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서 절대 잊히지 않는 날이 누구에게나 있다. 대체로 기쁨이나 축복보다는 고통과 상처로 남은 날이다. 행복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신기루와도 같다. 실제로 겪었으나 그 겪음의 여파가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간절히 붙잡으려 하나 손에 잡히는 순간, 또다른 시간의 페이지 속에 묻혀 금세 잊힌다.
과거 속으로 휩쓸려가는 사람들
반면에, 고통은 그렇지 않다. 한번 상처 입은 사람은 때로 죽을 때까지 그 상처 속에 갇혀 산다. 하나의 낙인이거나 불행의 표식처럼 부지불식 시간의 더께를 털어내며 오늘을 과거 속으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미스틱 리버>(2003)는 과거의 강물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현존하는 미국 추리소설의 대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굉장히 긴 분량의 소설인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30여 분의 러닝타임 속에 소설의 핵심 요소들을 밀도 높게 집약시켰다. 인물들의 심리와 마을 풍경들이 예리하게 맞물리면서 허투루 나열되는 장면 하나 없을 정도로 꼼꼼한 디테일들이 분초마다 뜨끔하게 뇌리를 찌른다. 물론, 배우들의 명연 덕일 거다.

1970년대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이 배경이다. 마을 외곽으로 강이 무연히 흐르고 라디오에선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가 중계 중이다. 한가하고 나른한 풍경. 10대 초반의 남자아이 세 명이 하키스틱을 들고 놀다가 맨홀에 퍽을 빠뜨린다. 마을 아래로 흐르는 하수구 입구, 그 물은 아마도 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하키 놀이를 그만둔 아이들이 어느 공사장 입구에 발라진 시멘트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다. 지미, 숀, 그리고 데이브.
왜 세 아이 중 그였을까?
그때. 검은 중형 세단 한 대가 아이들 앞에 멈춰 선다. 건장한 체격에 경찰 배지를 허리에 찬 중년 남자가 아이들을 위협한다. 자동차 안에도 한 남자가 있다. 남자가 주눅 든 아이들을 위협하면서 그들 중 가장 소심해 보이는 데이브를 강제로 차에 태운다. 다른 아이들은 멀뚱히 바라만 본다. 자동차 뒷유리를 통해 친구들을 돌아보는 데이브의 얼굴이 흐릿하다. 이후 데이브는 남자들에게 나흘 동안 감금당한 채 성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25년이 지난다. 영화는 그 세월 동안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지미 마컴(숀 펜)은 마을에서 마트를 운영하고, 데이브 보일(팀 로빈스)은 아내와 야구 선수를 꿈꾸는 남자아이를 키우며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숀 디바인(케빈 베이컨)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형사가 되어 있다. 그저 한 동네에 오래 산 이웃에 불과할 뿐, 셋은 더 이상 어릴 때만큼 친하지 않다. 그들이 격조해진 까닭 역시 영화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지미는 마트 사장이지만, 어딘지 과거가 미심쩍다. 그에겐 케이트라는 19살짜리 딸이 있다. 사망한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부녀의 애정은 각별해 보인다. 영화 초반에 그 각별함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지미에게 케이트는 아직 어린 미성년에 불과하지만, 그 또래 여자아이가 으레 그렇듯 케이트는 부모 몰래 남자 친구도 사귀고 있다. 케이트가 지미와 스킨십을 하고 나서 마트를 나와 자신의 차에 탄다. 이후, 비극이 시작된다.
범인은 마을 안에 있다?!

