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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픽: 내가 뽑은 차세대 감독④] 비루함과 숭고함 사이, 알리체 로르와커의 미학

이진주기자

맛집, 명소, 명곡, 제품…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주변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씨네플레이 기자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하루 종일 영화, 드라마로 글을 쓰면서도 여유 시간에 잠깐 사담을 떨 때면 '이번에 이 작품이 좋더라' '이 사람이 나오는 영화는 좋더라'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영업에 나서곤 한다. 그런 마음을 독자들에게도 전하고자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사심을 살짝 얹은, 그러면서도 독자에게 유익할 영업을 준비했다. 각 기자들이 주제 맞게 선정한 것을 소개하는 '씨픽', 첫 주제는 '앞으로 주목하면 좋을 차세대 감독'이다. 이번 차세대 감독은 국내에 정식 개봉한 작품이 적은 감독을 중심으로 선정했다. 그 바통을 이어 받을 네 번째 주자는 <키메라>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을 쓸 이진주 기자다.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입성, 두 번째 작품으로 칸 심사위원대상 수상, 세 번째 작품은 칸 각본상 수상… 데뷔 7년 만에 세 편의 장편 영화로 엄청난 성과를 낸 알리체 로르와커. 지난 4월 3일 개봉한 신작 <키메라> 역시 제76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으며 그는 이탈리아의 차세대 거장임을 증명했다.

 

알리체 로르와커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을 계승하는 대표적인 감독이다. ‘네오리얼리즘’이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로파간다 영화가 쏟아져 나오던 이탈리아 영화계에 반발하여 시작된 사조이다.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이 현실의 문제를 거칠고 담담한 화면에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알리체 로르와커는 여기에 초월적 관점을 더해 기존의 사조와는 이질적인 독특한 지점을 선점한다. 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주요 인물의 현실을 조명하면서도 동시에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을 형상화하거나 인물을 신비로운 분위기로 담아내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을 유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리체 로르와커의 작품은 쉽지 않다. ‘쉽지 않다’라는 표현에는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와 ‘낯설다’, ‘극적 재미가 떨어진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데뷔부터 꾸준히 칸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알리체 로르와커의 작품은 더욱 거리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가 ‘네오리얼리즘’에서 나아가 그 이름부터 역설적인 ‘마술적 리얼리즘’의 독자적인 방식을 구축하며 전 세계 영화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만은 자명하다. 당신이 알리체 로르와커의 작품을 아직 접하지 못했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름답지만 난해하고, 조용하지만 강렬한 알리체 로르와커의 작품을 만나보자.

 


영화 <더 원더스>(2014)

 

 

알리체 로르와커는 두 번째 장편 영화 <더 원더스>로 제67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그의 첫 장편은 2011년 개봉한 <천상의 육체>이다.) <더 원더스>는 그해 칸에 초대된 유일한 이탈리아 작품으로 당시 알리체 로르와커는 “이탈리아 농부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포부를 전하기도 했다.

 

