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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장 선거에 사회 단면을 담다 〈일렉션〉

성찬얼기자

4월 10일, 총선이다. 서두부터 총선이란 말을 하려니 괜히 서늘하다. 하지만 투표는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꽃 아닌가. 언급하지 않는다고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쉬쉬하는 것도 썩 좋진 않다.

하지만 사회에서 투표, 선거 얘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정치 얘기로 이어지고 그러다 보면 가까운 사이도 얼굴 붉히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도 그러니, 일방적으로 글을 쓴 입장(필자)과 글을 읽는 입장(독자님들) 사이에 선거 어쩌구 투표 저쩌구 하는 건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앞서 말했듯 개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날을 외면하기도 아쉽다. 그래서 오늘은 바다 건너에서 선거를 다소 가볍게 다룬 영화를 한 편 소개한다. 한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 각축전을 그린 <일렉션>(1999)이다.

〈일렉션〉
〈일렉션〉

〈일렉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트레이시, 짐, 폴, 타미
〈일렉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트레이시, 짐, 폴, 타미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출세작 <일렉션>에서 약세 후보의 역전 드라마나 후보들의 치열한 공약 공방 등을 기대하면 안된다. 이 영화는 학생선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치졸한) 욕망을 들추며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영화를 여는 건 누구보다 빠르게 학생회장 후보에 등록한 트레이시 플릭(리즈 위더스푼). 그는 영특하고 유능한 학생이지만, 선민의식에 빠져있다. 교사인 짐을 보며 '약자는 늘 강자를 방해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교사 짐 맥알리스터(매튜 브로데릭)는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동료 교사가 트레이시와 '선을 넘는' 애정행각하다 해고됐기에 트레이시를 대하는 것이 마냥 편하지 않은 것. 그러면서도 트레이시가 "제가 당선되면 우린 많은 시간을 보낼 거예요" 말한 것을 밤새 떠올리며 뛰는 심장을 억누르지 못한다. 아내와의 부부생활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그는 트레이시처럼 '금발 학생'이 나오는 에로 영화를 본다. 짐은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트레이시를 벌하고 싶은 마음에서인지, 아무튼 유일한 학생회장 후보 트레이시에 맞설 학생을 꼬드겨 후보로 등록시킨다.

 

큰 부상으로 미식축구를 못하게 된 폴 맷즐러(크리스 클라인)는 "넌 타고난 리더야"라는 짐의 말에 홀랑 넘어가 학생회장 후보로 나선다. 짐이 하는 비유나 설명도 제대로 이해 못 하는 '동네바보형' 같은, 그래도 학생들을 위해 후보로 나선 폴. 그의 후보 등록에 다른 학생도 후보 선거에 뛰어들었으니, 그의 배다른 동생 타미 맷즐러(제시카 캠벨)다. 그는 동성친구 리사를 사랑하지만, 리사가 보란 듯이 폴과 연인이 되자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다. 이렇게 삼파전이 된 학생회장. 각자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뒤엉킨 선거는 당연히 멀쩡하게 끝날 리 없다.

〈일렉션〉
〈일렉션〉 학생회장 후보로 나선 폴의 포스터
〈일렉션〉
〈일렉션〉 유일한 후보였던 트레이시는 폴의 후보 등록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렉션〉
〈일렉션〉 트레이시의 연설 장면

이렇게 인간군상극에 가까운 영화지만, 그래도 '선거'가 소재인 만큼 정치에 대한 냉소와 블랙코미디도 잊지 않는다. 세 후보가 기조연설을 하는 장면이 가장 일품인데, 이 장면에서 각 후보별 연설 장면과 대중의 반응은 시니컬하면서도 꽤 정확하다. 먼저 트레이시가 연설하는 장면을 보자. 명문으로 서두를 열고 학우들의 사례를 예시로 들어 자신만의 포부를 밝히는 트레이시는 이상적인 지도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객은 이미 그를 알지 않는가. 스스로의 유능함에 취해 내심 상대를 깔보는 그도 그렇게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니다. 그렇게 그의 겉모습과 속사정에 괴리를 느끼는 관객 앞에 영화는 슬그머니 트레이시와 성조기를 한 화면에 담는다. 아무리 유능한 후보처럼 보여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라고, 영화는 현실의 정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일렉션〉
〈일렉션〉 폴의 연설 장면

 

인기스타 폴은 어떤가. 그는 학생회장이 돼 학우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 후보로 나왔다고 말하지만(스스로 그렇게 믿겠지만) 정작 그는 짐의 계략에 선거에 나섰다. 게다가 그는 운동능력이나 인망과 별개로 누가 봐도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다. 영리하지도 않고, 이상적인 비전을 꿈꾸지도 않는다. 평소 모습과 다르게 잔뜩 긴장한 모습의 폴은 선한 것과 유능한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트레이시와 정반대의) 인간상을 제시한다.

