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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선택, 그리고 후회: 에릭 로메르의 여름 영화가 남기는 메시지

이진주기자
에릭 로메르
에릭 로메르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고 뜨거운 해가 정수리를 내리쬐는, 여름이 기다려진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더욱 명확히 하자면, 들여다보게 되는 작품의 감독이 있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 에릭 로메르이다. 20세기 후반의 아름다운 프랑스 휴양지를 담은 에릭 로메르의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름 냄새가 물씬 난다. 무엇보다 작품 내 휴가를 위해 먼 곳으로 떠나온 사람들과 목적 없이 존재하는 이들 사이 튀는 케미스트리가 여름휴가를 바라는 필자의 마음을 더욱 흔든다. 관객을 순식간에 여름의 프랑스로 데려다주는 에릭 로메르의 작품 세 개를 선정했다.


해변의 폴린느(1983)

〈해변의 폴린느〉
〈해변의 폴린느〉

<해변의 폴린느>의 배경은 늦여름 해변가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마리온(아리엘 돔바슬)과 그의 사촌동생 폴린느(아만다 랑글렛)는 여름을 맞아 별장에 방문한다. 최근 이혼을 한 마리온은 별장 근처에서 과거의 연인 피에르(파스칼 그레고리)를 만난다. 피에르의 등장에도 마리온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자신과 같이 이혼을 한 경험이 있는 앙리(페도르 아킨)이다. 이들의 사랑 타령에 아직 어린 폴린느는 난색을 표한다. 그러나 이내 매력적인 소년 실방(시몬 드 라 브로스)을 만나고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비행사의 아내>(1981)로 시작하는 ‘희극과 격언’ 시리즈 중 3번째 작품인 <해변의 폴린느>는 후술할 에릭 로메르 여름 영화 중 단연 가장 여름과 닮아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뜨거운 볕이 쏟아지는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사춘기의 폴린느는 그 열기를 머금으며 성장한다.

 

〈해변의 폴린느〉
〈해변의 폴린느〉

 

‘사랑해 본 적 없다’던 15살의 소녀는 자기도 모르는 새 마음을 차지해버린 사랑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폴린느가 어리기 때문은 아니다. <해변의 폴린느>에 등장하는 성인들은 폴린느와 실방보다도 미숙한 사랑을 한다. 고집스럽게 집착하며 마리온을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피에르, 한 사람과 마음을 쌓지 못하는 앙리, 두 남자 사이 갈팡질팡하는 마리온. 이들은 각자의 결핍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랑을 이용한다. 결국 함께한 시간은 허무하게 흩어지고 사랑은 뿌리내리지 못한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장소는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몽생미셸 부근 줄루빌 해변이다. 어긋난 사랑에 안절부절못하는 인물들 뒤로 펼쳐지는 낭만적인 바다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 더욱 빛난다.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1987)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희극과 격언’ 시리즈 중 여섯번째이자 마지막 편이다. 영화는 여름의 도시를 조명한다. 파리 근방 소도시의 시청에서 일하는 블랑쉬(엠마누엘 숄레)는 구내식당에서 새로운 친구 레아(소피 르누아르)를 만난다. 같은 취미 생활을 바탕으로 빠르게 친분을 쌓은 둘은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블랑쉬는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못해 외로워하고 이를 위해 레아는 자신의 남자친구 파비앙(에릭 빌라드)의 친구를 소개해주고자 한다. 그렇게 블랑쉬는 알렉상드르(프랑수아-에릭 젠드론)를 만나게 된다. 문제는 레아가 여행을 떠난 이후 블랑쉬의 마음에 알렉상드르가 아닌 다른 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름을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에릭 로메르의 작품은 휴양지를 배경으로 한다. <해변의 폴린느>, <여름이야기>, <수집가>와 <녹색광선> 등의 인물들은 휴가를 위해 찾은 낯선 장소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반면,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의 배경이 되는 세르지 퐁투아즈는 파리의 북동부에 위치한 신도시로 완벽한 계획도시의 모습을 띈다. 깔끔한 거리에 로마풍 건물이 여유롭게 올라서 있고, 넓은 인공호수와 울창한 나무가 가득한 공원은 바쁜 도시인의 여유를 챙겨준다. 다소 부자연스러울 만큼 잘 만들어진 이 도시에는 많은 사람이 머물지만 그들은 진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지 못한 채 부유한다.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등장인물의 화려한 패션이다. 채도 높은 레드, 블루, 옐로우와 그린 등의 색채를 활용한 옷은 관객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영화에서 ‘색(色)’은 단순히 미학적인 장치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변화하는 관계의 상징으로써 장면의 아이러니를 돋보이게 한다. 이 같은 점은 특히 영화의 후반부 블랑쉬와 레아가 오해를 풀고 각자의 연인과 함께 서는 장면에서 돋보인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색의 연인을 품에 안으며 그간 끊임없이 말로 표현했던 본래의 의도와 다른 길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했다. 자기 자리를 찾은 네 연인은 그제서야 편히 웃어보인다.


여름 이야기(1998)

〈여름 이야기〉
〈여름 이야기〉

 

<여름 이야기>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사계절 이야기’ 중 3편이다. (‘사계절 이야기’는 봄, 겨울, 여름, 가을 순으로 개봉하였다.) 영화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못한 청춘에 대해 담는다. 수학과 석사 수료생인 가스파르(멜빌 푸포)는 휴가를 맞아 프랑스 북서부의 브르타뉴를 방문한다.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난 여자친구 레나(오렐리아 놀린)을 만나기로 했지만 깜깜무소식이다. 그러던 중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민속학 대학원생 마고(아만다 랑글렛)를 만나고 우정을 쌓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알게 된 마고의 고향 친구 솔렌(그웨낼 시몬)의 유혹을 받는다. 가스파르는 레나, 마고, 솔렌 세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오위상트 섬에 함께 가자는 약속을 모두에게 하게 된다.

〈여름 이야기〉
〈여름 이야기〉

 

<여름 이야기>는 가스파르가 브르타뉴를 찾은 7월 17일부터 파리로 돌아가는 8월 6일까지 약 20일의 시간을 일기 형식으로 나열한다. 매일의 날짜와 요일을 명확하게 제시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작중 시간이 현실과 비슷한 속도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어 리얼리티를 부각시킨다. 이 시간 속에서 가스팔트는 상대에 따라 빠르게 말을 바꾸고 레나, 마고, 솔렌은 화를 내며 그를 몰아간다. 결국 또다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가스팔트는 문제점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

 

영화는 짧은 여름휴가에서 만난 사랑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해변의 폴린느>와 중첩되는 면이 있다. (<해변의 폴린느>의 소녀 폴린느 역을 맡은 배우 아만다 랑글렛이 마고 역을 맡아 성숙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랑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 두 영화의 주인공은 결정적이 차이를 보인다. <해변의 폴린느>의 10대 소녀 폴린느가 내리쬐는 태양처럼 뜨겁고 적극적으로 사랑의 문제에 나섰다면 그보다 나이가 많은 <여름 이야기>의 가스팔트는 여름밤의 바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때문에 가스팔트는 파리로 떠날 때까지 자신의 마음을 직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두 인물 모두 사랑에 실패했을지라도 <해변의 폴린느>에서는 휴양지를 떠나는 순간 렌즈 가득 폴린느의 미소가 담긴 반면 <여름 이야기>의 카메라는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가스팔트를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