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의 몰락은 흥미를 끈다. 그리고 몰락한 스타가 다시금 전성기를 찾을 때, 모두가 희열을 느낀다. 케빈 코스트너는 90년대 '할리우드 스타'의 대명사로 쓰일 만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으나 출연작이 거듭 흥행에 실패하며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연기를, 배역을 착실하게 소화하며 다시금 명배우로서의 명성을 되찾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을 보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끓어오르곤 한다. 이번에 사비까지 들여 연출, 주연을 맡은 <호라이즌> 연작이 개봉하며 그는 잡지 'GQ'와의 영상에서 대표작과 대표 캐릭터에 대한 코멘트를 달았다. GQ가 선정한 대표작과 대표 캐릭터를 참고해 소개한다. 케빈 코스트너의 멘트는 한 문장 정도만 옮겼으니 궁금하다면 하단의 영상을 참고하자.
꿈의 구장 (1989) = 레이 역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면, 대중에게 공유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명작 야구 영화 하면 빠지지 않는 <꿈의 구장>.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옥수수 농사를 지으며 살던 레이가 '야구장을 지으면 그가 온다'는 계시를 받고 야구장을 짓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리고 야구장을 다 짓자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야구장에 나타난다. 케빈 코스트너는 이 영화에서 레이 역을 맡아, 주변의 만류에도 자신만의 믿음으로 정진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영화는 제작비의 5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이며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음악상 후보로 올랐다. 2021년엔 해당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뉴욕 양키스 vs 시카고 화이트 삭스' 이벤트 매치가 열렸고, 케빈 코스트너가 개회사를 맡았다.
늑대와 춤을 (1990) = 존 던바 중위 역
엇갈린 의사소통을 드라마를 낳고, 때로는 유머를 유발한다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 히트작이라면 <늑대와 춤을>이 가장 먼저 호명될 것이다. 감독, 주연, 제작까지 1인 3역을 한 <늑대와 춤을>은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던바 중위가 인디언 부족에게 감화돼 겪는 이야기를 다뤘다. 3시간에 달하는 장대한 영화가 흥행할 수 있는가 기우가 많았으나, 그의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것을 넘어 그를 당대 최고의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백인 중심의 서부영화를 재정립했다는 의의, 인디언 문화를 접근하는 방식, 독특한 제목(과 인디언식 이름)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영화.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제작진이 실제 인디언들을 기용하는 등, 영화의 스케일만큼 제작 과정도 다사다난했지만 그만큼의 성과를 거뒀으니 다행이다.
보디가드 (1992) = 프랭크 파머 역
다른 후보들은 무척 좋은 배우였지만 레이첼과 맞지 않았다,휘트니 휴스턴을 봤을 때 '저 사람이 레이첼을 연기해야 해'라고 생각했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테마곡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보디가드>는 케빈 코스트너와 휘트니 휴스턴이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조우했다. 과거의 상처가 있는 전직 대통령 경호원 프랭크와 자유분방한 인기 가수 레이첼의 만남과 로맨스는 무슨 맛인지 알면서도 찾게 되는 맛집과도 같다. 사실 영화보다 휘트니 휴스턴이 극중 레이첼로 부른 노래 'I Will Always Love You'가 더 유명한 것 같지만. 한국에서도 서울에서만 70만 관객을 동원(당시 전국 박스오피스 정립 전), OST 앨범도 100만장 이상 판매되는 등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제작비 대비 16배에 달하는 성적을 거뒀다. 휘트니 휴스턴이 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 케빈 코스트너는 "나는 당신의 보디가드였었는데, (당신은) 너무 빨리 가고 말았다"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케빈 코스트너는 휘트니 휴스턴의 재능과 매력을 알아보고 'I Will Always Love You' 도입부를 아카펠라로 하자고 제안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옐로우스톤 (2018~) = 존 더튼 역
(존의 행적은) 여러 면에서 잔인하면서도 성경적이다. 그저 그렇게 될 뿐이다. 이게 그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이다

