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근작 <더 킬러>(2023)에선 다음과 같은 대사가 여러 차례 반복된다.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 마라. 아무도 믿지 마라. 단계마다 자문하라 ‘이게 이득이 되는가.’ 그게 전부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공감하지 마라. 공감은 나약함이다. 나약함은 약점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전념해야 한다. 간단하다.”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 않는 영화

무슨 상투적인 자기계발서에서 볼 수 있을법한, 그런 만큼 삶에 있어 때론 지극히 당연한 지침들이다. 영화에서 이 대사는 주인공의 독백, 그러니까 일종의 방백 효과를 낸다. 관객들에게 주인공의 행동 원칙을 알려주는 셈인데, 주인공은 이 원칙에 철저히 입각한 행동을 말끔하게 완수해낸다.
주인공은 이른바 살인청부업자, 즉 전문 킬러다. 영화 자체가 킬러 역을 맡은 마이클 패스벤더의 원맨쇼라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대사가 킬러의 시점에서 흐른다. 얼추 가늠컨대 전체 대사의 70퍼센트 이상이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흔한 설정은 아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누아르 스타일을 답습하지만, 마냥 비장하거나 칙칙하지도 않다. 전개는 명쾌하고 연출은 단조로우면서도 스타일리시하다. 데이비드 핀처의 전작들과 비교해 볼 만한 구석도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킬러의 여정이 시작하기 때문일까. 어째 20세기 중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누보로망(Nouveau roman), 요컨대 ‘메타소설’이라고도 불리는 독백체 소설이 연상되기도 한다. 알랭 로브그리예 등으로 대표되는 그런 소설들은 대개 자아 정체성이나 세계와의 불화 등, 당시 유럽에서 풍미했던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거기에 절제되었으나 칼같이 마름질된 현대적 연출 기법이 적용된 듯한 영화. 정말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는 않은 듯 전체적인 만듦새가 잘 맞춘 퍼즐과도 같다.
그가 처음 실패하자, 영화가 시작한다

감독의 전작들이 떠올랐던 것 역시 그런 맥락이다. 무엇보다 <파이트 클럽>(1999). 두 명의 자아로 분열된 채 잠재된 폭력 충동을 드러낸 주인공의 무의식적 뿌리를 거슬러 더 성장하거나 완전무결해지면 이런 캐릭터가 탄생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두 작품 다 다른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파이트 클럽>은 미국 소설가 척 팔라닉이 원작자고, 이 영화는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 듀오 마츠와 뤽 자카몽의 만화가 원작이다. 폭력과 살인이라는 소재 말고는 내용도 주제도 다른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배면이 유사하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또 한편은 연쇄살인마를 다룬 <조디악>(2007). 실체를 알 수 없는 살인자라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와 데칼코마니 형태로 짝 맞춰 볼 수 있을 법하다. 물론 그 영화 역시 <더 킬러>와는 완전 다른 원전을 가진 작품이다. 그럼에도 어떤 ‘솜씨’라는 측면에선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더 킬러>는 결국 누군가가 가진 특별한 ‘솜씨’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킬러는 중년 남자다. 인물도 출중하고 체격도 탄탄하고 행동은 용의주도하며 지능도 매우 뛰어나다. 일 처리에 군더더기가 없고 준비성도 뛰어나다. 마치 모든 걸 자로 재듯 긋고 자르고 꿰어맞추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낸다. 완력 또한 굉장하다. 영화는 에필로그 포함 총 7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챕터는 킬러가 이동하는 장소에 따라 나뉜다. 그중 네 번째 챕터에서 킬러는 짐승(챕터 제목이 ‘짐승’이다) 같은 거구의 사내와 일전을 벌인다. 영화 중 가장 요란한 액션 씬이 펼쳐진다.
짐승을 만나면 짐승이 되는 쿨가이

