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고 예쁜 여성, 소위 ‘중년답지 않게’ 동안인 여성, 혹은 엄마의 역할로만 기능하는 중년 여성에만 익숙해져 있던 관객들에게 라미란이라는 장르가 등장했다. 스타가 아닌 중년 여성의 원톱 주연물이 가능함을 보여준 첫 사례. 평범한 외모의, 그러나 연기력이 뛰어난 중년 여성 배우들에게 ‘제2의 라미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현상은 라미란이 개척한 영역에 대한 일종의 훈장이다.
오는 24일 영화 <시민덕희>가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영화 <시민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평범한 시민 ‘덕희’(라미란)에게 사기 친 조직원 ‘재민’(공명)의 구조 요청이 오면서 벌어지는 추적극이다.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사기를 친’ 조직원의 구조 요청을 받는다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 이야기는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 2016년, 화성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김성자 씨는 보이스피싱을 당한다. 한 달여 후 김성자 씨에게 사기를 쳤던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자신을 구해달라며 구조 요청을 하고, 김성자 씨는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시민덕희>는 실화를 기초로 하되 영화적 상상력으로 공감과 위로, 쾌감을 극대화한다. 개봉에 앞서 <시민덕희>의 주인공 '덕희' 역의 배우 라미란을 만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민덕희>의 박영주 감독은 이 작품이 첫 상업영화예요. 신인 감독의 작품인데, 시나리오를 읽고 단숨에 출연 결정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출연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단 대본이 재미있었어요. 덕희라는 인물이 용감해 보였고, 존경스러웠어요. 기존의 보이스피싱 피해자(전형적으로 묘사되는 피해자상)과는 반대되는 측면이 있어서 재밌었어요. 또, 박영주 감독님의 전작 <선희와 슬기>를 봤는데, 재밌어서 믿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을 처음 뵀을 때는 되게 소녀소녀한 학생 같았는데, 현장에서 의외로 카리스마가 있으세요. 조곤조곤 원하시는 것을 잘 말씀해 주세요. 사실 상업영화 첫 연출이고, 또 나이도 젊으니까 현장에서 위축될 수 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으시더라고요. 나이나 경력이 중요한 게 아니구나 생각했죠. 운 좋게 좋은 사람들과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항상 시나리오가 재미있는지를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신다고 들었어요.
시나리오도 사실 한 권의 책이잖아요. 그래서 이 책이 정말 술술 넘어가냐, 속도나 집중도가 있잖아요. 정말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넘기는 게 너무 힘든 것들도 있거든요. 그러면 끝까지 못 읽어요. <시민덕희>는 다 읽고 나서 이게 실화라는 걸 들었을 때, 정말 대박이다 싶었죠. 물론 총책을 직접 잡은 건 허구지만,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제보를 했다는 것 자체도 되게 신기한 일이에요.

박영주 감독님이 <시민덕희>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덕희’ 역에 라미란 배우를 염두에 두었다고 했어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덕희라는 캐릭터가 저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더라고요. (덕희는) 제가 좀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덕희라는 인물 자체가 너무나 평범하고, 우리 이웃일 것 같은 인물이잖아요. 관객분들도 저를 평범함의 대명사처럼 봐주시는 것 같아요. 실제로도 그렇기도 하고.
평범함 덕분에 본인이 덕희 역에 잘 어울린다고 말씀하셨는데, 덕희라는 캐릭터가 마냥 평범한 것 같지만은 않아요. 굉장히 정의롭고, 어떻게 보면 시민의식이 있는 캐릭터예요.
저는 덕희가 영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본인의 억울함이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거든요. 정말 추진력 있고, 용감한 인물은 맞죠. 그런데 (덕희의 행동은) 시민의식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이유에서 시작했다고 보거든요. <시민덕희>는 히어로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예요. 덕희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했고, 움츠려져 있다가 (총책을 잡고) 나아가면서 덕희라는 인물 스스로가 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덕희가 기존의 엄마 역할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덕희는 엄마를 내려놨다고 생각해요. (<시민덕희>의 덕희가 차별화되는 지점은) 엄마를 내려놓고, 개인에게 조금 더 집중한 것 아닐까요? 물론, (덕희가 총책을 잡으려 한 이유는) 아이들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냥 덕희를 위한 거예요. 덕희 스스로가 자존감을 갖고, 고개를 쳐들고 살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총책의 회유를 듣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 존엄을 지키는 게 덕희한테는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 덕희의 모티브가 된 김성자 씨를 실제로 뵈었나요?
시사회 때 오셨어요. 실제로 뵈니까, 정말 강단 있으시고 용감하세요. 그때를 회상하면서 얘기하시는데, 너무 화나고 억울했다고 하셨어요. 실제로 (총책을 잡기 위해) 이것도 있어야 된다, 저것도 있어야 된다 하면서 제보원을 엄청 많이 설득을 하시고, 정말 어마어마한 양을 경찰에 보내셨대요.

