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기사 카테고리

Movie & Entertainment Magazine from KOREA
>영화

[강정의 씬드로잉] “뭘 물어봐? 그림을 보는 건 당신들이잖아?” 〈히든 어웨이〉

성찬얼기자
〈히든 어웨이〉
〈히든 어웨이〉

 

선사(先史)라는 건 말 그대로 역사가 종이에 글자로 쓰이기 이전이다. 지구 역사는 역사 시대보다 선사시대가 훨씬 길다. 하지만 서시(西紀)가 선사와 역사 시대를 구분하는 척도로 선험화된 지 오래다. 기준이 예수의 생몰 시점이다. 연원을 따지자면 보다 긴 얘기가 필요하겠지만 결론만 추리자면, 언어 탄생 이후보다 그 이전의 생몰 현상이 더 본원적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물론,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사람인가 동물인가 원시인인가

 

선사는 어떤 개념 규정이나 판단이 없었다. 짐승적 본능이 우선이었다고 해도 아주 틀리진 않을 거다. 현대와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도 없을 거고, 그래서도 안 될 거라는 판단은 있다. 어쩌면 굳이 그 시대를 말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다만,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럼에도 아예 인식조차 못 하는 행동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제기해 줄 단서들은 선사적 인간의 행동 양태에서부터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여길 뿐이다.

 

지오르지오 디리티 감독의 <히든 어웨이>(2020)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괴짜 화가 안토니오 리가부에의 일생을 다룬 영화다. 안토니오 리가부에는 20세기 중반, 엄청난 그림값을 자랑한 화가였다. 그의 그림을 보면 언뜻 그보다 앞선 시대 화가들, 가령 빈센트 반 고흐나 조르주 루오, 또는 폴 고갱의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색조나 다루는 주제들이 비슷해 보인다는 뜻일 뿐, 큰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히든 어웨이〉
〈히든 어웨이〉

 

리가부에는 생전 ‘바보’ 또는 ‘미치광이’ 소리를 들었다. 정신병원에도 세 차례나 갇혔었는데, 당대 사람에게 비슷한 취급을 받았던 반 고흐의 병력(病歷)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신체적 결함이 있었다. 리가부에는 189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1913년 독극물 중독으로 어머니와 세 형제가 사망하게 되는데, 독을 푼 사람은 아버지였다. 이후 리가부에는 평생 아버지를 증오하며 살았다. ‘리가부에’라는 성(姓)도 그 스스로 바꾼 것이었다. 친부의 성은 확인 불가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닭을 그리려면 스스로 닭이 되어라?

 

자라면서 그는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두개골 기형과 구루병을 앓게 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오랜 방랑으로 호스피스의 지원을 받으며 겨우 살아남는데, 우연히 그의 미술 재능을 간파한 조각가 레나토 마리노 마자쿠라티에게서 그림의 기본을 익힌 후 독학으로 미술에 몰두한다. 영화는 이러한 이력을 빠르게 삽화 처리하듯 전개한다. 그래서 그의 병인(病因) 등 삶의 구체적 사건들은 모호한 암시만 줄 뿐이다. 허나, 그가 어릴 적부터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크게 안고 성장한 인물이라는 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화 초반, 그가 어릴 적 계모(라 짐작되는)가 그의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이 안엔 악마가 있어!”라고 꾸짖는 장면이 있다. 그에겐 그게 깊숙한 트라우마로 각인된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외로움을 호소할 땐 돌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마구 찧는다. 대화도 어눌하고 왜소한 체구에 늘 구부정하게 운신한다. 성질은 불덩어리와도 같다. 자신의 그림이 모욕 당했다고 느끼면 닭처럼 양팔을 퍼덕이며 맹수처럼 으르렁댄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종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에겐 그림밖에 없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기괴하다. 닭을 그릴 땐 닭처럼 꼬꼬댁 소리를 내고 오리를 그릴 땐 오리처럼 움직인다. 그가 유명해진 건 호랑이 그림들이다. 천진하기도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색조와 역동성은 강렬하다. 그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하곤 호랑이처럼 행동하는 장면도 있다. 마치 스스로 캔버스 안에 들어가 호랑이가 되겠다는 기세다. 어처구니없으면서 서글프고, 우스우면서도 맹렬하다. 아이 같기도 미친 사람 같기도 하다. 아이들은 그를 조롱하는 한편, 그의 해맑은 심성에 공감하기도 한다. 아이와 성인 어느 지점, 혹은 사람과 동물의 어느 지점에 그의 정체성이 숨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머릿속 악마’는 늘 날 보고 웃지”

〈히든 어웨이〉
〈히든 어웨이〉

 

스위스 출신이지만, 오랜 방랑과 전쟁 등의 이유로 그는 여러 언어를 쓴다. 2차 대전 당시엔 이탈리아 육군에서 독일어 통역관으로 복무했다. 흘러 흘러 이탈리아에 정착했지만, 이탈리아어는 그에게 외국어인 셈이다. 그만큼 그는 어눌하고,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툴렀다. 어쩌면 모국어 역시 그닥 능통하진 않았을 것 같다.