영화는 이탈리아 농촌 마을 움브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12살 소녀 젤소미나(마리아 알렉산드라 룽구)는 양봉업을 하는 집의 네 자매 중 맏이이다. 외부와 단절된 이곳은 엄격한 아버지 볼프강(샘 루윅)의 주도하에 돌아간다. 아버지는 세상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것이라 믿고 안전한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사회봉사를 위해 파견된 소년원 출신 독일 소년 마르틴(루이스 휠카)은 든든한 일손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그러던 중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해 온 가정을 뽑는 TV 쇼 ‘컨츄리사이드 원더스’가 이 마을을 찾아오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젤소미나는 이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가족들을 설득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원더스>는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3부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작품 시작으로 후술할 <행복한 라짜로>(2018), <키메라>(2024) 등을 통해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신화와 세속 등 다층적인 두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루어 냈다. <더 원더스>는 아버지 볼프강이 상징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소녀 젤소미나의 다원적 이념 사이 충돌을 담아낸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단순히 ‘소녀의 성장기’ 정도로 압축하기엔 무리가 있다. <더 원더스>는 그 자체로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메시지를 종결한 작품이 아닌 그의 예술 세계가 뻗어 나갈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2018)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구조적으로 2부 구성을 띈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Inviolata)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곳에는 여전히 봉건제가 남아있는 후작부인(니콜레타 브라스키)의 담배농장이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이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최하위 계급에 주인공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가 있다. 선한 얼굴로 사람들의 부름에 늘 응하는 ‘라짜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청년이다. 이들은 소작이 금지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외부와 격리되어 착취당하고 또 착취한다. 그러던 중 후작 부인과 그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가 요양차 이 마을을 찾아오고 라짜로는 탄크레디와 가까워진다. 탄크레디는 라짜로를 이용해 어머니에게 저항하려고 한다. 그러던 중 라짜로는 높은 언덕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정신을 잃는다. 이후 일련의 사건으로 인비올라타 담배농장의 부조리가 세상에 밝혀지고 공동체는 와해된다.

 

‘침해되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은 마을 인비올라타의 최하위 계급인 라짜로는 성경의 ‘나사로’를 연상시킨다. 성경 속 나사로는 매우 빈곤한 환경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결국 부활하는 인물이다. 이와 같이 라짜로의 순수함과 선함은 보통의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영역의 것으로 비추어진다. 나아가 나사로가 부활하듯 사고 후 깨어난 라짜로가 길을 떠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아무도 남지 않은 마을에서 홀로 깨어난 라짜로는 차례로 농장의 동료들을 다시 만난다. 마치 영적인 존재인 양 여전한 얼굴의 라짜로와는 달리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그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소외되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반갑게 인사하는 라짜로를 하대하거나 또다시 이용하려 한다. 계속되는 수난에도 이 성인(聖人)은 절대 분노하거나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아무도 라짜로의 선(善)을 알아보지 못할 때 그를 따르는 음악에 미소 지을 뿐이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많은 작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웅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라짜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우리 곁에 라짜로가 나타난다면 우리 역시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라며 영화의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행복한 라짜로>는 고립된 개인과 공동체가 동시대적 환경에 흔들리는 모습을 그린 전작 <더 원더스>에서 한 발짝 나아가 두 세계를 연결하는 라짜로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구조적 모순을 우화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영화 <키메라>(2024)

 

 

영화 <키메라>는 에트루리아 유적을 찾아다니는 도굴꾼 아르투(조쉬 오코너)의 이야기를 담는다.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잠들어 있는 땅 이탈리아에서 아르투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정확하게 보물의 위치를 찾아낸다. 영국인인 아르투는 사라진 여자친구 베니아미나를 만나기 위해 도굴을 지속한다. 다른 도굴꾼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는 아르투를 구해준 것은 주체적이고 쾌활한 여성 이탈리아(캐롤 두아르테)이다. 아르투는 이탈리아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만 결국 다시 과거의 흔적을 찾아 떠나고 만다.

 

‘키메라’는 머리는 사자, 몸통은 양, 꼬리는 뱀의 모습을 한 괴수의 이름이기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유적을 찾아내는 아르투의 능력이 발휘될 때를 ‘키메라 상태’라고 부른다. 이는 저승의 문을 찾아 잃어버린 애인 베니아미나와 재회하고자 하는 아르투의 간절한 소망이 발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관을 열어 보물을 찾아내는 행위인 도굴은 아르투가 천착하는 과거의 연인 베니아미나에게 가까워지는 행위이고 이는 곧,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이를 어둡거나 무겁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 <키메라>에 대해 ‘복잡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전했다. 일관적이지만은 않은 인간의 삶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숭고한 것을 가볍게, 신성한 것을 불경하게 다룬다’며 아르투의 이별과 상실을 유머러스하게 다룬 이유를 설명했다.

 

씨네플레이 이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