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의 명장 페데리코 펠리니(1920~1993)는 허풍이 심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미국의 마블 코믹스 같은 만화를 좋아했고, 실제로 여러 만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영화 구성 노트에도 만평 스타일의 스케치를 여럿 남겼다. 허풍 없는 만화는 소금 안 친 콩국수와 같다. 현실을 과장 또는 희화하고 심각한 사안도 얄궂게 비틀어 우스개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실재와 다른 풍미로 우려낸다.
명감독, 자신을 풍자하다
<8과 1/2>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명작이자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전환점이 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 이전 그는 비토리아 데 시카 풍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대표작이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와 안소니 퀸이 열연한 <길>(1954)이다. 그러던 게 또 다른 명작 <달콤한 인생>(1960)에서부터 조금씩 변화한다. <8과 1/2>(1963)은 그의 영화가 완전히 초현실적 혹은 만화 풍의 망상으로 변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망상에 사로잡힌 자의 고뇌를 과장되게 표현한다. 중년의 영화감독 귀도(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는 피해의식과 편집증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영화 제작과 관련한 스트레스 탓이다. 나이는 43세. 영화 촬영 당시 펠리니의 나이와 같다. 건강이 안 좋아져 온천으로 요양 온 상태. 귀도는 영화를 찍다가 하늘에서 추락하는 꿈을 꾸고 나서 깬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의 숙소를 들락거린다. 광천수를 상용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러다가 그의 정부이자 배우인 여성이 찾아온다. 그녀는 산만한 수다쟁이다. 요양과 위로를 필요로 하는 귀도에게 여성은 또 다른 스트레스 대상이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떤다. 둘은 각자 배우자가 있다. 귀도는 그 와중에 여러 환상을 겪는다. 주로 부모님이 등장하는데 그들에게 귀도는 여전히 어린아이다. 귀도는 부모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들로부터 탈출하려는 꿈을 꾼다. 환상은 무시로 귀도의 일상에 틈입한다. 영화 전체가 현실과 환상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보다 보면 어느 게 환상이고 어느 게 현실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아니, 그 모든 게 허튼 환상의 난장이라 해도 틀리진 않을 거다.
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달라는 거야?

영화 제작은 지지부진이다. 제작자와 작가는 귀도의 구상에 일일이 트집을 잡는다. 주제가 어떻다느니 서사적 개연성이 어떻다느니 배우는 누구를 써야 한다느니 주문투성이다. 귀도는 그들을 노련하게 대처하는 듯하지만, 속은 썩어간다. 그때마다 귀도는 또 다른 환상을 본다.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한 여인의 모습이 무슨 베일에 싸인 듯 귀도를 사로잡는다. 클라우디아라는 불리는 그녀(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그의 영화 속 이상향이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 클라우디아에 대한 환상이 커질수록 영화는 허공에 붕 뜬다. 정말 완성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영화 전체가 뒤틀린 유머로 가득 차 있지만, 이 부분만큼은 어쩐지 서글프고 애잔하다. 손에 잡을 수 없는 환상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당시 막 스타로 떠오른 이탈리아 최고의 여배우였다. 남성들의 에로스 판타지를 자극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펠리니 정도의 감독이라면 그녀를 캐스팅하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클라우디아는 실존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저 귀도의 환상 속에서나 완벽한 여인이다. 정말 그녀가 실물로서 카메라에 선다면 귀도의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귀도는 그저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빌미를 그녀를 통해 덮어씌울 뿐이다. 반복건대, 영화는 정말 완성될 수 있을까.
귀도는 어릴 적부터 가톨릭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종교로부터 억압당한 기억이 많다. 귀도가 어릴 적 동네에 한 미친 여인이 살았다. 덩치가 우람하고 흉측하게 생긴 그녀는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다. 바닷가 움막 같은 데 혼자 사는 그녀는 귀도가 동전을 던져주면 룸바를 멋들어지게 췄다. 그 탓에 귀도는 사제들에게 엄벌을 받는다. 일종의 타락과 종교적 불경을 놀이 삼은 것인데, 원죄 의식과 일탈 욕구의 충돌은 서양의 많은 예술가들이 오래전부터 천착해온 문제다. 귀도가 복합적인 의식 구조를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여, 인생이여, 안녕!

