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다노하면 너드미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사실 수많은 영화에서 색다른 변신을 거듭하는 팔색조 배우다. 특히 복잡한 콤플렉스를 지닌 괴짜 같은 캐릭터를 섬세하게 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배역에 따라서 그는 괴짜와 광기 어린 빌런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토록 연기 스펙트럼이 다채로운 배우도 보기 힘들 것이다. 폴 다노의 본격적인 연기 인생은 10대 초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15살부터 TV 드라마 <스마트 가이>(1998) 등에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다가 2001년 영화 <L.I.E.>에서 노인 남성과 원조 교제를 하는 문제아 10대 소년을 연기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이 영화로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의 최우수 데뷔 연기상을 받았다.
이후 폴 다노는 <내겐 너무 아찔한 그녀>(2004), <테이킹 라이브스>(2004), <더 킹>(2005),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2005) 등에서 조연을 맡으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어서 <리틀 미스 선샤인>(2006), <루퍼>(2012), <프리즈너스>(2013) 등 여러 굵직한 영화에서 조연을 맡아 서서히 인지도를 높여나갔으며, 2018년에는 아내 조 카잔과 공동 각본을 쓴 <와일드라이프>로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에서도 조연을 맡아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제법 있는 편이다.
폴 다노는 1월 17일에 개봉한 신작인 <덤 머니>에서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인상적인 캐릭터를 추가했다. 바로 ‘게임스탑 주가 폭등 사태’의 중심에 있는 방구석 주식 유튜버 ‘포효하는 냥’ 캐릭터다. 그는 이 캐릭터의 분석을 위해 실존 인물 ‘키스 길’의 유튜브 채널 ‘Roaring Kitty’의 방송을 100시간 이상 시청하며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여기서도 그는 훌륭한 캐릭터 소화력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이젠 할리우드의 주연급 배우로 자리 잡은 그의 이전 작품 중 괴짜적인 면모가 가장 두드러진 영화 세 편을 뽑아보았다.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폴 다노가 탐욕의 끝을 향해 쉼 없이 내달리는 영화다. 1898년 뉴멕시코 황무지 사막에서 은을 캐는 광부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 그는 리틀 보스턴에서 석유를 발굴할 수 있다는 폴 선데이(폴 다노)의 말을 믿고 양아들과 함께 그곳으로 간다. 다니엘은 이곳에서 석유 유전을 발굴하고 거금을 벌어들인다. 제3계시교의 교주이자 폴 선데이의 쌍둥이 형 엘리 선데이는 자신의 교회를 위해 그에게 미리 약속받은 돈을 요구한다. 둘은 서로의 것을 지켜내기 위해 점점 더 대립한다.

폴 다노는 이 영화에서 1인 2역을 맡아 연기했다. 원래 그는 엘리 선데이의 동생 폴 선데이 역만 맡을 예정이었지만, 엘리 선데이 역을 맡았던 배우 켈 오닐이 하차하면서 폴 다노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본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쌍둥이란 설정을 슬쩍 추가해 두 역할 모두 그에게 맡겼다. 그리고 전작 <잭과 로즈의 발라드>(2005)에서 호흡을 함께 맞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추천도 폴 다노의 캐스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폴 다노는 준비 시간이 단 4일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엘리 선데이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폴 다노의 연기가 압권인 장면은 엘리가 다니엘에게 죄를 고백하게 만드는 교회 예배 장면과 엘리가 다니엘에게 호되게 당하다 볼링핀에 맞아 죽는 장면이다. 폴 다노는 다니엘의 말에 심리적으로 동요되는 엘리의 불안정한 감정을 혼신의 연기로 드러낸다. 폴 다노는 이 작품을 통해 인지도를 확실하게 끌어올렸고,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스위스 아미 맨>

<스위스 아미 맨>은 희망을 잃은 남자와 이상한 시체와의 우정을 그리며 삶과 사랑,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감독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일명 ‘다니엘스’)가 연출했으며, ‘에에올’ 못지않게 괴상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폴 다노가 무인도에 표류된 남자 행크 역을 맡았고,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무인도로 떠내려 온 시체 매니 역을 맡았다. 외딴섬에 갇힌 행크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자살을 시도하다 한 시체를 발견한다. 부패한 시체는 끊임없이 방귀를 뿜어낸다. 행크는 이를 보고 놀라지만, 방귀를 뀌는 시체를 수상 스키처럼 타고 섬에서 탈출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행크는 시체에 매니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와 함께 살아남기 위한 여정을 계속한다.
폴 다노는 이 영화에서 시체 매니와의 환상적인 여정을 통해 변해가는 캐릭터 행크의 성장을 보여준다. 행크는 외로움과 공허감에 시달리는 남자로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 그는 매니라는 시체와의 우정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된다. 행크는 매니가 다시 말을 할 수 있도록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특히 폴 다노는 매니에게 좋아하는 여자 사라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애절한 감정을 잘 표현해낸다. 매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줄수록 오히려 행크의 감정이 충족되어 간다.
〈더 배트맨〉

<더 배트맨>은 수많은 배트맨 영화 중 감독 팀 버튼, 조엘 슈마허, 크리스토퍼 놀란, 잭 스나이더에 이어 맷 리브스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로버트 패틴슨 버전의 배트맨을 볼 수 있다. 탐정 누아르 장르에 기반해 배트맨 영화 중 어둡지만 세련된 이미지가 가장 돋보이는 영화 <더 배트맨>은 총 3부작으로 아직 2편의 작품이 남아 있다.
2년차 배트맨이 범법자들을 처단하며 고담시의 밤을 지켜오고 있다. 고담시의 시장 선거를 앞두고 고위 인사들을 겨냥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고든 경위와 경찰, 배트맨이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거적때기 복면을 쓴 채로 수수께끼를 내는 킬러 ‘리들러’의 존재를 알게 된다. 배트맨은 사건 해결을 위해 리들러로부터 주어진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

<더 배트맨>에서 폴 다노는 수수께끼를 내면서 배트맨을 압박하는 빌런 리들러 역으로 등장한다. 그는 <배트맨 3 - 포에버>(1995)에서 짐 캐리가 연기한 코믹한 빌런 리들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리들러를 보여준다. 폴 다노의 리들러는 SNS와 라이브 방송 등으로 시민을 조종할 줄 아는 천재 범죄자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복수심에 가득 찬 광기 어린 인물이었다. 특히 수용소 안에서 리들러의 라이트모티프이기도 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폴 다노의 연기가 소름 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