〈일렉션〉
〈일렉션〉 타미의 연설 장면

진짜 블랙코미디는 마지막 후보 타미의 연설에서 발한다. 타미는 말한다. "누가 이딴 선거에 신경 쓰나요? 상관없잖아요. 상관있는 건 학생회장이 될 그 사람뿐입니다. 단지 입학원서에 한 줄 쓰기 위해 이 한심한 쇼는 해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뽑아주세요. 학생회장이 되더라도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이 파격적인 연설 이후 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준 '사이다'를 향한 박수다. '맞는 말이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면, 찬찬히 다시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타미는 학생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종용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 또한 태업하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사이다니까. 우리의 권리를 버리라는데 뭐 어때, 속이 시원한걸! 앞선 두 후보의 연설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지만, 아마 이 장면만큼은 누구라도 현실을 비춰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게 최고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사이다를 찾는 '사이다패스'들이 떠오를 테니까.

〈일렉션〉
〈일렉션〉 '사이다'에 열광하는 학생들


전반부에서 각 인물들의 관계와 욕망을 제시한 영화는 이 세 후보와 유권자들의 모습만큼 이들을 주관해야 하는 짐의 추잡한 모습으로 영화 후반부를 채운다. 아내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다른 여자를 떠올리는 그는 자신이 그렇게 혐오하는 트레이시보다 훨씬 더 비윤리적인 인간이다. 학생들에겐 "도덕과 윤리의 차이"를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한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에게서 꼴 보기 싫은 누군가를 떠올릴 수도, 혹은 스스로의 이중잣대를 돌이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짐은 '어른'이면서 학생들보다 못한 처사로 선거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후보 학생들을 정치인, 유권자들을 국민으로 대입한다면 짐은 무엇일지, 각자 연상되는 것이 있으리라.

〈일렉션〉
〈일렉션〉
〈일렉션〉
〈일렉션〉
〈일렉션〉
〈일렉션〉 짐이 학생들에게 쪽지시험을 맡기고 모텔로 향하는 장면은 "윤리와 도덕"을 운운하는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튼 선거는 이렇게 저렇게 흐르고 흘러 마무리된다. 다 건너뛰고 말하자면 트레이시가 선거에 당선되고, 짐은 해고된다(왜인지는 영화에서 확인하자). 말로 다 못할 일화들이 겹치고 겹쳐 영화에서 거듭 말하는 "운명"처럼 결말에 도달하는데, 그래도 그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다. 지도자감은 아니지만 확실히 인성이 좋은 폴은 실패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학생회장이 된 트레이시는 성공 가도를 걸으며 위대한 자신을 다독인다. 사고 친 타미는 가톨릭 학교로 전학 가지만, 거기서 운명적 사랑을 만나기까지 한다. 해고당하고 이혼까지 한 짐은 진심이든 자기합리화든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며 자축한다. 실패한 사람조차 스스로 성공이라고 믿고 있으니 본인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은 없을 것이다.

〈일렉션〉 트레이시는 성공했다.​
〈일렉션〉 트레이시는 성공했다.​
〈일렉션〉 짐은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면서도 트레이시를 마주치자…
〈일렉션〉 짐은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면서도 트레이시를 마주치자…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해피엔딩은 아니다. 트레이시는 '최고가 돼야만 하는' 엄마의 가르침에 여전히 목매고 있고, 폴은 '만약'이란 가능성에 매몰되고 말았으며, 타미는 비윤리적인 생활과 의존적인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짐은 스스로 회복됐다는 듯 자신하지만 트레이시를 연상시키는 영특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완전한 실패도, 완벽한 성공도 아닌 이들의 결말은 현실의 단면이다. 매 순간 행복할 순 없어도 매일 불행하진 않은 우리의 모습. 학생회장 선거라는 다소 단출한 소재로 사회와 삶의 아이러니를 이끌어낸 <일렉션>은 그래서 25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사회에서 여전히 회자되는 영화로 자리 잡았다.

〈일렉션〉의 마지막 장면들
〈일렉션〉의 마지막 장면들
〈일렉션〉의 마지막 장면들
〈일렉션〉의 마지막 장면들

한국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정치의 무게감'이 다소 버거운 사람이라면 이처럼 가벼운 영화를 접하는 것도 좋은 해소 방법일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정치판보다 작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지만, 묘사하는 사회의 풍경만큼은 묵직하다. 무엇보다 <금발이 너무해> 리즈 위더스푼, <고질라>로 유명한 매튜 브로데릭, <아메리칸 파이>의 크리스 클라인 등 익숙한 배우들의 앙상블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니 관람 포인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