귀도는 현실의 여러 문제 – 정치나 이념, 종교와 욕망, 사랑과 배신 등에 대해 자신만의 영화적 접근법을 찾아내야 하는 게 책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영화가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풍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영화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자꾸 도망치려 한다. 그럴수록 망상은 심해지고, 망상이 심해질수록 영화는 계속 허공으로 달아난다.
귀도가 만들려는 영화는 공상과학적 내용이다. 거대한 우주선 발사대가 이미 준공되어 있는 상태인데, 실제로 진행되는 일은 전무하다시피 한 상태. 돈이나 명예에 굶주린 사람들이 들끓으며 온갖 소동을 피워댈 뿐, 정말 우주로 날아가는 건 영화적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소동에 시달려 점점 초점을 잃어가는 귀도의 정신뿐이다. 그러다가 아내(아누크 에메)마저 현장을 찾는다. 바람난 여배우와 신경전이 벌어지고 구이도는 엄살과 응석으로 상황을 면피하려 한다. 솔직히 말해 바보 같고, 에둘러 말해 처량하다.

귀도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소동을 피우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이 한자리에 모여 차례로 자신의 대사를 읊는, 극중극 형태의 연극 한 편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귀도는 모든 여성의 왕이자 적이자 노리개가 된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감내하거나 사랑하거나 탐닉했던 모든 일들이 스스로를 옥죄어오는 피해망상의 발로이자 결과로 여겨진다. 귀도의 뇌 속에서 우글거리는 삶이 편린들이 여성들을 통해 구이도의 병증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도 있다. 귀도는 자멸과 추락의 입구에 서 있는 셈. 그는 어쩌면 우주선 발사대에 우주선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세워두고 발사 버튼을 누르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른다. 지구여, 삶이여, 그리하여 모든 영화(榮華)와 영화(映畫)마저, 아리베데르치(Arrivederci)!
영화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거의 명백히 자전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드물게 오스카상마저 거머쥐며 출세했지만, 페데리코 펠리니는 아마 자중지란에 빠져있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건 예술가들이 대개 한 번씩 빠져드는 늪이자 덫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여전히 그를 추앙하고 칭송하지만, 모든 걸 해도 틀린 것 같고, 어떤 걸 해도 만족하지 못하며, 그 모든 진실이 다 가짜 사기극의 종양이 되어 자신마저 갉아먹게 되는 상황. 그럴 때 그는 응석받이 아이가 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결국 그 모두가 하이에나 떼 같고, 심지어 오래 가꿔 온 사랑마저 서로에 대한 기만처럼 여겨진다. 그는 고립감을 느낀다. 작파하거나 대놓고 사기를 치거나 귀를 꽉 닫고 자기만의 철옹성에 숨어 걸쇠를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니 그럴수록 어떤 여지 - 가령 자신이 더 좇거나 추구하거나 거머쥐어야 할 환상과 꿈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귀도의 경우는 클라우디아다. 그녀는 그에게 구원의 밧줄과 같지만, 손대면 앗 뜨거! 하면서 화들짝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촉매제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귀도가 클라우디아의 환상을 처음 보는 건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공원에서였다. 제작자, 그리고 작가의 지청구와 허세를 귓등으로 튕기다가 문득 귀도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린다. 선글라스는 빛의 거름막이다. 렌즈를 통해 빛을 차단하고 더 어두워진 풍경에서 사물을 식별하기 위한 도구다. 그러면서 일종의 필터이다. 선글라스를 통해 보는 세상은 실제와는 다른 빛깔, 다른 음영이다. 그 너머에 귀도의 유일한 환상이 실재처럼 등장한다. 그녀는 그가 다른 삶을 살아내게 만드는 천상의 애인이다. 귀도는 과연 그녀를 영화 속에 재연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또 다른 삶의 매개를 스스로 선취할 수 있을까. 결론은 당연히 영화를 다 보고 판단할 일. 참고로 이 영화의 제목은 펠리니가 당시까지 만든 모든 영화를 다 포함한 숫자다. 1/2. 그러니까 궁극의 미완성이다. 영화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허상인 그대로 잠시 당신의 인생을 달콤하게 속이거나 빛낼 뿐. La Dolce Vi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