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기사 카테고리

Movie & Entertainment Magazine from KOREA
>영화

〈86 의천도룡기〉부터 〈골드핑거〉까지, 홍콩영화 과몰입 팬의 양조위 추억담

주성철편집장
〈천녀유혼3〉와〈오호장〉(오른쪽)
〈천녀유혼3〉와〈오호장〉(오른쪽)

양조위는 스님이었다. 무슨 얘기냐면, 1982년 TVB TV시리즈 <천룡팔부-허죽전기>에서 그는 소림사 스님 역할로 단역 출연하며 데뷔했다. 나중에 <오호장>(1991)의 경찰 동료들로 함께 출연하게 되는 양가인이 소봉, 탕진업이 단예, 황일화가 허죽으로 출연한 이 시리즈에서 그는 스님으로 처음 등장한 것. ‘스님으로 데뷔했다’라는 표현이 양조위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에 적당히 무심하고 거리를 두며,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절제된 삶을 추구하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이 그와 어울린다고 느꼈달까.

장국영이 2편까지 찍고 떠나고 왕조현만 남은 <천녀유혼> 시리즈에서, <천녀유혼3>(1991)의 주인공을 이어받은 이가 바로 양조위였는데, 여기서도 그는 스님이었다. 금불상을 운반하기 위해 서역으로 향하는 스님 십방(양조위)이 난약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고, 귀신 소탁(왕조현)의 유혹을 받는다. 그 유혹을 떨쳐내려 불경을 외는 십방의 모습이야말로 당시 양조위라는 캐릭터를 그대로 보여준다. 전편의 영채신(장국영)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섭소천(왕조현)이 귀신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면, 십방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세상 모든 고뇌를 다 껴안은 인간이었다. 어쩌면 장국영 같은 캐릭터보다 양조위 같은 캐릭터가 세상 살기 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다.

김용 소설 속 장무기로 나온〈86 의천도룡기〉와 위소보로 나온〈마등출영〉(오른쪽)
김용 소설 속 장무기로 나온〈86 의천도룡기〉와 위소보로 나온〈마등출영〉(오른쪽)

살짝 ‘신필’ 김용 작가의 작품 얘기가 나온 김에 더 살펴보자면,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양조위가 교활한 기회주의자라 해도 무방한 「녹정기」의 ‘위소보’ 역할로 출연한 <마등출영>(원제: 정패위소보지봉지구녀, 1993)은 어딘가 어색했다. 부인 7명을 두고도 여자를 밝히는 위소보는 김용이 창조한 캐릭터들 중 가장 말싸움과 거짓말에 능한 인물이다. 오히려 양조위의 절친이기도 한 주성치야말로 실제로 왕정 감독의 <녹정기>(1992)에 출연했을뿐더러, 지속적으로 이 캐릭터를 변주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김용의 작품들을 배우별로 정리한다면 유덕화의 양과, 주성치의 위소보, 양조위의 장무기일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마등출영>은 양조위의 팬들이 보자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채 기어이 러닝타임을 채우는 그 모습이 실로 대견하고 신선해 보이기까지 하는 영화다. 위소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배우에게 위소보를 맡겼으니 말이다. 양조위 특유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만이 <마등출영>에 가득하다. 그렇다면, 김용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들 중 누구와 가장 비슷할까. 바로 TV시리즈 <86 의천도룡기>의 ‘장무기’야말로 양조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여복은 많지만 우유부단한’, 그리고 ‘언제나 끌려다니는’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장무기는 작품 내내 안쓰러울 정도로 여러 사람들에게 골고루 속임을 당하고 휘둘릴 대로 휘둘린다. 김용 작가가 작정하고 그렇게 만든 캐릭터인 대신 그에게 최고의 ‘운빨’을 선물하기는 했다.