덕희가 ‘총책’ 역의 이무생 배우와 싸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무생 배우와는 어떻게 호흡을 맞췄나요.
저는 그냥 때리는 대로 맞았죠. (웃음) 이무생 배우가 총책으로 변해서 연기를 하는데, 눈을 딱 보니까 무섭더라고요. 영화에서는 많이 편집이 됐는데, 실제로는 더 많이 했어요. 실제의 한 3분의 2 정도는 덜어낸 거예요. 얼굴을 때리는 장면을 많이 찍어서, “여기 코 있죠?” 이런 거는 애드립이에요.
비슷한 소재로 한 <보이스> 등의 영화에서는 시원한 액션이 나오는 반면, <시민덕희>의 액션은 조금 달라요. 특히, 덕희가 총책과 싸우는 장면이 그렇고요.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장면이기도 하고, 덕희가 총책에게 매달리기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현실성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정말 현실에 있을 법한 것이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고, 진짜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다른 영화와의 차이점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액션을 하는 것. 맞는 와중에도, 다리에 매달리는 것. 그게 가장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말씀대로 <시민덕희>는 덕희의 성장담, 그리고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에 덕희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나오는 장면에서 가장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저는 그 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잘못한 거 아니고, 이렇게 맞고 나와도 내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 그게 영화의 다른 부분과 다 연결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좋았어요.
염혜란, 장윤주, 안은진 배우와 ‘덕벤져스’ 일명 ‘팀 덕희’를 결성하셨어요. 호흡은 어떠셨나요.
말해 뭐해요. 너무 잘 맞았어요. 그러니까 안 재미있을 수가 없죠. 계속 노래 부르고, 화음 쌓고. 만약 그런 사람이 없으면 제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막 했을 텐데, 이미 띄워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는 그냥 편하게 웃기만 하면 됐죠. (장)윤주도 텐션이 높은데, (안)은진이가 더 높아서 윤주가 못 따라가요. 윤주가 호르몬이 없다는 것도 기자간담회 때 처음 알았어요.(장윤주는 기자간담회에서 갑상선 저하증을 오랜 기간 앓고 있음을 고백했다) 원래 그런 성격인가 했는데, 진짜 빨리 피곤해하고 그래서. 이번에 얘기 듣고 처음 알았는데 조금 미안하더라고요. 은진이는 당시에 첫 영화여서 스스로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막내를 자처하면서, 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친구예요. 그다음에 은진이와 드라마 <나쁜엄마>에서 만났을 때는 훨씬 편해졌죠.

염혜란 배우와는 한 살 차이로 또래인데요. 동년배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과정은 더욱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우리 둘이 놀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비슷한 나이대와 이미지니까) 같은 역을 놓고 어떻게 보면 경쟁하는 입장이었잖아요. 그런데 사실 동생이지만 정말 친구 같고, 언젠간 ‘쌍란’으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쌍둥이로 해야 하나. 혜란이도 사실 텐션이 막 업되어 있지 않아서, 저랑 좀 비슷해요. 수줍음 많고, 낯가리고, 예능 울렁증이 있고, 어디 가서 말 못 하고 부끄러워하고. 근데 연기할 때만 거침없고.
염혜란 배우가 '제2의 라미란'이라고 불리기도 하더라고요.
무슨. 제1의 염혜란이죠.
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해 박형사(박병은)를 찾아가지만, 박형사는 덕희의 사건을 제대로 해결해 주지 않아요. 실제로도 덕희의 일을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는 박형사가 답답하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박병은 배우가 기자간담회에서 얘기했던 것(박병은 배우는 현실적인 형사의 얼굴을 연기했다고 밝힌 바 있다)처럼, 박형사가 이해되지 않는 인물인 건 아니에요. 사실 그들의 업무가 너무 많고, 정말 성심을 다해서 해결해 주고 싶지만 그 일을 하는 동안 또 누군가는 소외되고, 또 다른 피해자는 분명히 있을 거란 말이죠. 그래서 (소극적인 경찰 등에)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기를 바랐어요.

작년 드라마 <나쁜엄마>부터 <잔혹한 인턴>, 그리고 공개를 앞둔 <정년이>까지. 공백기가 거의 없는 배우에요.
어쩌다 보니 다른 배우분들에 비해서 작품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약간 피로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멈출 수가 없어요.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기 때문에. (웃음) 이제 혜란이 같은 사람들이 막 치고 올라오고, 점점 설자리가 없어지면 어차피 좀 쉬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자, 이 말을 지금 몇 년째 하고 있네요. 저는 제가 한 55세까지만 했으면 좋겠어요.
피로도를 말씀하셨는데, 본인 스스로 느끼는 피로도는 없나요.
저는 늘 새로운 삶을 사는 이 일이 재밌어요. 오히려 쉴 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계속 비슷한 역을 하면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재미가 없잖아요. 주변 사람들도 그렇잖아요. 항상 새로워지려고 노력을 하는데, 배우는 더하죠. 뭔가 다른 거를 하고 싶고, 낯선 거를 할 때 제가 더 재밌어지니까. 일을 오래 하고 싶으니까. 비슷한 역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역할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이 바뀌면 또 다르게 비치고, 또 똑같이 연기할 수도 없어요.

마지막으로, <시민덕희>를 딱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뭘까요.
<시민덕희>는 나를 일으켜주는 영화다.
그럼 <시민덕희>가 자존감에 대한 영화인 만큼, 절대 자존감이 떨어질 일이 없을 것 같은 라미란 배우가 독자들에게 한 마디를 건넨다면.
당신들은 전부 다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요. 스스로를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주세요.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