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명소, 명곡, 제품…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주변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씨네플레이 기자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하루 종일 영화, 드라마로 글을 쓰면서도 여유 시간에 잠깐 사담을 떨 때면 '이번에 이 작품이 좋더라' '이 사람이 나오는 영화는 좋더라'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영업에 나서곤 한다. 그런 마음을 독자들에게도 전하고자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사심을 살짝 얹은, 그러면서도 독자에게 유익할 영업을 준비했다. 각 기자들이 주제 맞게 선정한 것을 소개하는 '씨픽', 첫 주제는 '앞으로 주목하면 좋을 차세대 감독'이다. 이번 차세대 감독은 국내에 정식 개봉한 작품이 적은 감독을 중심으로 선정했다. 첫 번째 타자는 김지연 기자와 <해시태그 시그네>의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이다.

‘해학’. 그의 작품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말이 있을까. 묘하게 한국적인 말인 동시에, 다른 나라 언어로 뉘앙스를 살리기 어려운 ‘해학’이라는 단어. 그러나 가장 '해학적인' 작품을 만드는 한 노르웨이인, 크리스토퍼 보글리는 이제 막 두 번째 장편 영화를 내놨다. 그는 장편 데뷔작 <해시태그 시그네>(2022)부터 국내에서 오는 5월 말 개봉하는 <드림 시나리오>(2023)까지, 단 두 편 만으로 차세대 블랙코미디 장인의 탄생을 예견했다.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해학은 아이러니를 비트는 데에서 출발한다. <해시태그 시그네>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단편을 포함한)의 장르를 정의하자면, ‘불편한 코미디’가 아닐까. 그의 첫 장편 <해시태그 시그네>는 (네이버 영화 DB에는 ‘멜로/로맨스’라고 쓰여있긴 하지만) ‘언로맨틱 코미디(unromantic comedy: 로맨틱하지 않은 코미디)’라고도 불린다. <해시태그 시그네>가 2022년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을 때는 ‘거의 코미디(almost comedy)’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마냥 로맨틱한 코미디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해시태그 시그네>의 내용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관심을 받고 싶어서 고의로 자신을 병들게 한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행위 예술가인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한 ‘시그네’. 시그네는 한 알약이 심각한 피부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접하고, 알약을 과다 복용한다. 그녀의 병이 심각해져 갈수록 남자친구를 비롯한 사람들의 관심은 늘어나고, 결국 시그네는 한 패션 브랜드의 모델로까지 등극한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느 특별한 ‘관종’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관종이다’라는 메시지에 가깝다. 호러인지, 코미디인지 모를 이 영화가 상정하는 세계와 인물은 매우 일상적이며, 종종 우스꽝스럽고 극단적일지언정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보글리의 ‘불편한 코미디’ 속의 불편함은 바로 이 부분에서 기인한다. 분명 이상한데, 그럴 법하다.
크리스토퍼 보글리는 현실과 똑 닮은 정상적인 세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상황을 상정한다. 보글리가 만든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외려 그래서 더 사회와 나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현실을 꼬집는 수단으로 ‘코미디’라는 장르를 선택한 보글리가 영리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과한 유머와 웃음 포인트로 가득 차 있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화면은 정적이라고 할 만큼 건조하며 특정한 판단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카메라는 마치 제3자의 시선인 것 마냥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는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다수의 단편 작업을 해 왔는데, 장편영화를 연출할 때도 (형식은 달라졌지만) 모큐멘터리 특유의 건조함과 버석함은 그대로 옮겨 왔다.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통찰은 그가 취미 삼아 만든 작품들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해시태그 시그네>를 본 뒤에도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세계가 당최 어떤 곳인지 모호하다면, 그의 단편 영화 몇 개와 짤막한 영상 작업들을 보자. 그의 해학적인 세계가 놀랍도록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음에 놀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일련의 연작인 듯, 하나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아이러니를 만들고 웃음을 유발한다. KTX를 타고 가면서 봐도 앞구르기 하면서 봐도 “나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작품이요!”라고 소리치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단편 <Eer>와 <Former Cult Member Hears Music For The First Time>(전 사이비 신도가 처음으로 음악을 듣다)는 <해시태그 시그네>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er>은 풍선처럼 부푸는 귀를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고, 2020년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된 단편 <Former Cult Member Hears Music For The First Time>는 예술에 관한 의문을 던지는 모큐멘터리다.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장편영화를 더욱 재밌게 감상하는 팁은, 그의 유튜브 채널에 방문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보글리는 <해시태그 시그네>와 <드림 시나리오> 공개 시기에 맞춰 독특한 홍보 영상(혹은 단편 영화)을 만들었는데, 그 방식이 너무나 기발하고 보글리스러워 그의 필모그래피에 추가해야 할 정도다.
<해시태그 시그네> 때는 <Filmmaker gets shot during interview>(인터뷰 중 총 맞은 감독)이라는 6분짜리 영상을 공개했는데, 크리스토퍼 보글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모큐멘터리다. 영상은 말 그대로 인터뷰 도중에 총을 맞았음에도 계속 인터뷰를 진행하는 <해시태그 시그네>의 감독(크리스토퍼 보글리 본인)의 모습을 담았다. 피를 흘리면서도 "이 푸티지를 영화 홍보에 써"라고 말하는 크리스토퍼 보글리는 <해시태그 시그네> 속 ‘시그네’의 모습과 똑 닮았다. 6분의 짧은 영상이 <해시태그 시그네>를 이토록 집약적으로,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음에 놀라울 정도다.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코미디 연기를 잘 한다는 사실, 그리고 심지어 연기를 꽤나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담으로, <해시태그 시그네>에서도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연기하는 배역을 찾아볼 수 있다!)
작년 북미에서 <드림 시나리오>가 개봉한 후,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공개한 <Filmmaker interviewed while sleeping>(자면서 인터뷰한 감독)이라는 영상도 마찬가지로 영화 홍보라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한 듯하다. <Filmmaker interviewed while sleeping> 역시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등장하는 모큐멘터리로, <드림 시나리오>의 소재를 재치 있게 빌려왔다. 아직 한국에서는 개봉 전이지만, <드림 시나리오>는 한 남자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꿈에 등장하며 유명인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다. <드림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만들어 갈 독특하고 해학적인 세계가 기대가 된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