그의 첫 드라마이자, 전성기 폼을 다시 끌어올린 <옐로우스톤>은 몬타나주의 목장 '옐로우스톤'을 운영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2018년 첫 방영 이후 시즌 5까지 제작 중인 <옐로우스톤>에서 케빈 코스트너는 총괄 프로듀서이자 주연 존 더튼 역을 맡았다. 집안 대대로 경영한 옐로우스톤을 물려받은 그는 자신의 땅과 관련해서 여러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현대가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인 인간 군상과 땅을 차지한 백인 대 다른 집단의 갈등이 그려지며 21세기형 서부영화로 거듭났다. 제작진과 케빈 코스트너 간에 소통이 엇갈리며 시즌 5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로빈 훗 (1991) = 로빈 록슬리 역
미국적인 재미가 있었다. 제작진이 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굉장히 좋다' 생각됐고 출연하고 싶었다

<로빈 훗>은 기존의 로빈 후드보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전설적인 의적 로빈 훗을 재해석했다. 능수능란한 활솜씨로 종회무진 활약하는 영웅이자 민중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겸비한 리더라는 이미지는 케빈 코스트너를 통해 구현됐다. 케빈 코스트너 본인에겐 티켓 파워를 입증한 고마운 작품이자 '망작 아카데미'라고 불리는 골든라즈베리 수상에 성공(?)한 미운 손가락일 듯. 아무튼 제작비 대비 8배에 달하는 흥행 기록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으며 이후 여러 로빈 훗 영화가 나왔음에도 이 작품의 혈기왕성한 에너지는 다른 영화가 따라잡지 못했다. 참고로 로빈 훗은 영국인인데, 케빈 코스트너가 미국인인 탓에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상대역 노팅엄을 연기한 영국배우 알란 릭먼은 "싸우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또 다른 미국인 배우가 왔네"라는 농담으로 코스트너의 긴장을 풀어줬다고. 그리고 두 사람은 촬영장에서 함께 '마법의 버섯'(환각버섯)을 찾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단다.
19번째 남자 (1988) = 크래쉬 역
누크를 연기하길 바란다고 했지만, 내가 크래쉬를 연기하는 게 낫겠다고 제안했다

<꿈의 구장>이 야구 영화라기에 허무맹랑한 얘기라면, <19번째 남자>를 챙겨보면 될 것이다. 야구마니아 케빈 코스트너답게(야구 구단주가 되기도 했다) 스포츠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는데, <19번째 남자>는 그의 출연작 중 덜 유명한 편이지만 야구 영화로선 지금까지도 추천작으로 꼽히고 있다. 마이너리그 구단 '더램 불스'에 영입된 투수 에디와 포수 크래쉬가 함께 팀을 이끌다 에디만이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면서 크래쉬가 겪는 일을 그린다.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케빈 코스트너는 능수능란한 포수이자 결국 마이너리그에 남아 실력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비운의 선수를 절절하게 연기했다.
실버라도 (1985) = 제이크 역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생에서 서부영화를 하게 될 거라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 역할은 내가 딱 맞는 역이었다

서부영화에 일가견이 있는 케빈 코스트너의 첫 서부영화는 <실버라도>다. 그가 원톱배우로 자리잡기 전인 1985년 나온 영화이기에 켈빈 클라인, 스콧 글렌, 존 클레시, 로산나 아퀘트에 이어 다섯번째로 이름이 올랐다. 네 명의 카우보이는 실버라도에서 보안관이 된 전 동료 콥에게 복수하고자 총구를 들이민다. 케빈 코스트너는 일행 중 가장 마지막에 합류하는 제이크를 맡았다. 첫 등장부터 보안관에게 붙들려 교수형을 선고받고, 탈출 후 일행과 함께 하면서도 계략에 빠져 납치당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다. 그의 데뷔 초창기 모습이기에 그의 영화를 많이 챙겨봤더라도 이 풋풋한 꽃미남 시절 모습에 푹 빠질지도 모르겠다. 케빈 코스트너는 로렌스 카스단 감독의 전작 <빅 칠>에도 출연했는데, 통편집됐다. 그럼에도 그는카스단 감독과 작업한 기억이 좋았어서 차기작 <실버라도> 출연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랑을 위하여 (1999) = 빌리 채플 역
(<19번째 남자> 이후) 다른 야구 영화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 영화 시나리오를 읽고 나를 지나쳐가도록 둘 수 없었다