 

앞서 그림 그리는 방식에서 보듯, 그는 보고 행동하고 흉내 내는 데 특화된 기질을 지녔다. 그가 처음 전시회를 열자 기자들이 몰려온다.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면서 기자가 그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자 그가 대뜸 말한다. “그림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요? 그림을 보는 건 당신들이잖아요?”

 

영화는 어떤 특정 사건을 크게 부각하거나 인물들 간의 관계를 세밀하게 접사(接寫)하지 않는다. 안토니오 리가부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근접한 인물과 사건들을 툭툭 흘려놓듯 언급할 뿐이다. 그래서 더 부감으로 떠오르는 게 리가부에의 초상이다. 리가부에 역을 맡은 엘리오 제르마노는 1980년 생, 이제 겨우 마흔 중반의 잘생긴 배우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는 머리가 빠지고 기형적으로 얼굴이 비틀린 60대의 리가부에를 신묘하게 연기했다(70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남자 연기상을 수상했다). 거의 ‘원맨쇼’라 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두 시간이 훌쩍 지난 느낌이다.


잘생긴 배우의 광기에 찬 ‘원맨쇼’

〈히든 어웨이〉
〈히든 어웨이〉

 

특별한 전언도, 유별난 감정도 크게 느껴지진 않는 영화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영화적 만듦새에 대한 판단도 별로 하게 되지 않는다. 그저 어떤 괴상한 사람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게 만드는데, 뒤끝이 아리는 건 분명하다. 광기에 시달리며 고독하게 살다간 예술가 이야기는 지나치게 식상한 테마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평가엔 늘 ‘사후 명예’라는 게 뒤따른다. 리가부에는 생전에 큰돈을 번 화가라는 점에서 고흐나 고갱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는 그림을 팔아 번 돈으로 기사까지 딸린 고급 자동차를 세 대나 가지고 있었다. 오토바이는 무려 열두 대였다. 리가부에는 특히 빨간색 오토바이에 집착했다. 그가 사망하게 된 것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난 후유증 탓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장면이 잠깐 나왔다가 반신 마비가 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으로 전환될 뿐이다. 왜 그걸 직접 보여주지 않았는지 약간 의아스럽기에 곰곰 따져보게 된다.


왜 오토바이에 집착했을까?

 

예술가의 죽음은 때로 신화가 된다. 앞서 ‘사후 명예’라 말했거니와, 실제 삶의 실상과 작품을 통해 걸러나오는 허상은 명백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대개 작품으로 후광을 얻은 예술가의 실질적 배면조차 예술의 일부로 여겨 칭송하곤 한다. 하지만, 예술의 배면은 대개 비참하거나 추루하다. 어이없을 정도로 참혹하고 비열하기조차 할 때도 있다. 죽음의 방식 또한 신화가 된다. 자전거를 타다가 스카프에 목이 감겨 죽은 이사도라 던컨의 죽음은 사실인 동시에 이후 사람들의 입에서 가공된 판타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 명의 ‘여신’이 역사에 기록된다. 리가부에는 어떤가.

그는 지금도 계속 닮처럼 양 날개를 펄럭이고 호랑이처럼 으르렁대며 또다른 세상을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히든 어웨이〉
그는 지금도 계속 닮처럼 양 날개를 펄럭이고 호랑이처럼 으르렁대며 또다른 세상을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히든 어웨이〉


그의 삶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그 상처 속으로 깊이 숨거나 때론 격렬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 그에게 당대 사람들은 ‘접근 엄금’이라는 묵계를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한때나마 꿈같은 영화를 누렸다. 그럼에도 그는 죽기 직전까지 혼자였고, 어릴 적부터 각인된 ‘머릿속 악마’는 끝내 그를 잡아먹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현대를 살다간 원시인이 되었다. 오토바이는 그의 죽음에 아무 책임 없다. 그의 유일한 애장품이자 ‘한몸’이었던 오토바이는 그저 그가 그만의 상처와 꿈과 예술 속으로 도피하는 또 다른 붓이었을 뿐이다. 그는 지금도 계속 닮처럼 양 날개를 펄럭이고 호랑이처럼 으르렁대며 또 다른 세상을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영화는 오토바이를 탄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났어야 했던 게 옳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