖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잘나가는 애’처럼 보이고 싶어 하기도 하고, 너무 ‘너드’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누군가를 대책 없이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미숙함들이 쌓이고 쌓여 ‘그때보다는 덜 미숙한’ 지금의 내가 됐으니, 데비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성찬얼
<플루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올해 OTT 콘텐츠를 많이 즐기지도 못했지만, 그나마 본 것 중에도 썩 내키는 것이 없다. 기대했던 만큼 만족감을 준 건 <플루토>가 거의 유일했다.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 중 '지상 최강의 로봇' 에피소드를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등을 집필한 우라사와 나오키가 리메이크했고, 그 리메이크 만화를 토대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플루토>다. 「플루토」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이 작품의 장단점은 정말 뚜렷하다. 장점, 원작을 잘 옮겼음. 단점, 원작을 너무 고스란히 옮겼음(결말 정도는 좀 더 발전시켰어야 하지 않나 싶다). 한마디로 원작에 많은 걸 빚지고 있다는 건데, 그럼에도 원작이 워낙 훌륭한 탓에 애니메이션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인간과 거의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발전한 로봇(들)을 중심으로 인간성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경계는 누가 정의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구태의연한 주제인데도, 게지히트 등 로봇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감성을 불어넣어 그 구태의연함을 잊게 한다.
이진주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글이 말이 되고, 말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영화가 되는 기상천외한 웨스 앤더슨 이야기.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는 로알드 달이 1977년 발표한 동명의 청소년 단편집 중 하나를 바탕으로 한다. 이 작품을 연출한 웨스 앤더슨 감독은 분명 이 소설을 보자마자 완전히 꽂혔으리라. 이 소설만큼 웨스 앤더슨의 특기를 잘 살려 줄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난해하다 못해 허무맹랑하다. 도박에 중독된 재벌 ‘헨리 슈거’가 각고의 노력 끝에 투시를 연마하게 되고 투시를 통해 모든 도박에서 승리하고 엄청난 부를 이룬다는 것이다. 비논리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로 자칫 정신이 혼미해질 수 있는 관객을 웨스 앤더슨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한다.
아니, 넋 놓고 있다가는 달려가는 영화의 뒤통수를 보게 된다. 웨스 앤더슨의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는 텍스트 단위에 맞춘 미장센의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독특한 영화적 미학이 텍스트와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고집스럽게 개성 있는 미장센을 구현해 온 웨스 앤더슨의 작품이 또 한 번의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러닝타임은 불과 37분이다. 만약 원작 도서를 읽지 않은 채 이 영화를 본다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할 것이다. 핸드폰은 넣어두고 ‘감상’이 아닌 사냥하는 마음으로 시작하기를 바란다.
주성철
<성난 사람들>(BEEP, 넷플릭스 오리지널)

우리 삶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와 그렇지 않을 이야기 사이에서 절묘하게 포착한 순간의 확장이 놀랍다. 분노도 강요하고 분노조절도 강요하는 사회에 바치는 모골이 송연한 풍자극.
추아영
<무빙>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은 웹툰 작가 강풀이 직접 자신의 원작을 각색한 시리즈로 할리우드의 히어로물과는 다른 개성으로 승부하는 ‘한국형 히어로물’이라 평가받았다. 기본 토대는 초능력을 숨긴 채 살아가는 아이들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초능력자들의 액션물이자 히어로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더해 <무빙>은 능력자의 자식인 봉석이(이정하)와 희수(고윤정), 강훈(김도훈)이를 중심으로 한 성장물, 순도 높은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여 재미를 더하였다. <무빙>의 능력자는 서슬 퍼런 국가권력의 억압이 가해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맨몸으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매서운 주먹과 칼빵에도 끄떡없는 회복 능력을 가졌으며, 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등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지만, 일상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얽매여 살아간다. 능력자 개개인의 서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시대적 맥락을 반영했다. <무빙>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휴먼 드라마를 더한 히어로 장르의 문법으로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데 성공한다.
<플라워 킬링 문> (Apple TV+ 오리지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검은 황금’인 석유가 솟아난 19세기 말 오클라호마주에서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인디언 오세이지족은 유전에서 얻은 수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주변의 백인들은 그들의 부를 빼앗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그런 와중에 의문의 인디언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오랫동안 오세이지족의 신뢰를 받아 온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은 그들의 언어와 풍습을 따라하며 친구로 머무르지만, 실은 조직적으로 오세이지족의 살인을 주도하고 있다. 킹의 조카인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오세이지족 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녀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삼촌의 계획을 거리낌 없이 수행한다. 죽음의 기운이 몰리의 턱밑까지 드리울 때, 수사국 국장인 에드거 후버와 수사관 톰 화이트(제시 플레먼스)가 나선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자 어니스트의 내적 갈등도 심해진다. <플라워 킬링 문>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페르소나 두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로버트 드 니로가 영화 <디스 보이스 라이프> 이후 30년 만에 조우한 작품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번 영화로 할리우드 영화의 두 얼굴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장르인 서부극을 새로이 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