야구에 미친 배우 케빈 코스트너는 <사랑을 위하여>라는 낭만적인 야구 영화에도 출연했다. 트레이드를 앞둔 투수 빌리 채플은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 받는다. 구단에서의 마지막 경기, 어쩌면 진짜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운드에 선 빌리는 떠난 연인 제인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경기에 최선을 다한다. <19번째 남자>에서 포수였던 케빈 코스트너는 이번 영화에서 투수로 변신한다. 야구 선수로 활동했던 학창시절의 경험이 이번 영화의 현실감을 더한다(물론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은 실제 투수가 대역을 했다). 가상의 이야기임에도 실제 메이저리그 선수들과 심판들이 영화에 등장하면서 야구 팬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안겨준다.

언터처블 (1987) = 엘리엇 네스 역
촬영이 없는 날에도 촬영장에 갔다

영화는 제목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당대를 휘어잡은 마피아 알 카포네를 체포한 비밀검찰국의 이야기를 다룬 <언터처블>은 제목처럼 함부로 끌어내릴 수 없는 불세출의 걸작이 됐다. 케빈 코스트너는 비밀검찰국의 엘리엇 네스 요원을 맡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냉철한 판단력과 악착같은 실행력을 보여준다. 대배우 숀 코네리와 함께 하면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남겨 배우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졌다. 케빈 코스트너는 현장에서 숀 코네리와 친해졌는데, 자신조차 그와 이렇게 친해질 줄 몰랐는데 친해졌다며 신기했다고 회상했다.

JFK (1991) = 짐 게리슨 역
<D-13>을 함께 보기 전, 피델 카스트로가 말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뒤집어 씌울까봐 무서웠다고.

검사 짐 게리슨의 시선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추적하는 영화 <JFK> 또한 시대의 걸작으로 유명하다. 짐 게리슨이 집필한 논픽션을 토대로 구성한 영화는 '음모론'이라 치부돼도 마땅할 이야기를 저돌적으로 풀어낸다. 케빈 코스트너는 주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건을 재해석하는 게리슨 역을 연기해 관객들을 영화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후반부 법정장면에서의 열연은 그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은 장면이기도. 어떻게 보면 그저 음모론에 불과한 영화를 테크니컬한 연출로 관객을 사로잡은 올리버 스톤 감독, 그리고 곳곳에서 각자의 인장을 남기는 배우들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JFK>를 기억하게 만든다.
와이어트 어프 (1994) = 와이어트 어프 역
우리 모두 먼지에서 구르고, 세상을 구하고, 여자를 얻고, 총싸움을 하고 싶었다. 이 영화를 만들게 돼서 흥분됐었다

'OK목장의 결투'로 유명한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의 일생을 다룬 영화로, <실버라도>의 로렌스 캐스단과 다시 힘을 모았다. 사실 와이어트 어프나 OK목장의 결투는 여러 차례 영화화됐고, <와이어트 어프>는 그중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직전에 나온 <툼스톤>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실 케빈 코스트너도 당시 <툼스톤>과 맞붙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연기하자는 말도 나왔다는데, 결국 비슷한 시기에 제작을 강행했다고. 영화가 완성도나 흥행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케빈 코스트너표 와이어트 어프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3시간에 달하는 와이어트 어프의 서사가 쌓이면서 케빈 코스트너의 와이어프는 멋있는 카우보이의 결정체 같은 이미지를 남겼다. 일대기를 따라가면서 멀끔한 시절부터 한층 누추한 떠돌이 시절까지, 당시 남성미를 한몸에 담아내 배우이자 스타로서의 그의 역량을 엿보게 한다.