대체로 지루하고 건조하게 전개되던 이 영화가 이 챕터에서만큼은 불과 피를 마구 뿜는다. 플로리다의 한 저택에서 치고받는 둘의 액션은 원색적이고 거칠다. 잘 계산된 합으로 묘기 부리듯 하지 않는다. 둔탁하고 맹렬하게 화면 가득 아드레날린을 황칠할 정도다. 정확하고 단조롭게 흐르던 전개가 이때만큼은 어떤 틀을 벗고 무장 해제된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격투가 상당히 길다. 피차 피칠갑이 된 상태로 혼을 빼다가 결국 승자는 킬러. 킬러는 상처투성이가 된 채 저택에 불을 지르곤 자리를 뜬다. 그리고 다시 원래 패턴으로 돌아와 이어지는 멀끔 말끔 단호한 장면들.
킬러의 성공률은 야구로 치면 10할이었다. 적어도 영화 시작 전엔 그랬던 것 같다. 영화는 파리의 한 스튜디오에 숨어 프랑스의 고관대작쯤으로 보이는 한 늙은이를 타깃 삼아 저격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독백이 처음 깔리는 것도 이때부터다. 킬러가 방아쇠를 처음 당기는 시점은 정확히 러닝타임 20분을 넘길 무렵. 그런데 실패한다. 총알은 늙은이가 부른 고급 콜걸을 명중시킨다. 킬러는 재빨리 오토바이를 타고 파리의 밤거리를 질주하며 달아난다. 요컨대 완벽주의자의 실패가 이 영화의 시작인 셈이다.
다시, 독백을 곱씹어보자.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 마라.” 모든 상황과 가능성을 염두에 뒀음에도 킬러는 ‘임기응변’할 수밖에 없어진다. 전혀 계산에 없던 일이다. 킬러는 자기과신이 아니라 자기성찰의 기본으로 자신의 원칙을 되새겼을 뿐이다. 오차와 변수마저 계산해 뒀지만, 1초도 안 되는 순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셈. 아마 킬러는 자신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자신이 죽게 될 상황에 대한 예측과도 같다. 죽이지 못하는 자는 죽게 되어있는 게 킬러의 운명 아니겠는가. 영화는 이후, 킬러가 그 실패의 본원적 지점을 찾으러 떠나는 일종의 여행기가 된다.
“모두 내 이름이지만, 전부 내가 아니야”

킬러는 이름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여러 개의 이름들이 언급되는데, 모두 그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 공항이나 렌터카 직원, 혹은 마트 점원에 의해 불릴 뿐이다. 요컨대 그는 ‘무엇이라 불리는 자’일 뿐, 스스로 누구라고 밝히지 않는 자다. 프랑스 누보로망이 떠올랐던 건 이런 연유이기도 하다. 분명히 존재하되, 누구인지 확증할 수 없는 사람.
킬러는 원래 법학을 공부했던 인물로 설정돼 있다. 법은 제도이자 시스템이자 보호막이자 굴레이다. 그리고 킬러는 그 법을 이용해 법망을 뚫고 법에서 제한한 행동을 저지르는 자다. 그러곤 다시 법의 울타리 안에 자신을 숨기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다. 때문에 그의 정체를 아는 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 그 기묘한 역설 속에서 킬러는 살고, 또 그렇게 산 자의 얼굴로 죽은 체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주인공이 혼자 독백하면서 스스로를 지우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지워져야 존재할 수 있는 사람.
틸다 스윈튼이 잠깐 등장한다. 킬러의 애인을 다치게 한 배후 인물 역할이다. 한 택시 기사에 의해 그녀는 ‘면봉처럼 생긴 여자’라 지칭된다. 기다란 몸매에 짧은 은발 탓이다. 킬러가 그녀를 처음 목격한 순간, ‘틀린 말은 아니군’이라 독백한다. 피식 웃게 되는 장면인데, 이 영화엔 이런 식의 유머가 살금살금 배어있다. 그게 또 킬러의 윤곽을 도드라지게 한다. 자신의 원칙이나 작업 지침을 늘어놓는 독백에선 문득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서머리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이를테면 삶의 일상적 지점을 아예 넘어섰거나 더 근원적인 지점에서 세계와 삶을 냉소하는 인물. 그리하여 더 존재의 궁극 원리를 터득한 인물.
법을 도구 삼아 치외법권이 된 자들

틸다 스윈튼은 이 영화에서 킬러와 가장 길게 대화하는 인물이다. 이 역시 데이비드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2009)가 연상되는 지점. 그 영화에서도 ‘잠깐’ 등장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더 킬러>에서 그녀는 킬러의 희생자이자 지배자이자 일종의 ‘전도’(傳導도 맞고 顚倒도 맞다)를 체험케 하는 인물이다. 성공과 실패의 시작과 끝에 그녀가 존재한다는 건 영화를 다 보고나서 짐작할 수 있는 사항이다. 법을 이용해 법을 뚫고 그 위에 존재할 수 있는 자. 뜬금없지만, 현재 한국 정치 최상부 인물들이 모두 율사 출신이라는 사실이 문득 소름 끼쳤다. 영화는 영화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당연히 사실이 소름 끼치다니. ‘공감’도 좀 하고, 가끔 ‘약함’으로 스스로 돌보기도 해 봐라, 이 사람들아. 절대 가명들은 쓰지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