차를 타고 떠났던 케이트는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된다. 총격과 폭행 흔적이 참혹하다. 하필 작은딸의 성체배령을 하던 일요일이다. 정장 차림의 지미가 격노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담당 형사는 다름 아닌 숀. 동료이자 선배인 베테랑 형사 휘트니 파워스(로렌스 피시번)와 함께 수사에 착수한다. 동네 주민들에 대한 탐문 및 죽기 직전 케이트의 행방에 대해 조사하다가 술집에서 케이트를 목격했던 데이브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숀은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파워스는 단호하게 데이브를 몰아붙인다.
케이트의 죽음은 지미의 과거 행적과 데이브가 어린 시절 겪었던 감금 체험까지 들춰내는 불씨로 작용한다. 오랜 시간 한 동네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 의심과 오해와 반목이 발생한다. 그럴수록 범인은 더욱 오리무중이고 서로의 감정만 이글이글 충돌할 뿐이다. 평범해 보이던 동네 전체가 하나의 음모 속에 빠져든 거대한 늪이 된다. 25년 전, 맨홀에 빠져버린 하키 퍽이 되돌아와 모든 사람의 상처를 들쑤시고 묻어뒀던 기억을 되살려내는 듯하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던 세 친구의 성장 과정이 부지불식 또렷해진다. 시간은 오래 흘렀지만, 강은 여전히 말없이 흐르고, 그 강 속에 파묻힌 과거도 다시 핏줄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상황. 영화는 갑자기 급류로 변한다.
서른 중반을 넘긴 세 친구는 시간이 흐른 만큼 어딘지 닳고 닳은 느낌이다. 마을엔 그들의 아이 및 또 다른 소년들이 살고 있다. 한 개인의 과오나 오류가 아이들에게 유전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케이트를 죽인 범인을 찾는 게 영화의 기본 줄기지만, 데이브를 비롯 그 어떤 마을 사람도 케이트를 죽일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점점 범인 찾기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다른 사실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데이브가 겪었던 고통과 상처가 그렇게 부각된다. 데이브는 괴이하고 끔찍한 경험을 지닌 인물이다. 그렇기에 더 괴이하고 끔찍한 사건과 일차적으로 밀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사람들도, 관객들도 아마 그럴 것이다.
기억의 맨홀 속에 갇혀버린 자

데이브는 세 친구 중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과거의 심리적 내상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사소한 자극에 의해서도 혼란스럽고 위험한 상태에 빠진다. 그는 스스로를 흡혈귀에 물린 또 다른 흡혈귀라 여긴다. 불행한 상처가 한 개인의 인격 전부를 잡아먹어 근거 없는 죄의식에 빠지게 만드는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데이브가 케이트의 살인과 유관한지 무관한지 여부는 드러난 사실 관계 너머에서 데이브를 고립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파워스는 그 지점을 파고들어 자백을 이끌어내려 하지만 명백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둠 속에서도 강물은 쉼 없이 흐르지만, 그 속을 헤아릴 순 없다. 데이브는 기억의 맨홀 속에 갇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 그럼에도 그는 알고 있다. 적어도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사항이다. 이미 아내 셀레스트(마샤 게이든)에겐 털어놓았지만, 케이트의 죽음이 모든 걸 암흑으로 지워버린 상태이므로 본인이 설명한들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또 데이브를 절망케 한다.
영화는 결국 비정하게 끝난다. 사건의 모든 전말이 밝혀지나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듯한 여운을 남긴다. 아무도 애초부터 악하려고 악하지 않고, 그 어떤 사람도 불행한 상황에 휘말리면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일반론마저 부질없게 만드는 허망한 결론 같기도 하다. 여전히 께름칙하고, 여전히 불행은 불행한 자에게만 일방적이라는 암담함마저도 닳고 닳은 푸념일지 모른다. 간발의 차로 빗나가는 진실 앞에서 지미도, 숀도 속수무책이다. 25년 전, 괴한에게 끌려가는 데이브를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또다시 재연되는 것이다. 숀이 말한다. “그때 우리 모두 그 차에 탔어야 했어.” 지미 역시 암담하고 참담하다. 완전히 손 씻어낸 줄 알았던 범죄자의 본능이 되살아나는 걸 다시 한번 숨결 깊숙이 숨겨야 한다. 그에겐 케이트 말고도 또 다른 아이들이 있다.
흐르지 않는 것들은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바탕 거대한 급류가 휩쓸고 간 듯한 길 위에 둘이 서 있다.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그 자리에 없는 데이브의 불행을 멀뚱히 바라보는 것이라 해야 할까. 왜 하필 내가 아니고 데이브였을까. 또는 왜 데이브만 예나 지금이나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책망하듯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 한번 흐른 강물은 왜 똑같은 상처를 시간 속에서 되돌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픈 비밀을 혼자 끌어안게 만드는가. 둘은 바라본다. 아이 시절로부터 멀리,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맨홀 속에 감춰져 있는 자신들만의 비밀을. 강은 멈춤 없이 흐른다. 흐르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흐르지 않는 그대로 어둠 속에 숨긴 채. 시간이 거대한 타원이었던 거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