삼국지 속 주유로 나온 〈적벽대전 1부-거대한 전쟁의 시작〉과 제갈량으로 나온〈초시공애〉(오른쪽)
삼국지 속 주유로 나온 〈적벽대전 1부-거대한 전쟁의 시작〉과 제갈량으로 나온〈초시공애〉(오른쪽)

김용 작가를 떠나 「삼국지」로 오자면, 오우삼 감독의 연작 <적벽대전 1부-거대한 전쟁의 시작>(2008), <적벽대전 2부-최후의 결전>(2009)에 양조위는 주유로 출연했다. 위, 촉, 오 삼국의 경쟁관계 속에서 오나라의 손책과 손권 휘하의 전략가인 주유는 외모, 인품, 무예, 전술에 있어 흠잡을 데 없는 당대의 천재였다. 언제나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이 하모니카나 색소폰 등 악기 하나 정도는 유려하게 연주할 줄 아는 설정을 삽입하는 오우삼에게 있어, 주유는 음악에도 능하고 조예가 깊은 캐릭터여서 유비 삼형제나 제갈량이 아닌 ‘주유의 <적벽대전>’이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일단 영화가 시작하면, 주유의 인품인지 양조위의 인품인지 알 수 없는 장면이 등장한다. 군대 막사 근처에서 물소를 잃은 노인과 소년이 주유를 찾아와 하소연하자, 그는 신발에 진흙이 묻은 몇몇 군사들이 범인임을 단박에 알아챈다. 날카롭고 즉각적으로 그들을 처벌할 수 있음에도 그는 모든 군사들이 진흙탕에 뛰어들어 같은 조건을 갖추게끔 해서 뒤늦게 질문한다. “내가 바로 도둑을 안 잡은 건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범인들로 하여금 색출 목적이 아니라 반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또한 실제로 군량 부족으로 인해 물소를 사냥할 수밖에 없었던 병사들의 얘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현실의 양조위와 픽션의 양조위 사이에는 별로 경계가 없다는 평소의 생각이 시대극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첩혈가두〉와〈중경삼림〉(오른쪽), 오우삼 월드와 왕가위 월드를 자유로이 오가는 유일한 배우 양조위
〈첩혈가두〉와〈중경삼림〉(오른쪽), 오우삼 월드와 왕가위 월드를 자유로이 오가는 유일한 배우 양조위

<적벽대전> 시리즈에 앞서 양조위는 제갈량으로도 출연한 적 있는데, 그 또한 어딘가 유약하고 진중한 이미지의 그와 잘 어울렸다. 한국 배우 조은숙과 함께 출연한 여대위 감독의 <초시공애>(1998)에서 임무 수행 도중 부상을 당한 형사 유일로(양조위)는, 영화사 사장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관(조은숙)을 병원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이후 그는 한 사원에서 벌어진 인질극에 투입되는데, 인질극을 벌이던 남자는 자신을 관우라고 착각하는 정신병자다. 이에 그는 유비도 장비도 아닌 제갈량 복장을 입고 연기하는 네고시에이터로 투입된다. 그러나 협상 도중 지붕이 무너지면서 양조위는 실제로 제갈량이 되어 과거 삼국 시대로 시간 이동을 하게 된다. 줄거리만 들어도 꽤 황당한 영화인 듯싶으나, 그것이 바로 <초시공애>에서 여대위 감독이 노린 부분이기도 하다. 그에게 양조위는, 영화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건 간에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운명에 그저 자신을 내맡기는 인물 말이다.

〈골드핑거〉
〈골드핑거〉

이처럼 돌고 돌아 길게 그의 과거를 훑어본 이유는, <골드핑거>의 양조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그가 연기하는 카르멘 그룹의 리더 청이옌(양조위)은 직진만 하는 인간이다. 이전까지 그가 보여준 깊은 슬픔과 사려 깊은 눈빛이 보이지 않는다. 러닝타임에서 꽤 긴 시간 동안 눈빛을 감추고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과거 양조위가 멀티캐스팅 안에서 원톱 주인공으로 출연한 첫 번째 영화인 오우삼의 <첩혈가두>(1990)에서도, 그는 죽어가는 친구(장학우)를 보며 그저 말없이 그가 원하는 대로 방아쇠를 당겨 죽음을 도와줄 수밖에 없었고, <중경삼림>(1994)에서는 실연의 고통에 그저 비누와 수건과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으며, <화양연화>에서도 차마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 채 여자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양조위는 언제나 홍콩영화 안에서 흘러가는 운명에 자신을 맞춰가는 인물이었다. 반대로 기어이 운명을 자신에 맞춰가는 인물은 늘 <골드핑거>의 상대역인 유덕화의 몫이었다. 그런데 <골드핑거>는 그것을 맞바꿔서 보여준다. 양조위와 유덕화의 팬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